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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찌니 Jun 17. 2024

 백수의 일상, 흔들리다

그러나 오늘 하루는 그리 무용하지 않았다

수리산 관모봉에서 내려다 본


아침 6시 즈음 평소와 다름없이 눈이 떠졌다. 아들이 일어나 씻을 시간인데 조용했다. 나는 아들이 일어났다는 기척을 듣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숨소리마저 죽인 채 문에 귀를 갖다 대고 섰다. 거의 10분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다. 평소 같았으면 아무런 주저 없이 나가서 아들을 깨웠을 텐데 그러지를 못했다. 사직서를 제출했으니 얼마나 출근하기 싫을 것인지 겪어본 나는 너무나 잘 알았다. 자신이 원 더 좋은 직장에 취직이 되어 퇴사 하는 것이 아닌 그 어떤 이유의 퇴사도 고약 패배감을 안겨 준다는 것도 나는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패배감을 안고 있을 아들에게 일어나 출근하라고 깨울 수가 없었다.

드디어 문 여닫는 소리와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가만히 주저앉았다. 아들은 평소 출근 시간에서 20여 분 늦게 집을 나섰다. 자연스럽게 평소와 다름없이 보이고 싶어서 나가보았다.

다녀와 아들...

현관에서 긴 구두주걱으로 구두를 신는 아들에게 아주 최대한 심상한 듯 말했다. 갔다올게... 아들은 힘없이 중얼거리듯 말하면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나갔다.

지난주 월요일에 사직서를 제출한 아들은 언제까지 다니면 되냐는 물음에 정확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30분쯤 후에 일어난 남편은 아들의 방문을 열고 한참을 서 있다가 돌아섰다.

출근준비를 하는 남편의 얼굴이 평소와 달리 굳어 있는 건 아들의 일도 일이지만 오늘의 치과 치료 때문이기도 했다. 남편은 한달 가까이 잇몸치료를 받았는데 이제는 신경치료를 하고 잇몸 속의 뼈를 뚫고 어쩌고... 그 다음에 임플란트를 세 개나 해야 하고 어쩌고 하면서 며칠 전부터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아이나 어른이나 치과를 무서워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어른은 특히 부담스러운 비싼 치료비 때문에 더욱 멀리하고 싶은 치과가 아닌가.


아이씨 해야 돼 말아야 돼...



해야 된다고 하면 해야지... 이번에도 재 때 치료를 안해서 한꺼번에 이 고생이잖아... 겁이 많이 나나보네...



내가 놀리듯이 말해도 남편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남편은 특히 큰 돈이 들어가는 이사를 앞두고 있어서 더욱 부담이 되고 신경이 쓰이는 듯 했다. 나는 돈 문제는 그냥 꺼내지 않기로 했다.  퇴사를 하고 돈을 벌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나는 일부러 돈 얘기를 될 수 있으면 회피하고 있다.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건강이 허락하는 한  돈벌이를 멈추지 않는 작금의 현실에서 백수로 사는 나는  돈 앞에서 어쩐지 당당할 수가 없게 되었다.



대신에 이렇게 수다를 떨었다.



나도 오늘 치과 가야 해... 흔들리는 치아 발치하러... 흔들리기만 하고 아프지는 않아서 계속 미뤄 왔는데 더이상 미루면 안될 것 같아...으으으... 정말 싫다 싫어 치과....


남편은 말없이 내가 타 준 홍삼물을 마셨다. 얼굴이 좀처럼 펴지지를 않아서 나는  입에서 나오는 로 수다를 계속했다.



꼭 이렇게 한 군데 한 군데 고장나고 병들고 아프면서 늙어야 하나... 그냥 젊고 건강한 채로 살다가 죽게 만들지... 하나님도 참... 사람을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 원죄때문이라는건데..

그래서 생노병사로 만들어 놓으셨나? 그렇더라도 이쯤에서 그만 용서하고  그냥 생과 사, 로만 만들거나  아니면  생노사. 병드는거 빼고 그냥 살다가 늙어 죽게만  만들어 놓으면 좋을걸... 아니면  진짜 죄를 지은 사람에게만 생노병사하게 하고 우리처럼 평범하고 죄 안짓고 사는 사람들은 그냥 생사, 아니면 생노사하게 해주지...


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한번 피식  웃어줄 만도 한데 끝까지 잔뜩 굳은 얼굴로 집을 나갔다.



아침 8시. 혼자가 된 나는 무슨 큰일이라도 치룬 것처럼 소파에 퍼져 앉았다가 아예 드러누웠다. 어제  여름용 패드로 새팅한 소파는 보송보송하고 보드랍고 시원했다.


나만 이렇게 편해도 되나... 맘이 불편해져서 모로 누워 한껏 웅크렸다.

 아들의 계획대로라면 퇴사 후 적어도 6개월은 학원에서 배워서 수료해야한 한다. 수료한다고 해서 바로 취업이 되리라는 보장도 없으니까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직장에 다니던 예전 취준생 때와는 또 다르다. 셋인 집에서 한 명만 경제 활동을 해도 불안하지 않을 만큼 우리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다. 적어도 둘은 경제활동을 해야 할 것 같아 나는 아들이 취직할 때를 기다려 퇴사를 했다. 이제 아들이 경제활동을 하지 않으면 내가 해야 하는 건가?

더구나 직장이 서울인 남편과 아들의 출퇴근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나마 서울이 가까운 안양 쪽으로 이사를 결정하고 오는 7월 말 이사가 결정되었는데... 은행대출도 받았는데...

모든 계획이, 나의 백수의 일상이 흔들리고 있다. 아직은 미세하지만.


나는 일어나 앉아 핸드폰을 열었다. 유투브 숏폼을 볼 때 짜증날 정도로 끼어들던 쿠팡 광고가 생각나서였다. 한달에 박스만 접어도 월급 360만원... 그냥 지나치던 그 광고. 나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신중하게 반복해서 그 광고를 시청했다.


며칠전 만난 유일한 백수 친구는 백수생활 한달만에 노는 게 지겹고 노년이 걱정되어 직장을 알아보고 있노라 했다. 행정복지센타에 가서 취업상담을 해봤는데 노인요양보호사를 추천해 주더란다. 공부를 좀 더 할 자신이 있으면 공인중개사도 괜찮을 것 같다며 나에게도 생각해보라고 했다. 앞으로 100세 시대인데 경제활동은 못하고 병원비 지출이 많아질 길고 긴 노년이 두렵지 않느냐고. 사실 그 친구는 나보다 더 경제적으로 풍족하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나는 백수생활 일년이 넘었는데도 조금도 지겹지가 않다. 그리고 이제 더이상 일하고 싶지 않다. 나는 없으면 없는 있는 돈에 맞춰서 살 수 있다. 나의 생활습관은 그리 많은 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운전을 하기보다 대중교통 이용과 걷기에 익숙하고 돈을 쓸 수밖에 없는 모임이나 만남도 거의 없고  혼자서도 잘 돌아다니고  고독도 즐기고  취미라고 해봐야 돈이 별로 들지 않는 독서와 등산 이다. 그러나 진짜로 돈을 벌어야 한다면 나는 취직을 위한 자격증 공부 따위 하고 싶지 않다. 할 자신도 없다. 그리고 사람 상대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거다. 나는 사람에 시달리고 질리는 직업을 너무 오래 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육체노동을 할거다. 나 다행히 이렇게 건강하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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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던 치과에 9시 넘어 통화가 되었다. 오늘은 원장님 개인 사정으로 휴진이어서 내일로 예약을 잡으라 했다. 주말에 해먹고 남은 호박참치덮밥을 데워 먹고 집안을 충 치우고 어슬렁대다가 정오 무렵 보냉병에 냉커피를 타서 넣고 노트북과 부르투스자판기까지 챙겨 넣은 백팩을 메고 오랜만에 도서관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맥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온갖 근심걱정과 잡생각에 잡아먹히기 전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집을 나서야 했다.


대부분의 도서관이 휴무인 월요일에 유일하게 문을 여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ㅇㅇ행정복지센타 4층에 있는  ㅇㅇ작은 도서관에 가기로 했다.


햇빛이 부셔서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었다. 행정복지센타 앞은 공사중이었다. 보도불럭이 다 파헤쳐져 있고 출입을 금지하는 노란 줄이 쳐져 있었다. 공사장을 삥 돌아 복지센타 건물의 뒤쪽으로 갔다. 하얀 개망초꽃과 진분홍 접시꽃이 흐드러진   화단과  복지센타 건물 사이  그늘진  보도블럭 위에 상자를 깔고 누워 잠든 인부들이 보였다. 얼굴을 덮은 모자 사이로 삐죽삐죽 나온 수염과 검게 그을은 거친 피부가 보였다.  그들의 잠은 혼곤하고 깊어 보였다. 화단의 꽃들은 그들의 잠을 지켜주려는 듯 움직임이 작았다.  나도  조심조심 그들 옆을 지나 행정복지센타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덥고 지쳐 보이는 청년을 만났다. 청년도 4층 도서관에서 내렸다.


서가에서 박연준 시인의 '듣는 사람' 산문집 책을 보고 반갑게 빼들었다. 서른 아홉 권의 고전 소설을 소개해 주는데 연인(마르그리트 뒤라스), 사양(다자이 오사무), 봉별기(이상), 스토너(존 윌리엄스), 슬픔이여 안녕(프랑수와즈 사강),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아고타 크리스토프), 섬(장 그르니에) 등 오래전에 읽었으나 까맣잊은 책이 꽤  포함되어 있어서 혼자 뿌듯해 하면서 읽었다.  내 옆 자리엔 나와 비슷한 연배의 여자가 수험서로 보이는 책을 펼쳐 놓고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조금만 읽다가 대출해 갈 생각이었는데 도서대출증을 가지고 오지 않음을 알고 계속 읽다 보니 오후 5시가 넘었다. 6시에 문을 닫는데 배도 고프고 좀 일찍 갈까 잠시 고민하는 중에 전화가 왔다. 지난주에 대출 신청을 한 은행의 담당 대리였다. 혹시 대출이 거절당했나 싶어 긴장하고 전화를 받았더니 서류중에 가족관계증명서가 빠졌다고 내일까지 직접 가지고 방문하거나 아니면 팩스로 보내 달라고 했다.


알겠다고 전화를 끊고 가방을 챙기면서 내일 처리할 일이 생겼군, 하고 생각하다가 바로 2층에  민원실이 있음을 인식했다. 다행히 아직 근무시간이었고 또 다행히 나에겐 신분증인 운전명허증이 있었다. 가족관계증명서를 바로 뗄 수 있는 모든 조건이 갖추어졌다는 뜻이었다. 민원실에 펙스도 있어서 직원에게 부탁하여 펙스까지 넣었다.


그런 후


대리님 제가 다행히도 민원실 근처에 있었거든요... 바로 펙스 넣었으니까 확인해 보시겠어요?


하고 전화까지 해 주었다.

은행 대리는 나의 빠른 대처에 아주 흡족해하면서 은행 대출건도 빠르게 처리해 주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 일이 뭐라고 마치 오늘 처리할 중요한 일을 빠르게 완벽하게 처리한 듯 뿌듯 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좋은 책도 발견하여 읽었으니 오늘 하루를 그리 무용하게 보낸 것 같지 않았다. 


까짓 흔들어보라지... 나는 흔들리는 일상 위에서도 춤을 출 거니까...아마  흔들려서 더욱 유연한 춤을 출 수 있을거야...


턱없이 이런 배짱도 생겼다. 내일은 치과에 갔다가 도서관에 가서 박연준 시인의 듣는 사람, 을 마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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