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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맛의 이동ㅡ햄버거에서 콩가루부추찜으로

by 찌니

1990년대 후반 경기도 군포시 산본재래시장 입구에는 햄버거집이 있었다. 맥도널드였던 것 같다. 버거킹이었나?케이에프씨였을지도 모르겠다. 게으른 전업주부였던 나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그 햄버거집에 자주 갔다. 주로 둘이서 끼니를 해결해야 하는 점심이나 이른 저녁때였다. 건물의 지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벽에는 예술가들의 흑백사진이 걸려 있었고 항상 알 듯 모를듯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또 늘 손님이 없었다. 넓은 매장에 아들과 나 단 둘 일 때가 많았다. 나는 그 적막하기조차 한 조용한 분위기가 좋았다. 아들은 햄버거를 먹으면서 매장 안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놀았고 나는 햄버거를 천천히 먹으면서 갖고 온 책을 읽었었다. 물론 그 무엇보다 햄버거를 좋아했다. 그 햄버거집은 얼마 못 가 문을 닫았고 나는 여간 섭섭하지 않았다.

아들은 키가 훌쩍훌쩍 컸다. 또래 애들은 물론 서너 살 위의 형들과 함께 있어도 늘 머리가 통째로 불쑥 솟아 있었다. 엄마 아빠가 그리 큰 편도 아닌데 애가 어쩜 키가 저렇게 크냐고 부러워하는 시선을 어릴 때부터 많이 받아 왔다. 아들의 현재 키는 186 cm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그런 물음에 어릴 때 햄버거를 많이 먹여서 그런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근거는 없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특별히 아이에게 해 준 것은 햄버거를 자주 사 먹인 것밖에는 없었다. 물론 내가 좋아해서이기도 했지만.


완전 시골 태생인 나는 도시 생활을 하면서 햄버거 돈가스 같은 양식을 좋아했다. 특히 가공식품 중 햄 소시지 종류를 좋아했다. 부대찌개를 먹을 땐 고기보다 햄을 골라 먹었고 삼겹살 옆에서 살이 터지면서 구워지는 큼직한 소시지를 좋아했다. 산행을 하거나 여행을 할 때 가장 즐겨 먹는 간식도 천하장사 맥스봉 등 미니소시지였다. 오빠와 동생과 자취를 하던 이십 대 때는 갈치조림에 햄을 넣어 보았었다. 햄을 넣은 갈치조림을 앞에 두고 오빠와 동생이 어떤 반응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 사실은 가끔 나의 요리 실력을 판별하는 기준으로 작용했다. 내가 요리에 대해 말을 할 때면 너 갈치조림에 햄 넣은 여자잖아...라는 식으로.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가공식품인 햄 소시지는 나이가 들면서 건강을 위해서 피해야 할 일 순위 식품이 되어버렸다. 외식을 할 때면 타의건 자의건 햄버거보다 곤드레밥이나 감자옹심이를 더 자주 선택한다. 그러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는 아직도 감자보다 소시지를 사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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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에서 동네 마트의 반값 가격인 부추와 꽈리고추를 덥석 사 왔다. 부추는 부추전을 해 먹고 꽈리고추는 멸치 볶을 때 넣을 생각이었다. 부추는 비 오기를 기다렸고 꽈리고추는 남은 멸치볶음을 다 먹기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냉동실 한 구석에서 유통기한이 좀 지난 날콩가루를 발견했다. 남편이 발견해서 버리기 전에 해 먹어야 했다. 그래서 언젠가 한두 번 하다가 실패한 콩가루찜 반찬을 하게 되었다.

실패의 일차 원인은 찜기에 찔 때 끓어오르는 물이 만드는 김에 기껏 입혀놓은 콩가루가 다 씻겨 내려가 버린 것이었다. 실패하지 않기 위해 유튜브 숏폼을 몇 번 시청했다. 실패의 기억과 함께 콩가루꽈리고추찜에 대한 유쾌하지 않은 기억도 떠올랐다.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교실이 모자라서였는지 내가 속한 5학년 2반은 도서실을 교실로 사용했다. 그날의 내 점심도시락 반찬은 꽈리고추찜이었다. 왜 하필 꽈리고추찜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언니 오빠들이 그나마 괜찮은 반찬을 다 싸간 후 남은 반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반갑지 않았다. 친구들과 둥그렇게 모여 앉은자리에 도시락을 꺼내 놓기가 창피했다. 1970년대 농촌 학생들의 좀 괜찮은 도시락 반찬이라고 해 봤자 계란프라이나 감자볶음 멸치볶음 분홍소시지 전 정도일 뿐 김치나 마늘종이나 무말랭이 등 거기서 거기였다. 그런데 그날 꽈리고추찜은 왜 그렇게 창피했는지 모르겠다. 창피함을 조금이라도 만회하고 싶은 마음에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 짐짓 연극을 했다. 어휴 참 엄마는... 고추찜을 싸줬네... 어휴 참 엄마는... 나 이거 잘 안 먹는 거 알면서... 어휴 참... 집에 달걀이 떨어져서... 어휴 참... 그러면서 고추찜을 재빨리 집어 먹어버렸다. 여럿이 모여서 점심을 먹다 보면 맛있는 반찬은 금방 없어지고 맛없는 반찬은 끝까지 남아 있었다. 아니 맛을 떠나서 좋아하는 반찬과 좋아하지 않는 반찬이라고 해야 맞겠지...어쨌든 나는 내가 싸 온 꽈리고추찜이 친구들의 외면으로 끝까지 남아 있게 하고 싶지 않았다.

얼굴을 붉히면서 엄마 핑계를 대며 급하게 그러나 최대한 아무도 모르게 꽈리고추를 집어 먹던 그 기억이 왜 그렇게 또렷한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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듬뿍 입힌 콩가루가 김에 씻겨 내려가지 않게 하기 위해선 찌기 위해 끓이는 물의 양을 최소한으로 해야 하며(이건 친구가 알려 줌) 찌는 시간은 4 ㅡ5분 정도. 절대 시간을 초과해서 찌면 안 된다. 콩가루가 씻겨 내려갈 뿐만 아니라 채소 자체가 질겨진다. 이젠 이런 것까지 알고 있다. 이젠 이런 거까지 알고 있다. 햄버거로 끼니를 떼우던 내가 말이다.

꽈리고추를 쪄내고 그 찜기에 바로 부추를 올려 쪘다. 이른바 원 팬 요리.

골고루 펴서 한 소뜸 식힌 후에 부추찜에는 국간장과 참치액과 깨소금과 참기름을 넣어 살짝살짝 조심조심 버무리고 꽈리고추찜에는 부추찜 양념에다가 고춧가루를 추가해 주면 된다. 채소 본연의 맛이 살아 있게 하기 위해 양념의 간은 최소한도로 하는 것이 좋다.

이거 완전 시골 반찬인데 먹어 보셔... 특히 이 부추찜은 경상도 최고의 건강식이기도 하지...


식탁에 앉으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아들은 맛있다고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반복해서 집어 먹었다.


역시 넌 내 아들... 농군의 딸 피가 흐르고 있구나...


어깨를 두드려주며 흡족해했다. 반면 남편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나의 성화에 겨우 작은 꽈리고추 한 개와 부추 몇 가닥을 편식하는 소년처럼 집어 먹을 뿐이었다.

입에 안 맞아?


물었더니 역시나 별로라면서 조미김을 밥 위에 얹었다.


진짜 이번에는 맛있게 잘 됐는데... 도시 출신이다 이거지? 칫! 이 맛을 몰라요... 이 맛을... 참 나... 맛뿐이야? 특히 부추... 경상도 말로 정구지... 피로회복 혈액순환 정력 증진... 어?


나는 보란 듯이 밥 한 숟가락을 입에 넣은 후 꽈리고추를 연달아 세 개를 집어 입에 넣고 이어서 부추찜도 듬뿍 집어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으음... 이렇게 맛있을 수가... 이 맛을 모르다니... 이것을 안 먹다니... 나에 대한 예의도 아니고 고추와 부추에 대한 예의도 아니야... 자... 먹어 봐 먹어 봐 응? 응?


나는 포기할 수 없어 먹는 내도록 남편을 귀찮게 굴었다. 남편의 밥숟갈이 입에 들어가기 직전에 부추찜이나 꽈리고추를 잽싸게 얹어 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식탁에 다 떨어지기도 했다. 남편이 가볍게 눈을 흘기며 입으로 쓰읍, 경고를 할 때까지.

이렇게 맛있고 건강에도 좋은 것을 혼자 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햄버거 #콩가루부추찜 #콩가루꽈리고추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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