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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K 이태곤 Jul 28. 2023

불타는 조종사 연대기

1화. 여고생 파일럿


1화. 2008년 6월- 여고생 파일럿

아침 6시 30분 집사람과 딸은 아직 꿈나라다. '먹고 산다는 게 뭔지 일어나야 한다.' 이 생각을 하다가 문득 '먹고 산다'는 말이 지금 나에게는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 보았다. 이 말은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에게는 현실이었고 적잖이 신파적 양념이 가득한 말이다.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일이 허다했던 그 세대, 나의 부모세대의 이야기는 내 시대에는 비판의식 없이 반복되어 쓰였다. 적어도 나에게 '먹고산다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먹고 원하는 것을 입고 원하는 대로 산다는 의미로 변화했다. 특별한 자의식이 없는 한 자식이 생기면 그 ‘먹고살기’의  신파적 한풀이를 되풀이하면서 개미처럼 그저 열심히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다. 그것은 국가에서 보았을 때 정말 감사하고 아름다운 노동계층의 자세였다. 나 또한 '이렇게라도' 먹고사는 것에 감사하자'는 어르신들의 미소와 나라의 바람을 가슴속에 품고 일터로 향하며 산지 조금 되었다.


결코 지금은 큰 부자가 되기 힘들다는 우리 세대의 운명을 자각할 때, 뉴스는 통계를 인용해 앞으로 '더 가난해질 것이다.'라고 우리에게 수줍은 듯 고백을 해주고 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불안한 현재를 위로해 줄 소소한 일상의 재미거리를 찾아 나서야만 한다는 의무감으로 조금 벌어도 많이 재미있게 쓰자고 다짐한다. 2주 전에 산 새 차로 가는 첫 출근길이다, 새 차, 새 기계에는 내가 아직 의미를 모르는 버튼이 많다 이것들은 늘 흥분시킨다. 몇 주 후면 저 무의미하게 보이는 버튼들을 운전하며 아무렇지 않게 다룰 테고, 그때가 되면 이 차와 나는 한 몸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다. 한때 뮤지션을 하겠다고 긴 머리 휘날리며 만졌던 64 채널의 믹싱 콘솔도 그러했고, 그 음향 이펙터들의 두 페이지나 되는 사운드 알고리즘도 그랬다. 사람이 기계를 설계하지만, 기계에 익숙해지기 위해 훈련하고 기계를 이해해야 하는 운명도 사람의 것이다. 두 가지의 긍정적인 합이 없으면, 인간도 토라지고 기계도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조종이 딱 그렇다.

    새 차로 가는 출근길, 처음 보는 굉장한 교통체증이 시작되었다. 새 차라고는 하지만 아직은 하늘로 솟아올라 날아가는 옵션은 없는 듯했다.  주도로인 이곳이 이렇게 막히면, 나도 학생도 다 지각이란 소리다. 줄어들 것 같지 않게 늘어선 차들과 도로를 비집고 헉헉 거리고 도착할 때 즈음에는 날이 밝아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끈 채 주차구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2분 전이다. 오늘 영어강의에는 세 명의 학생들이 정각에 도착해 있었다. 평소의 절반 밖에 도착하지 않은 학생들 15분이 지나면 결석 처리가 되기에 이 정도면 올 사람은 다 교실에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처럼 인원이 많지 않을 경우에는 일반 강의보다는 더 효과적인 Free talking을 하는 게 좋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떠들다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주제를 정하고 이야기할 소재에 대해 간략하게 문장 준비를 하고 예상 질문과 대답도 적어보아야 한다. 주제는 ‘200억 로또에 당첨된다면?’으로 정했다. 경제적인 압박이 우리를 가난하고 병들게 하고 자유를 빼앗아 간다고 믿고 있지만 정말 그럴까? 착한 어른 신드롬, 착한 노동자가 되기 위해 스스로 포기한 건 아닐까?  이 주제는 상상에서나마 그들의 경제적 압박을 모두 해제시켜 주었다. 졸린 눈을 하고 커피를 마시던 학생들 눈에서 빛이 난다. 대부분이 지금 직장을 관두고 자신의 꿈을 펼친다며 자신의 꿈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하긴 그렇다 몇 명이나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이 짧은 삶을 살고 있나? 수업 시간이 너무도 빨리 지나간다.

     강의 중반이 지났다. 두꺼운 안경을 쓴 우성 씨가 본인의 꿈을 파일럿이라고 수줍게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와 당장 어깨동무를 하고 싶었다.  15년 전 고등학교 시절 안경 쓴 파일럿은 없다는 설명을 하며 나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던 공사생도 선배의 간결하고 잔인했던 진로상담 시간, 그 이후에는 잠결에서도 꺼내지 않았던 나의 파일럿 꿈이 가슴에 아려왔다. 기훈이 와의 아파트 2층 낙하사건 이후 사람이 하늘을 날 수 없다면 하늘을 나는 다른 것에 올라타면 되는 것이고, 닐스의 모험처럼 거위에 올라타지 못한다면 비행기에 타야 한다는 매우 단순하고 직관적인 어린 시절 꿈이었다. 여기에 왠지 어른들의 조종사 이야기에는 항상 전투기가 등장했고 그것들은 앞뒤로 불을 뿜어야 했지만 난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날면서 불까지 뿜어댈 수 있으면 지구최강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만화영화에서는 비행기가 미사일을 4발 정도만 쏠 수 있다고 한정하지 않았고, 적을 섬멸할 때까지 무한대로 나가는 레이저빔이 있었다. 날아다니며 세상을 구하는 천하무적의 구세주였다. 차분한 목소리로 우성 씨는 말을 이어나간다. 올 하반기에 퇴사하고 미국의 UCLA에 박사과정을 하러 가는데 그곳에서 파일럿 면허를 딸 거란다.  박사들 정도의 식견이 있어야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분단현실은 공군의 영공 독점으로 이어졌고, 민간 항공에 대한 통제로 민항훈련과 산업의 씨가 뿌려지지도 않고 말라버렸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이제 퍼즐이 풀린다. 왜 비행기는 군인만 조종해야 하고 앞뒤로 불을 뿜어대야 했는지. 우리나라가 아닌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동네 슈퍼 아저씨부터, 고등학교 여학생까지 비행기를 몰고 다닌다는 초현실적인 발언. 아! 그제야 생각나는 그 인디펜던스데이! 미국영화, 동네 주정뱅이 아저씨가 자기 비행기 몰고 외계인 우주선에 자살골을 감행해 지구를 구하던 그 장면, 그 파일럿이 세상에 많이 있었구나 싶다. 우리가 생각하는 조종사는 대개 두 가지다. 전투기 조종사, 아니면 민항기 조종사. 하지만 분명 이들을 가르쳐야 하는 교관 조종사들도 있을 것이고, 비행기를 개발하는 단계에는 테스트 파일럿도 필요할 것이다. 거대한 농지에 농약을 뿌리는 농비행기 조종사도 있을 것이고, VIP들이 타고 다니는 자가용 비행기, 연습용 경항공기까지 날아다니게 생긴 거의 모든 것들에게는 조종사가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진실이 밝혀졌지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조급함이 덮쳐 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디펜던스 데이에 나왔던 세상을 구하는 주정뱅이 아저씨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결말이 아니라, 밭 가는 트랙터 몰 듯 비행기 몰고 다니는 그 현실과 끝이 보이지 않게 펼쳐진 평원들이 부러웠다. 9:30 분집에 들어오니 집사람과 한 살배기 딸애가 아직도 그로기 상태다 황사덕택에 바깥에 못 나가고 집에 있는지 이틀째, 유난히 햇살을 좋아하던 집사람에게 황사가 내 책임인양 미안하다. 거실을 쓸고 닦고 하는 중 옆에 있는 내 집사람을 쳐다본다. 내 집사람은 햇살 가득한 뉴질랜드에서 온 처자이다. 인디펜던스데이의 영화 주인공들과 묘하게 오버랩된다.


  ”여보 당신 고향에 그런 윙윙거리는 비행기 몰거나 가르치는 학교가 있어?”  졸린 눈을 한 아내에게 물었다.


아내는 자기네 동네에도 그런 비행학교가 몇 개 있단다. 몇 개씩이나? 동네에도? 그리고 이어서 하는 말이 처남이 항공기 엔지니어로 공군에서 12년간 복무하고 지금은 한 업체의 팀장으로 있단다. 난 처남이 엔지니어라고 해서 그냥 공장만 상상했더란다. 이건 결국엔 등잔 밑이 어두웠다는 이야기다.


자 이제 이륙준비를 해보자, 잘 먹고 잘 살기는 어차피 틀렸고 , 재미있게는 살아보자!



2008년 뉴질랜드 - 해밀턴, 처남이 일하는 항공기 정비 행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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