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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건전남 Oct 10. 2023

고대보다 연대?  뭉쳐야 산다!

이제는 제발 멈춰주세요

뉴스를 통해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 소식을 들었다. 이어 미국 등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공격하는데, 뉴스를 통해 비치는 전쟁의 모습은 컴퓨터게임과 무척 닮아있었다. 언뜻 '뫼비우스'라는 게임 타이틀이 떠오르는데, 폭탄을 떨어뜨려 파괴해야 하는 표적의 현실감 없는 그래픽이 비슷했기 때문이었을 거다.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거나 다쳤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절대선'이 공격하는 '절대악'은 죽어 마땅한 괴물에 불과했다. 과연 이라크는 언제쯤 궤멸하게 될까. 최종 보스 사담 후세인은 어떻게 되는 걸까. 흥미진진한 논쟁이 오가던 1990년 가을 초등학교 6학년 교실... 모두들 왜 그렇게 전쟁에 열광했는지... 부끄러운 일이다.




걸프전이 종결된 지 30년이 지난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전면전이다. 이건 또 무슨 우연이려나. 지환이도 이제 6학년인데...  역사책 속에나 있는 줄 알았던 전쟁이 당장 우리 시대에 펼쳐지다니. 지환이의 눈빛이 과거 아빠의 눈빛만큼이나 반짝인다. 혹시나 누구처럼 부끄러운 기억을 갖게 될까 두려운 현재의 아빠는 재빨리 의미 있는 영상을 찾아 아들에게 들이밀었다.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상이다. 전쟁은 컴퓨터게임이 아니며, 실제로 누군가 죽고 다치고, 삶의 터전이 무너진다고 구구절절 설명이 보태진다. 다행히 지환이도 꼬꼬마 동생 려환이도 아빠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준다.


아빠, 선생님이 '평화행동'이라는 걸 시작했어요


저녁 식탁, 환브로가 뭔가 재미난 일이 있다는 듯 요란스럽게 수다를 떤다. 학교 정문에서 지환이 담임 선생님이 무언가 손피켓을 들고 교문에서 아이들을 맞았다는 거다. 이름하여 '평화행동'.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규탄한다는 내용을 아이들에게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등굣길 아이들을 향한 선생님의 '1인 시위'를 아이들 대부분은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아이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낄낄대기도 했다는데, 지환은 안타까움에 몸을 부들부들 떨더라. 본의 아니게 선행학습을 한 효과가 나타난 모양새려나. 물 들어올 때 노를 젓는다. 재빨리 환브로에게 너희들도 선생님과 함께 해보는 건 어떻냐고 낚시를 시도한다. "오, 멋진 생각인데!" 지환이가 '옳거니' 순식간에 덥석 미끼를 물었다.  


한 명에서 두 명으로, 이제 그 이상으로


이튿날 아침 선생님 곁에 지환이가 함께 섰다. 전날 밤 꾹꾹 눌러쓴 손피켓을 들고 전쟁을 멈춰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자신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친구들은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치는 몇몇 동생들에게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더라. 그래도 덕분에 선생님은 덜 외로웠을 거야. 묵직한 저녁 식탁, 지환이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리는 아빠에게 려환이가 조용히 한 마디 얹어본다. "나도 내일 형아랑 같이 할까?"


지환이와 려환이에 이어, 하나 둘 '평화행동'에 동참하는 아이들이 늘었다. 조용히 손피켓만 들고 있던 아이들은 이제 구호도 함께 외쳤다. "전쟁 멈춰", "우크라이나에 평화를", "푸틴은 물러가라" 등등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구호들이 이어졌다. 논두렁 옆 학교 앞을 지나는 이도 거의 없었지만, 평화행동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아이들 등교를 도와주는 부모들의 관심도 함께 부풀었다. 하루는 오전 반차를 내고 아이들에게 힘을 더해줬는데, 이 꼬마들 그냥 생각 없이 나선 게 아니더라. 전쟁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부끄러운 6학년의 기억이 아이들과 함께 조금씩 희석되고 있었다.


우리와 같은 어린이가, 우리의 부모님이, 우리의 이웃이 죽고 있어
그리고 우리 마을이 사라지고 있어


학교 앞 마지막 모임에서 지환이가 전교생 앞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현장에 함께하지 못해 정확한 '워딩'은 알 수 없지만, 전해 듣기로는 꽤 멋진 말을 남긴 것 같더라. 우크라이나가 멀리 있어서 우리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괜찮다고. 우리가 걱정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어떻게든 전달될 거라고. 우리와 같은 어린이들을 위해 전쟁을 멈추자고 이야기했다더라. 정확히 전날 아빠가 지환이에게 해준 이야기다. 하하. 뭐, 그래도 그걸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이라고 하자. 아무튼 언론에서도 꼬마들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그렇게 지환이의 바람 대로 아이들의 마음은 멀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작은학교' 전교생이 함께한 평화행동


"전쟁 멈춰!  푸틴 들리냐!"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초등학교 6학년 꼬마들이 거리에 나서 70살 노인 푸틴에게 반말을 내뱉는다. 청학동에 불려 가 예절교육이라도 받아야 할 것 같지만, 꼬마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 많은 어른들은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주말을 맞아 서울로 향한 시골 '작은학교' 친구들의 콩닥거리는 가슴도 진정이 되는 눈치다. 눈가에는 스스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는 뿌듯함이 한가득이다. 정말 어디에선가 푸틴이 들었을 것만 같은 '우크라이나 평화 집회' 현장이다.


"전쟁 멈춰! 푸틴 들리냐!"
행동하는 어린이는 아름답다


수십 번을 고쳐 쓰고 또 고쳐 쓴 발언문이었다. 최대한 천천히 또박또박 읽자는 다짐에도, 꼬마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순식간에 읽어 내려간 발언문은 제대로 알아듣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멀리서 주말을 반납한 채 상경투쟁에 나선 꼬마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간식을 챙겨주는 분이 기억에 남았고, 인터뷰 요청에 최대한 여유롭게 답을 들려준 것도 만족스럽다. 하지만 가장 큰 수확을 묻는 질문에 지환이는 조금 더 큰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학교 앞에서는 우리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같은 생각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힘이 나죠" 그렇게 지환이는 '연대'를 깨달았다. 약자의 길이 편하지는 않을지라도, 함께 해 행복할 수 있음을 그렇게 깨우쳤다. 지환이의 초등학교 6학년은 부끄러움이 아닌 뿌듯함으로 기억될 테다ⓚ.


"같은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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