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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준 David Kim Nov 23. 2023

[도성한담] 애도의 날

'추수감사절'에 겪는 인디언의 슬픈 역사

유럽의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이태리, 프랑스, 영국 등에서 백인들이 미주 신대륙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토착원주민(indigenous people)들이 살고 있었고, 우리는 이들을 인디언 (Indian)이라고 부르거나 아메리칸 인디언(american indian) 또는 네이티브 인디언(native indian)이라고도 부릅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바른 표현으로는 American Indian 또는 Indigenous  American이라는 용어가 바람직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의 연방정부가 인정하는 토착원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미국정부와 법적, 정치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데 그래야 'American Indian'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고 '독립정부'도 꾸려나갈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연방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원주민들은 Native Indian이라는 호칭을 갖게 되는 것이죠.  다만 Alaska(알래스카)에 거주하며 연방정부로부터 인정받는 231개 원주민부족들의 총칭은 Alaskan Native라 불러도 무방합니다.  한 가지 이들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들 명칭은 그들을 식민지배한 백인들이 붙여준 이름일 뿐 그들을 대변하는 이름이 아니라며 자기 자신들 부족명 (예로 아파치, 나바호등)을 불러주던가 아니면 Indigenous American이라 부르기를 희망합니다.  


얼마 전 중국의 한 동굴에서 발견된 사람의 두개골을 분석해 본 결과 유전적으로 아메리칸 원주민으로 이어진 동아시안과 연결되었다고 하니 이들과 우리가 끈끈한 관계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유럽과 인도 사이에 미대륙이 있다는 사실과 태평양이라는 커다란 해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아시아대륙의 중국과 인도로 향했던 유럽의 뱃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 미대륙에 도착해서는 아시아 또는 인도에 도착한 것으로 착각했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토착원주민을 어떻게 대했는지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수련]  선생님, 유럽인들이 미주 신대륙에 도착한 것이 언제지요?

[해월]  유럽인들이 미주대륙에 최초로 모습을 보인 것은 1020년경 북유럽의 Vikings (바이킹)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북동부 캐나다와 뉴잉글랜드(미국 북동부) 쪽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어.  이들은 식민지를 얻고자 했던 서유럽 국가들과는 전혀 다른 목적으로 도착했었지.  대구라는 생선을 주로 잡아서 생계수단을 이어나가던 바이킹들이 지금의 매사추세츠주 부근까지 와서 일대에 흔하던 대구를 잡던 곳을 Cape Cod라 이름 지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미주대륙의 식민지화는 그로부터 470년 여가 지난 후 이태리인 탐험가 Christopher Columbus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가까스로 스페인왕의 승인과 지원을 받아 금과 향료(Insence) 그리고 향신료(spice) 교역으로 부자가 될 꿈을 꾸면서 1492년 8월 스페인을 떠나 그 해 10월 12일 카리브해의 섬 Bahamas (바하마)에 도착한 때로 시작하지.  


[수련]  콜럼버스가 중미 카리브해에 위치한 바하마 섬으로 들어간 이유가 있나요?  

[해월]  당시 유럽에서 고급품으로 취급되던 이들 물품들의 교역은 알다시피 기원전부터 개통되었던 실크로드라 불리는 중국과의 육로와 아라비아반도를 관통하는 중동지역의 해로를 통해 인도양에 위치한 인디아와 연결되는 통상이 이루어지고 있었잖아.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 지역에 이런저런 나라가 생기고 전쟁도 발생하면서 교역에 방해를 받기 시작하던 와중에 선박건조기술이 늘어나 항해가 수월해지면서 콜럼버스 때에 와서 새로운 해양교역로를 개척하려고 했던 것 같아.  콜럼버스 보다 몇 년 뒤에 교역대를 이끌고 대서양의 남쪽을 향해 아프리카 최남단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거쳐 인디아로 건너갔던 포르투갈의 탐험가 Vasco da Gama(바스코 다 가마)는 유럽 최초로 해양길을 통해 목적지 인디아에 도착했었지.  그러나 콜럼버스는 항로를 남쪽으로 잡지 않고 서쪽으로 잡았기 때문에 뜻하지 않게 중미에 도착했던 거야.      


[수련]  콜럼버스가 방문했을 때 그곳 원주민들은 백인을 보고 놀랬겠지요?  

[해월]  놀래기는 양쪽 다겠지!  원주민들은 처음 보는 백인에 놀랐겠고, 유럽선원들은 처음 만난 원주민들이 인도인을 포함한 아시아인과 달라서 놀랬겠지.  바하마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바쁘게 인근에 있는 Cuba (쿠바)나 Hispaniola (히스파뇰라)등을 거쳐 지금의 Haiti (헤이티)등에 까지 상륙했으니까 많은 원주민들을 만났을 거야.  콜럼버스가 신대륙 중미에 도착한 당시에 미주대륙에는 약 1천만 명의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후 세 번 더 항해를 한 콜럼버스는 당연히 카리브해 연안 섬들과 중미 그리고 남미땅을 밟으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면서 무엇으로 부를 챙길지 골몰했겠지.


[수련]  미주대륙에 살던 원주민들과 처음 유럽인들과의 관계가 어땠을까요?

[해월]  아무래도 처음 대면한 사람들끼리 편할 리가 없었겠지.  말도 안 통하고 생활방식도 전혀 달랐을 테니까.  특히 유럽인들이 도착하면서 무력으로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들이 알게 모르게 가지고 온 홍역, 천연두 등 병균으로 인해 최소한 25%에 해당하는 원주민들이 병으로 사망했다고 하니 관계가 좋았을 리가 없었을 거야.  

더군다나 콜럼버스가 헤이티에 스페인 식민지정부를 세우고 초대 총독이 되면서 폭정을 펼치는 바람에 호감은 빵점이었다고 해.  월등한 화력의 무기를 앞세워 수많은 원주민들을 노예로 삼아 유럽으로 실어 나르고 노동착취를 했으니 좋아할 사람이 있겠어?  이들 원주민들을 "indios" (Indian)라고 이름 지어 부른 것도 콜럼버스가 처음이야.  


[수련]  콜럼버스는 북미대륙을 방문한 적이 없다면서요?

[해월]  없지!  보통 신대륙발견자를 콜럼버스라고들 하는데, 이는 미국 등 북미에 발을 들여 논 사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미국으로 이주한 이태리인들이 자국민 긍지를 살리는 차원에서 마치 그가 미국을 발견한 것처럼 내세우며 홍보하다가 발전된 얘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들 이태리인들은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를 미국의 국경일로 만들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수십 년 동안 미의회와 정계에 로비를 전개했어.  끝내 성공했잖아!  대단한 민족이야!


[수련]  유럽인들이 미국에 등장하는 과정에서 북미원주민과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해월]  15~16세기 당시에 북미에만 600여 원주민부족이 살고 있었다고 하니 도착한 장소에 따라 만나는 사람들이 달랐을 거야.  어떤 경우는 서로 편하게 만났을 수도 있었겠고, 어떤 경우는 처음부터 무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르지.    


[수련]  미국 최초 추수감사절 모임에 인디언들이 함께 참석해서 당시 이주민들의 외로움도 달래주고 생활에 도움을 주면서 음식도 나눠 먹었다면서요? 

[해월]  그랬지!  미국에 도착한 유럽인들이 신에게 감사의 축제를 벌인 것은 사실 Florida에서 처음 시작한 것으로 보여.  신부이자 역사가인 Michael Gannon에 따르면 후로리다주에 정착한 스페인인과 프랑스인들이 주로 교회에서 추수감사행사를 치렀는데 1565년 9월 8일 St. Augustine 시에서 가진 추수감사모임이 가장 빠른 축제였지.  그 후 지금의 버지니아주에 도착한 영국인들이 처음으로 추수감사모임을 가진 것이 1607년이었고, Jamestown에 도착해 정착한 영국인들이 1610년에 추수감사축제를 가지면서 그 후 지속적인 감사절을 갖고 있어.  

그러나 기록에 가장 의미 있는 Thanksgiving 축제를 가진 것은 1620년에 미 북부 메사추세츠주 Plymouth (프리머스)에 자리 잡은 Pilgrims (필그림)들이었지.  영국에서 Mayflower호에 몸을 실은 102명의 필그림들이 1620년 11월 프리머스에 도착했지만 그해 겨울 혹독한 추위를 이기기 못하고 50여 명만 살아남았었어.  이들을 처음 만난 원주민인 Wampanoag (웜파노애그) 부족 인디언들이 불쌍한 이들을 위해 음식도 제공해 주고 밭농사 짓는 법도 가르쳐 주며 이웃노릇을 톡톡히 하면서 친해지기 시작했지.  특히 이들 웜파노애그 부족의 추장직인 Massasoit(마사소이트)를 맡고 있던 오사메퀸(Ousamequin 1581-1661)은  그다음 해인 1621년 여름 이 필그림 영국인들과 보호조약을 맺고 다른 부족의 공격으로부터 보호도 해주고 식량도 공급해 주면서 극진히 돌봐주었어.  후에 필그림들도 다른 원주민들의 공격으로부터 웜파노애그족을 보호주기도 했지.  

그런 가운데 가을이 되어 필그림들이 추수가 이뤄지자 영국에서 했던 것처럼 신께 생존에 대한 감사와 음식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모임을 가졌는데 이때 자기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이웃 원주민 90여 명과 같이 모여 3일간의 축제를 함께 가짐으로써 미국역사에 한 획을 그었어.  그런데 요즘 추수감사절 음식의 대명사인 터키(칠면조)가 그때 그 상에 올려졌었는지는 확실치 않아~~

  


[수련]  그랬군요!  그렇게 서로 돕고 배려하며 살았으면 좋았겠는데, 영화에서 보면 미국 군인들하고 인디언들하고 싸움만 하던데요?

[해월]  그렇지?!  흥행을 위한 영화사들의 상술이니 어쩌겠니.  사실 처음 유럽인들이 북미에 도착하고 나서 식민지를 형성한 뒤, 정작 미국(U.S.A)이라는 나라가 건립된 것은 150년 이상이 지난 후잖아!  그 오랜 세월 동안 갖가지 일이 있었겠지.  그리고 미국이 건립된 후로도 조약을 맺어 사이좋게 지내는 지역도 있었을 테고, 이해득실에 따라서는 전투를 벌인 곳도 많이 있었겠지만.  


[수련]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미국은 원주민과 이해상충이 많았을까요?

[해월]  제국주의 영국으로부터 독립해서 정부를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들도 영국왕에게 충성했던 제국주의, 식민주의자였음에는 틀림없지.  그럼에도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 (1789-1797)의 인디언 정책은 인디언부족을 ‘국가’ (Nation)로 대우하여 국가 간 조약을 맺고 주권과 문명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정책이었지.  뒤를 이었던 제3대 Thomas Jefferson (토마스 제퍼슨 1801-1809) 대통령도 유사한 정책을 펴 나갔어.  한동안 그들 부족들이 대대로 살아오던 미시시피강 동쪽에 계속 살면서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농경사회를 유지하도록 권장하기도 했어.


[수련]   그렇다면 아메리칸 인디언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을 제도로 만들어 살 수 있었을 것 같은데 많은 전투를 한 것을 보면 그렇지 못했나 봐요?

[해월]   처음에는 그런대로 협력체제를 유지하는 듯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가 온 거지!  흑인노예를 거느리며 백인위주 사회를 이루었던 미국 남부, 특히 죠지아 주의 부농들은 땅이 더 필요했고, 연방정부에 압력을 넣어 인디언들이 정착해 사는 비옥한 땅을 빼앗기 위한 공작을 펴기 시작했어.  이에 정치기반 강화를 원했던 당시 7대 대통령 엔드류 잭슨 (Andrew Jackson 1829-1837)은 그들에 호응하면서 1829년 국정연설에서 ‘인디언 이주(移住)를 지지하는 법’ 제정을 밝히기에 이르렀어.


[수련]  ‘인디언 이주법’을 만들면 인디언을 내쫓고 살던 땅을 빼앗겠다는 것인가요?

[해월]  수련이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데 명목상으론 “미국이라는 연방공화국 안에 주권을 가진 별도의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연방헌법에 위배되며, 연방정부는 이들 원주민들이 자치를 원한다면 연방정부가 소유한 다른 땅으로 이주하는 조건으로 자치를 허용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이론적, 법적 배경이었어.  물론 진짜 원했던 것은 인디언들이 대대로 점유하고 있는 남동쪽의 비옥한 땅이었고, 항상 눈엣가시였던 그들을 불모의 지역으로 몰아내는 것이었다고 사람들은 말하지.  

결국 이 이주정책은 자발적이 아닌 강제로 진행되었는데,  잭슨 대통령은 “그의 이주법 (Indian Removal Act)이 인디언들을 축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말살에서 구하는 은혜를 베푸는 길”이라고 역설했다는 거야.  1814년 육군 소장이었던 잭슨 대통령은 지금의 앨라배마(Alabama) 주에 살고 있던 Creek인디언들과 전투를 벌여 무력화시킨 뒤 끝내 그들이 살고 있던 2,000만 에이커에 달하는 땅을 후에 몰수했던 경력이 있지.  말이 이주지 영어에서 보듯 ‘Removal’, 즉 추방하는 것이잖아?  드디어 미국이라는 신생국을 세운 백인들이 토착원주민들이 15,000 년 전부터 대대로 살아온 땅을 몰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수련]  그 역설적인 이주법에는 어떤 내용이 있었어요? 

[해월]  1830년 미의회를 통과하고 잭슨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법적 효력을 발효한 ‘인디언 이주법’은 간단히 대통령에게 명목적으로 인디언들과 협약을 맺어 일정한 돈과 대체지를 주어 비옥한 땅을 포기하고 서부의 불모지로 추방할 수 있게 하는 권한을 부여한 것이야.  대통령이 되기 이전부터 추진해 오던 것이지.


[수련]  그 법에 의해 이주해야 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어요?

[해월]  미시시피 강은 미네소타주 북쪽에 있는 Lake Itasca (이타스카 호수)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2,552 마일을 흘러 Gulf of Mexico (멕시코 만)로 흘러 들어가는 세계에서 4번째로 긴 강이야.  그 오른쪽에 위치한 남동부 땅에서 살던 인디언들은 Cherokee(체로키), Muscogee (머스코기.  Creek 크릭이라고도 함), Seminole (세미뇰), Chickasaw (치카소), Choctaw (촉타)라는 5대 문명부족들이었고, 여기에는 남부농장에서 도망쳐 나온 흑인노예들도 섞여 살고 있었어.  이들 부족들이 주 대상이었지.


[수련]  인디언 이주법이 시행되면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나요?

[해월]  우선 1831년 맺은 ‘Treaty of Dancing Rabbit Creek’으로 Choctaw부족이 처음으로 이주를 시작했어. 곧이어 이주에 항거하여 두 번이나 전쟁을 치렀던 Seminoles 부족도 1832년엔 이주를 시작했지. 1834년엔 Creek 부족이, 1837년엔 Chickasaw 부족이 강제이주를 시작했어.  잭슨 대통령은 체코키부족을 몰아내려는 조지아주법이 위헌이라는 연방대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1835년 ‘Treaty of New Echota’를 맺어 Cherokee의 이주를 마저 강행했어. 


[수련]  강행된 이주정책으로 인디언들의 피해가 컸겠네요!

[해월]  강제이주란 곧 죽음을 뜻하는 거였지.  1837년에 이르러 강제이주 당한 인디언의 수가 수십만 명에 달하고 대대로 살아오던 2,500만 에이커 (약 300억 평)에 달하는 땅을 유럽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내주고 만 거야.  추위와 굶주림, 맨발로 산과 강을 건너는 이동 중에 사망한 수만 명 인디언들의 시체가 쌓이면서 ‘눈물과 죽음의 피난길’ (Trail of Tears)이라는 애처로운 이름의 역사가 생겼어. 미국 서쪽의 사막에 연방정부에서 대체해 준 척박하고 낯선 땅으로 이주한 인디언들의 삶이 어떠했을까는 상상이 어렵지 않을 거야.    


[수련]  인디언들은 잭슨 대통령이 미웠겠네요? 

[해월]  인디언들은 잭슨 대통령을 ‘Sharp Knife’ (날 선 비수)라고 불렀데.  유복자로 태어나 14살에 어머니까지 여읜 잭슨은 자수성가형으로 20살에 변호사자격을 땄고 하원의원과 상원의원, 테네시주 대법원판사, 사업가, 목화농장주인, 300명 노예소유자, 민병대 소장, 지원군 소장, 미육군 소장 그리고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Jacksonian Democracy’라는 정치철학을 창조해 낸 입지전적 인물이지.  현재 20달러 미국지폐에 초상이 들어있는 장본인인데, 요즘은 다른 사람으로 바꾸자고 떠들썩하잖아.


[수련]  인디언들의 참혹한 현실이 그것으로 끝났나요?  

[해월]  웬걸! 살던 땅을 빼앗기고 낯선 ’Indian Reservation’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슬픔을 삼키고 살던 그들은 1956년 또다시 미국정부의 ‘Indian Relocation Act’ (인디언 재배치법)를 통해 살던 터전을 떠나 낯선 도시로 이주를 강요당하게 되었지.


[수련]  그들이 도움을 주었던 백인들의 배은망덕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네요!

[해월]  미국정부의 인디언정책에 대해서는 많은 공부가 필요할 거야.  당시 미국정부가 인디언부족끼리의 연대를 사전에 봉쇄하고 인디언보호구역에 거주하는 인디언들에 제공하는 지원금을 줄이기 위한 정책의 일환으로 인디언보호구역애 살고 있는 인디언들을 그곳에서 나오게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인디언보호구역을 나와 미국정부가 지정하는 도시로 이전하는 사람에게는 이주비용, 건강보험, 식품 및 의류구입비, 가구구입비, 직업교육비, 심지어 주택구입비 등을 제공해 백인과 어울려사는 수준의 삶을 살게 하겠다고 말했지.  그러나 이 같은 허황된 약속을 믿고 낯선 땅으로 이주한 많은 인디언들은 결국 정부의 약속불이행으로 백인처럼 살기는커녕 가난과 병에 찌든 삶을 영위하며 살아가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들이 어렵고 심각한 문제로 얼룩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지.


[수련]  선생님!  글 제목에 '애도의 날'이라고 올리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해월]  이 글 맨 위에 1620년 메사추세츠주 프리머스항에 도착한 필그림의 배 Mayflower (메이훌라워)호를 반갑게 맞아주었던 웜파노애그 부족 추장 Massasoit (매싸소잇)의 동상 뒷모습이 있지.  이 땅에 나중에 도착한 백인들을 도와주었던 그들.  

백인과 함께 추수감사제를 지냈던 Wampanoag 인디언 후손들이 1970년에 모여 그 즐거웠던 추억의 “추수감사절”을 300년 세월을 지내면서 피눈물 흘리며 사라져 갈 수밖에 없었던 선조들을 기리는 ‘National Day of Mourning’ (전국애도의 날)로 선포했어.  수백만 인디언들을 살해하고 삶의 터전을 빼앗은 백인 이주민들이 매년 떠들썩 지내는 바로 그날이 그들에게는 엄청난 비애가 느껴지는 날이기 때문이겠지.  그 후 매년 같은 날 원주민들의 한 맺힌 원성을 미국정부를 향해 토해내고 있지.   “조상 대대로 살아온 우리의 땅을 돌려다오!” 라며.


'매싸소잇 추장.'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민의 땅에 살면서 때로는 뜻하지 않은 심적 어려움을 겪는 이민자의 한 사람으로 동병상련의 애처로움을 느끼며 슬퍼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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