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오래전 나를 찾아온 '루마티스 루프스'가 내 몸 마디마디를 또 공격하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다. 갱년기와 불면증 때문에 밤 잠설치는 것도 모자라 지병으로 인한 피곤이 있는 대로 쌓여 컨디션이 최악이다. 며칠 전부터는 왼쪽 팔의 통증이 극도로 심해져 옷 갈아입기도 힘들어졌다. 그로 인한 우울감으로 만만한 게 남편이라고 자꾸 남편에게만 내 감정을 들춰낸다. 이런 나를 지켜보고 받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남편의 맘도 편할 리가 없을게다. 그래서 미안하고, 민망하기도......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난 나의 루틴대로 집안 청소부터 하고는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한 뒤 병원으로 향했다.
목부터 어깨, 팔까지 주사를 수차례 맞고 물리치료도 받았다. 주사가 좀 아프긴 하나 이렇게 맞아주면 어느 정도의 통증을 견딜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어 참지 못 할 정도의 아픔이 오면 최상의 방법으로 어쩔 수 없이 병원을 찾는다. " 자~~ 이젠 주사도 맞았겠다! 통증도 좀 사그라들었겠다! 좀 움직여 볼까" 하는 맘으로 남편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여보야, 우리 데이트하러 갈까?"
"좋지! 어디 가고 싶은데?"
"음~~ 좀 걷고 싶은데... 공기 좋은 산, 어떨까?"
남편은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예전에 아들이랑 등산을 와 봤던 곳이라며 등산로도 그리 험하지 않고, 정상까지의 거리도 길지 않으니 나에겐 안성맞춤일 거라며 데이트코스로 수리산을 소개했다. 우리는 등산복과 등산화도 갖추지 않았지만 남편의 말대로 길이 험하지 않아 무리 없이 산 길을 걸었다. 산을 오르면서 나무 주변과 바위표면에 핀 이끼도 보고, 졸졸 흐르는 계곡물 소리도 들으니 그간 쌓인 짜증과 통증들이 비 온 뒤 개인 하늘을 보는 듯 상쾌했다. 남편도 땀을 흘렸다 식힐 때의 느낌이 너무 개운하다며 오늘의 데이트를 만족스러워했다. 요즘 남편과 함께 집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밖으로 나오는 그, 차체만으로도 좋은데 그곳이 산이어서 훨씬 더 좋았던 것 같다.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산 중턱까지 올랐다.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을 함께 헐떡거리며 숨 고르기를 할 땐 순간 울컥하기도 했다. 지금의 우리 모습은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으로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하고 불안스럽기만 하나 이렇게 두 손 맞잡고 숨 고르기를 하듯 지금의 시간을 잘 견디면 곧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아 마음이 평안해졌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닌 것에 감사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부지런히 산속 풍경을 눈에 담았다. 곱디고운 단풍은 우중충한 낙엽으로 변하고, 가지들도 앙상함만 남아 싸늘함이 감돌았지만 이 모습도 나에게는 의미 있게 다가왔다.
수암봉으로 향하는 등산로
그러나, 배가 너무 고파 도저히 정상까지는 갈 수가 없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나와 계속 걸었던 터라 배꼽시계가 밥 달라고 요란하게 울어대었다. 병원에서 받은 약도 빨리 먹긴 했어야 해서 오늘은 산 중턱까지만 걷고 다음을 기약하며 내려왔다. 등산로 초입으로 내려오니 동네 골목에 식당들이 꽤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쨉 싸게 식당들의 분위기를 훑고 한 군데를 지목해 들어가자 했다. 곧바로 메뉴를 고르는데 '묵은지두루치기'가 나의 입맛을 당겼다. 그러나 남편은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안 되겠다며 다른 걸 먹자 제안하기에 흔쾌히 알았다 하고는 메뉴의 선택권을 남편에게 주었다. 남편은 얼큰 수제비가 먹고 싶다 해서 그것과 함께 청국장을 주문했다. 사장님은 몇 가지의 반찬을 먼저 식탁에 올려주셨다. 우린, 배가 고팠던 상태라 주섬주섬 반찬부터 집어먹었다. 그러다 동시에 마주 보았다.
"음~~~ 너무 맛있어!"
아니나 다를까 본 메뉴도 다 맛깔났다. 간단하게 먹자 했던 우리는 식욕을 주체 못 하고 밥 한 공기와 반찬까지 리필해 빵빵하게 배를 채웠다.
수리산 초입에 자리 잡고 있는 식당
생각지도 못했던 '소확행'이 이런 게 아닌가 싶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막막함에 불안해했던 나는 어디로 갔으며,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뼈마디의 통증으로 우울해했던 나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건지...! 청국장 한 그릇과 잘 익은 열무김치, 새콤달콤 무쳐진 생채나물 한 접시에 이리도 행복해 할 수 있을까 싶었다.
"뭐가 중한데?"
맛있게 차려주신 사장님께 감사를 표하고 싶었지만 어찌 표현할 방법이 없어 난, 카드가 아닌 현금으로 점심 값을 지불하고는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네는데 사장님도 맛있게 먹어줘 감사하다며 친절하게 우리를 배웅해 주셨다. ( 다음에 또 가야지^^ )
다음은,
오늘 데이트의 마지막 코스, 카페이다. 산을 가기 위해 들어선 골목 초입에서"서정시대"란 카페를 보고 지나쳤었다.왠지 이름부터 서정적인 분위기가 나를 대만족 시켜 줄 것만 같았다. 두근 두근 하는 마음으로 들어선 카페는다름아닌 '북카페'였다.
골목에 어울리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뭐랄까! 산속에 자리 잡고 있을 만한 별장이나 산장 같은 곳에 꾸며져 있을 법한 분위기! 근데 이 분위기가 또 나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분위기 있는 테이블로 자리부터 잡고 앉아 메뉴를 골랐다. 남편은 따스한 아메리카노, 나는 따스한 카푸치노. 드라이한 거품의 정통 카푸치노를 좋아라 하는 나는, 이 메뉴를 섣불리 주문하지 않는다. 우유를 미지근하게 해서 벨벳폼으로 아트랍시고 만들어주면 이게 라떼인 건지, 카푸치노인 건지 정체성이 불분명해 마음에 안 들 때가 많아 그냥 아메리카노를 먹고 말지 한다. 그런데, 왠지 이곳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 같았다.
"와우^^"
"브라보~~~~!"
"오늘은 웬일이니!"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입술에 가득 묻어나는 드라이한 거품이 딱 내 마음에 드는 카푸치노였다.
이러한데, 내가 어찌 아니 행복할 수 있겠는가!
'서정시대' 카페
가는 곳마다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날,
하루종일 행복함이 감사로 내 가슴에 들어와 연실 입술로 '감사하다' 고백하게 했다. 아마도 하나님이 축 쳐져 있는 남편과 나에게 오늘을 선물해 주신 것만 같았다. 아침만 해도 아파서, 우울해서, 걱정으로, 맘이 천근만근이었는데, 저녁때는 서로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고, 함께 있어줌에 고맙다는 마음을 갖게 하니 참으로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하는 날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니 내일 일도 주님께 맡기고 그저 오늘을 행복하고 감사하게 살아가는 게 정답이었다. 그래서 오늘을 살아 본 내가 나에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