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께(厚)

by 리로

이 시대의 두께는 표면을 그 모습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기에 방향을 갖는다. 안과 겉, 혹은 이쪽이든 저쪽이다. 두께가 방향을 가졌다는 것은 '존재한다'라기 보다는 '사용되었다'는 의미이다. 두께는 이제 차용(借用)되는 운명의 공간 언어인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물질 그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인간의 눈에 비치는 면(面), 상품이 필요할 뿐이다.


두께가 상품으로 전락한 것은 비단 돈 때문만은 아니다. 무게와도 연관이 되어 있다. 파르메니데스가 제기하고 쿤데라가 직시한 그 무게라는 것. 효용과 능률이 가히 세상을 지배하는 곳에서의 무게란, 제거해야 할 지방처럼 여겨진다. 사람들은 중량을 제거해서 가볍게 만들고 싶어 하고, 쉽게 움직이도록 만들고 싶어 한다. 자리를 잡고 고집스레 눌러앉아있기를 거부하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을 선호한다. 어쩌면 두께는 이 땅을 벗어나 하늘도 유영할 것이다.


장인의 손길을 거친 망치와 정에 의해 정성스레 쪼이고 다듬어져서 견고하게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 기둥의 그 내밀함은, 단지 엔타블레이쳐를 떠받드는 기능만을 수행하지 않는다. 그것은 기능 이외에도 그 자체의 미학, 밀도와 함양을 나타낸다. 그것은 자신의 실체를 갖는다. 구조 그 자체가, 무엇하나 다른 것에 기대지 않은 양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 그리하여 자신의 기능이라는 것이, 단지 중력에 붙들린 종속의 사명 뿐만이 아니라 땅 위에 수직으로 세워져서 지상을 향해 공간을 가로지르고 예찬하는 것. 기능 자체가 하나의 미학으로 남은 것. 두께의 태초는 하나의 '합일'과도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두께는 더 이상 그러한 합일의 밀도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밀도가 없다면 땅에 가라앉을 수도, 뜰 수도 없다. 그것은 하염없이 부유하며 떠돌아다닐 뿐이다. 이제 두께는 그 내부가 비어있다 못해 이리저리 접히고 구멍이 나기까지 한다. 결국 두께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피부를 빼앗긴다. 점점 부박(浮薄)해져 가는 표면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내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피부를 읽어버린 두께는, 경제적 욕망과 효용 논리에 의해서 끊임없는 표면을 생산하는 얇은 판재(板材)로 계속 잘려나갈 뿐이다. 이제는 면적에서 높이를 곱하면 건축적 부피가 되지 않는다. 현 시대는 이제 부피에서 높이를 내 놓으라고까지 하고 있다. 두께는 그 모든 무한의 밀도, 그 두터움을 여러 겹의 얇은 표면에게 내어주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돌에서 시작된 이 두께의 역사는 지금 현 시대와 사람들의 공간, 그리고 그 건축문화를 대변한다. 수 천년의 세월을 감내한 물질이 품어내는 인고의 그 자체적 물성(物性)은, 시각화된 것 혹은 표면으로 만져지는 느낌이 주는 상업논리에 의해서 점점 퇴색해간다. 시대는 더더욱 매끈하고 눈부신 표면을 요구할 것이고, 그 칼날처럼 얇은 표면이라는 것은, 들어감과 나옴, 높음과 낮음, 가벼움과 무거움과 같은 입체적인 질서를 흉내내기 위해 몸부림 칠 것이다.


시대는 변하고 인간은 쫓아간다. 공간과 건축의 단어도 점점 변화하는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끊임없는 바람 속에서도 나무는 항상 그 자리에 서 있기를 원한다. 결국 인간의 문제인 것이다. 적어도 보이는 것 너머를 보고 싶어 하는 시대가 다시 올 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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