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역치

by 강제인

자정에 걸친 애매한 시간에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2019년 8반 5번이다. 3년 전 8반을 담임할 때에는 이 시간에 자주 연락이 왔었지만, 주로 5번이 아닌 3번, 21번, 24번의 전화였다. 5번은 그들과 친하지만, 그들과 다르게 별일이 있어야만 연락하는 편이었다. 이미 졸업까지 했으니 술이라도 마시고 전화한건가 싶어 안 받으려다 결국 의아한 마음을 참지 못해 받는다.


"너 내가 이 시간에 전화하면 받는다는 거 알고도 전화한거지?“


5번은 뜸도 안 들이고 대답했다.

“예. 그걸 또 받는 쌤도 참..."


취해있지 않는 한, 밤에 오는 전화를 꼭 받으려고 했었다. 마음은 낮보다 밤에 쉽게 무너진다는 걸 안다. 그 마음 조각 하나 내게 맡겨 놓는 거라면, 잘 받아 두었다가 밝을 때 돌려주고 싶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몇 번의 맞장구를 치는 일이 선생님으로, 어른으로 줄 수 있는 다정한 도움이라고 믿었다. 아무튼 먼저 전화를 한 건 본인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저렇게 말하는 게 어이가 없어서 뭐라고?, 전화해놓고 그렇게 말한다고?, 따져물으려 했으나 막상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냥 아오, 이러고 말았던가. 무더운 여름밤이었던가.


5번은 그가 졸업하던 해 여름, 나의 마음이 취해서 곧잘 울던 때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이별이 버거워 작은 부딪힘에 크게 흔들리고, 서운함을 키운 나는 온 마음을 다 해도 망가지는 교실 안 관계들에 아연해있었다.


"쌤, 그렇게 예민하면 안 돼요. 지나고 보니까 별일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 쌤이 너무 몰입해있었어요. 정년 보고 일하면 앞으로 가르칠 학생이 이천 명은 될 텐데, 그때마다 그럴 거예요? 보는데 좀 그랬어요, 그때 쌤이 너무 예민해서."


그렇게 만든 사람이 저런 말을 한다니, 정말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부정하지 못했다. 이건 아닌 거 같아서요, 갑자기 쎄-한 게, 생각해보면 별거 아니었는데, 쌤이 그렇게 예민하고 몰입한다는 게, 그럴 수 있는 건가, 5번은 계속 덧붙였다. 사랑하기로 한 마음에 최선을 다했더니 역치까지 이른 몰입은 정작 나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 학생들, 결국 타인과 맺은 관계의 모양이 바뀌자 깊숙하게 좌절하는 결말이 따랐다.


너무 뾰족하게 살면 안 돼, 네가 너무 힘들어. 나의 아버지가 휘청거리며 했던 말이 5번의 말과 닮아 있다. 내 얼굴이 그렇게 엉망인가, 마음이 힘들 때면. 불과 며칠 전만 해도 하루종일,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 할 수 있다, 더 망가지지 않을 수 있다, 중얼거리면서 가까스로 앉고, 나의 말에 상처입은 표정을 했던 지인에게 안부를 전하고 기프티콘을 보냈다. 약속을 잡고, 예의갖춘 밝은 얼굴로 나갔다. 힘든 마음을 들고 나를 찾는 학생들의 눈을 보며 말을 들었다. 아빠, 나도 매일 노력하고 있어, 다짐처럼 뱉은 말을 지키려고 잦은 울음을 삼키는 일을 연습한다. 그러니 5번의 말은 그 연습에 힘을 실어주는 조언같기도 하다. 그날 밤 5번에게 정말 하고 싶었던 말들을 여기 남긴다.


너희에게 몰입한 시절이 나의 빈 곳을 채웠었지. 조금 더 사랑받아도 되겠다는 감각을 마구 느낄 수 있었다. 개구지고 따뜻한 말, 너희가 참 잘 하던 그런 말들을 들으면 좀 엉망인 채 살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러니 너희는 참 환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지. 제멋대로에 서툴기는 해도 말이다. 어디에서든 무사히 지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