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 나는 일기를 쓸 때에 독자를 상정하고 쓴다. 먼지 쌓인 일기장을 살펴볼 미래의 내가 아닌, 언젠가 나라는 존재를 읽어줄 누군가를 떠올리며 쓴다. 보통은 사랑하는 사람을 그 자리에 앉히곤 한다. 그러나 그를 전면적으로 의식하면서 쓰는 것은 아니다. 그저 왠지 모르게 아주 조금이나마 정제해서, 날것 그대로의 나를 투영시키지는 않으려 한다. 그러면 너무 원색적인 단어들이 자리할지도 모른다. 그런 단어들의 나를 드러내는 건 부끄럽다.
- 같은 무게를 가진 문장도 입에서 나오는 것과 종이에 전혀 글씨로 표현되는 바가 다른 것 같다. 어느 쪽이 강렬한지에 대해서는 확답을 내릴 수가 없다. 격정적인 얼굴과 격앙된 톤에서 나오는 "씨발"과 넓은 공백을 끼고 잔잔하게 스며드는 "사랑해"같은 글자들은 때에 따라 엎치락 뒷치락하곤 한다. 그래서 일기장에 무언가를 남길 때는 예쁘게 글씨를 새기려 노력한다. 괜스레 휘갈겨 쓰지 않고 괜스레 신중히 손가락에 힘을 준다.
편지
- 내가 쓰는 것은 일기가 아닌 일종의 편지 같다. 숨기지 않고 쓴다는 것은 읽힘을 기정사실화하고 쓰는 것이고 읽히기 위함은 독자를 염두에 두는 일이다. 불특정 다수가 읽는다면 모두의 취향에 어느 정도 걸쳐있기를 바랄 것이고, 사랑하는 사람이 읽는다면 글에 사랑을 묻히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내가 읽길 바라는 편지를 쓴다. 나를 위한 메모를 적고 나를 위한 관찰을 기록한다.
- 숨 쉬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지는 일상의 파편들을 다만 몇 초라도 시간을 내어 끄적인다. 뭔가 엄청난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조각들을 모아 하나의 기억이 되는 순간이 즐겁다. 펜을 쥐고 표지가 마음에 드는 공책을 펼쳐서 오밀조밀 글씨를 적는 것이 즐겁다. 나만 아는 펜의 나만 아는 펜촉과 나만 아는 순간의 나만 아는 기분을 녹여낸다. 그러다 보면 아무렇지 않던 순간도 특별한 순간이 되는 것만 같다. 사실 모든 순간이 특별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