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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Mar 05. 2024

아들, 엄마는 왜 이혼을 못할까...

오래된 노트에서 나온 아들의 우문현답


  나는 아직도 책을 읽을 때도 노트북을 이용할 때도 옆에 늘 필기도구가 있어야 한다. 필기도구가 없으면 불안하다. 전형적인 아날로그형 인간이다. 보험설계사인 언니가 준 2024년 다이얼리가 벌써 몇 장 남지 않았다. 이면지 활용도 잘하는 편이라 빈 노트가 없을까 싶어 책장을 뒤졌다. '대한민국 약대 입시 넘버 원!'이라는 파란색 노트를 발견했다. 아마도 학교 앞에서 뿌린 학원 광고용 노트를 아들이 받아 온 것인가 보았다. 휘리릭 넘겨 보았다. 워낙 정리정돈에는 젬병이라 노트 속도 중구난방 엉망진창이다. 일기도 있고 필사도 있고 습작 같은 거도 있고 낙서도 있다.


  '붉은 닻 - 한 강,  2020, 9, 26, 19:24'

  첫 장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빼곡하게 13장을 필사했다.


  이어진 필사는   '10. 17. 12:47 아이를 찾습니다 - 김영하' 6장의 필사가 있다. '아이는 농구화를 으며 집으로 들어섰다. 꽤 큼직한 여행가방이 딸려 들어왔다. 윤석은 경찰관이 들이미는 서류를 읽지도 않고 사인했다. ' 로 끝난 걸 보니 이 소설의 필사는 끝내지 못한 것 같다.


  '꿈'이라는 제목 하에


  '불현듯 그녀는 지난밤의 꿈이 생각났다. 장소는... 어디였더라... 그는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그를 알아보았다. 마르고 큰 키, 얄상한 얼굴, 검은 뿔테 안경... 그리고 늘 거뭇하던 그의 턱... 그녀는 그를 알아보았는데 그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사람들 속에 섞여 다른 곳을 보고 있다. 그녀는 애가 탔다. 여기요... 여기를 봐주세요... 저예요...

..... 어느 순간 그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웃으며 다가온다. 웃는 얼굴... 웃으며 다가오는 그의 얼굴... 꿈속의 그녀는 가슴이 설레어... 너무 설레어... 잠깐 눈을 감았다 떴다. 어느새 그가 그녀 바로 옆에 와서 서 있다. 그런데 그가 아니다. 키도 작아졌고 안경도 없어졌고, 모르는 얼굴이다. 어머... 왜 이렇게 작아졌어요? 꿈속의 그녀가 당황해서 물었다. ㅇㅇㅇ 아니세요? 그가, 누군지 모르겠는, 키가 작아져서 키 작은 그녀와 키가 비슷해진 긴 얼굴의 남자가 웃으며 대답했다. 나야... 내가 맞아... 넌 날 잊었니? 어떻게 나를 잊니... 


  이런 엉터리 낯 뜨거운 습작도 있다.


  이런 날이 있었구나... 필사도 하다 말고 습작도 하다 말고... 그래서 네가 지금 요 모양 꼴인 거야... 또다시 습관 같은 자기 비하가 뒤따른다. 그러나 음울한 자기 비하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지는 자기 비하다.  자조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과거란  어두워도 미소가 지어지는가 싶다.


  이어지는 에 휘갈겨 쓴 것은 일기 같았다. 아들과 식탁에서 대화한 내용이었다. 대화라기보다도 나의 일방적인 독백 같았다. 마지막 아들의 대답이 어이없고도 재미있어서 최대한 원문 그대로 옮겨 본다.


ㅡㅡㅡㅡㅡㅡㅡ


  졸업은? (아마도 아들이 대학교 4학년 때였다보다)

  

  아들 : 한 학기 더 다닐 거야. 유예해 놨어.


  나도 퇴직 유예해 놨어. 너 졸업 유예할 것 같아서. 내년엔 꼭 할 거야 퇴직... 너도 졸업 꼭 해... 취직까지 하면 더 좋고...


...............


  좀 웃기는 얘기 해 줄까? 웃기기보다 어이없는 자아비판이랄까...

 지난 토요일 엄마 혼자 산에 갔다 왔어. 사실은 아빠랑 같이 가려고 했는데... 왜 혼자 갔다 왔는지 알아?


............

 전날 밤에 잠들었다가 잠깐 깨어났을 때 갑자기 생각난 거야.. 그날 10시 병원 예약이... 엄마 3개월에 한 번씩 혈압약 타러 병원에 가잖아... 아침 열 시 예약이니까 갔다 와도 되겠지 싶었어 나 혼자 생각에...

  근데 아침에 내 기분이 좀 안 좋더라고. 이유도 없이.. 걸어서 20분이니까 아침산책 겸 가야지 하고 준비하고 나갔어. 병원 갔다 올게, 하고. 아빠가 병원엘 왜 가냐고 물어... 3개월에 한 번씩 가잖아 혈압 때문에... 그렇게 쏘아붙이고 집을 나갔지... 바람 불고 낙엽 지고... 기분이 자꾸 안 좋아지는 거야... 더구나 혈압도 높게 나왔어. 136 - 93. 3개월 전에 120 - 80 정상 나와서 원장이 관리 잘했다고 칭찬까지 해줬는데... 사실 요즘 몸무게가 좀 늘었거든. 몸무게 느니까 혈압이 바로 오르고... 의사가 약을 좀 늘려야 될 것 같다고 그러길래 관리 잘해보겠다고 늘리지 않겠다고 했지. 의사는 망설이다가 그럼 이번에는 그냥 가 봅시다... 하더라고...

  돌아올 땐 더 기분이 안 좋아졌지... 살도 찌고 혈압도 오르고 바람은 불고 낙엽은 지고...

  집에 들어오니 아빠는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 거야. 티브이 켜놓고 리모콘 들고... 담요까지 덮고서. 피곤해 보여... 전날 밤 술 먹고 늦게 들어왔으니...  뭔가 막 치받쳐 올라와... 아침에 소파에서 그렇게 있는 게 처음도 아닌데... 아빠가 산에 갈 준비를 하고 있길 바랐나 내가? 그럴지도 모르고... 갑자기 감정이 제어가 안 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짜증스럽게 말했지. 산에 가기 싫은가 봐.. 나 혼자 가지 뭐... 하고는 막 쿵쾅거리며 준비를 했어. 배낭을 꺼내고 아웃도어를 막 갈아입고...

  아빠가 부스스 일어나서는 병원 가야 돼서 산에 못 간다 안 했어?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말하길래 내가 병원 가야 된다고만 했거든! 하고 쏘아붙혔어.

그럼 병원 갔다 왔으니 이제 천천히 준비하고 가면 되지... 갑자기 왜 그래? 가까운 산인데 밥 먹고 좀 쉬었다가 가도 되고... 화날수록 낮고 느려지는 아빠 말투 알지? 이마에 내천자 선명하고..


  할 말이 없어지더라고... 그때쯤 되어서야 내가 왜 이러나... 싶어지고... 병원에서 이래이래 가지고 기분이 좀 안 좋아... 그렇게 말하면 될걸...

   와중에 어제 끓여놓은 황태국으로 식탁을 차려놓고 아빠한테 와서 밥 먹으라고, 좀 기가 죽은 목소리로 말했지.  아빠가 강하게 나오면 나 금방 깨갱 하잖아... 아빠가 와서 국을 떠 먹더라... 먹기 싫은데 억지로 떠넣는 듯... 얼굴이 화가 나서 터지기 직전이야... 나는 그냥 조용히 김밥을 쌌어. 묵은지에 어묵 조림에 청양고추 넣어 싸는 너는 맛 없다 하는 간편한 김밥...

   밥을 한 숟갈 다 말고 아빠가 소리를 질러.  생각할수록 화가 났나봐...내가 뭐? 뭘 잘못했는데? 산에 혼자 가! 그러곤 숟가락을 소리 나게  놓고 나가버렸지... 


  어떡해야 하나... 지금이라도 미안하다고 같이 가자고 할까... 그냥 혼자 갔다 올까... 그래 혼자 갔다 오자... 이런 기분으로  둘이 가느니... 피곤하니까 집에서 쉬고 싶을꺼야...

  그래서 김밥 두 줄 싼 거 한 줄은 썰어서 그냥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려놓고 한 줄만 호일에 쌌지... 귤도 서너 개만 싸고...


  갔다 올게... 화난 얼굴로 쏘아보는 아빠에게  겨우 말했지... 완전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아빠가 이번엔 소리를 버럭 질러... 도대체 왜 그러는데? 왜? 뭐가 문젠데?

  그래서 내가 그랬지. 몰라 나도 몰라... 나도 모르겠다고.. 나도 내가 이상해... 정신과 상담 좀 받아 볼까 봐...

  그랬더니  그만해! 하고 아빠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어.  


    아들... 엄마 좀 이상하지 않니? 왜 그럴까? 갱년기라고 너 들어봤어? 갱년기 때문이 아니야... 갱년기여서 좀 심해졌는지도 모르고... 난 좀... 그래... 가끔...


  아들 :  엄마, 엄마는 정신이 이상한 게 아니야.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더 예민한 거야...


  아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 보다 좀 예민할 뿐이라고? 맞아. 그럴지도 몰라... 아니 맞아... 내가 좀 예민해... 어떤 면에서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엄청 무듸고... 나는 왜 이렇게 생겨먹었을까...너는 엄마를 그래도 이해해 주는구나... 아빠도 그렇게 생각할까?


 아들 : 아빠는 좀... 무심하지...


  그렇지?


  아들... 엄마는 아빠와 진짜 안 맞아. 너무너무 안 맞아... 그런데 왜 엄마는 아빠와 이혼을 못할까?


  아들 : 엄마가  왜 이혼 못하는 줄 알아?


  왜?


  아들 :  엄마는 이혼하려면 준비해야 할 서류가 너무 많다고 생각해서 못하는 거야... 엄만 서류, 절차 뭐 이렇게 복잡하고 번거로운 거 엄청 싫어하잖아...


뭐?... 으하하하... 맞다 맞아... 그런 것 같아... 재산분할이다 위자료다 합의다 소송이다...으으으... 거기에 따르는 신경전 감정싸움 이기심  후회 또는 원망 ...그 외 수만가지 날까롭고 예민해진 감정들... 으으으...생각만으로도 골치아파... 난 어쩌면 이혼도 하기 전에 돌아버릴거야... 차라리 좀 참고 그냥 살래... 내가 그래서 이혼을 못하는 거였어... 으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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