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넷째 주 토요일에 하는 등산모임이 있다. 중학교 동창 다섯 명과 2021년 여름부터 시작했고 85세까지 등산을 하자고 ‘더팔오’라 이름 지었다. 동창들을 상대로 홍보를 했지만 지금까지 겨우 한 명이 더 늘어난 6명이다. 둘레길을 도는 정도의 모임이면 참가하겠다는 동창은 많았지만 우린 처음의 뜻대로 등산을 고집했다. 그만큼 산을 좋아하고 체력에 자신이 있었다. 어쩌다 보니 여자는 나 한 명이 남았다. 일 년 가까이 함께 했던 여자 동창도 체력의 고갈을 이유로 들며 탈퇴했고 그 사이 또 한 명 들어온 여자동창도 두 번 정도의 참석을 끝으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남자 동창들과의 등산에 뒤쳐지지 않았다. 내가 자주 다니는 수리산이나 청계산은 나의 나와바리라고 큰소리치면서 앞장서서 머스마들을 리딩해 왔다.
지난해 8월 나는 러닝을 시작했다. 이사 온 집 가까이 달리기 좋은 안양천이 있었고 때마침 러닝 붐이 일기도 했던 때였고 나는 오랜 직장생활에서 탈출한 꿈에 그리던 백수였다.
3km로 시작했다. 일주일에 세 번 정도 러닝을 하고 한 달에 두 세 번은 혼자 집에서 가까운 수리산과 삼성산을 올랐다. 등산보다도 러닝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최소한의 시간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운동 같았다. 모자를 눌러 쓰고 운동화 신고 집을 나서면 시작할 수 있었다. 그 어떤 준비도 준비물도 필요없었다. 5km로 늘렸고 7km를 뛰었으며 10km까지 달렸다. 10km를 한 시간 좀 넘게 달렸으니 속도 면에서도 나이에 비해 훌륭한 편에 속했다. 그것도 달리기 애호가인 소설가 하루키를 따라 하려고 중간에 절대로 걷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했다. 살이 빠졌고 몸이 가벼워졌다. 둥그스름하던 턱선이 살아났다. 땀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진리였다. 언제 내 자신이 이렇게 맘에 들었던가 싶었다. 설레는 맘으로 내가 참가할 수 있는 마라톤 대회를 찾아보기도 했다. 내가 한여름에도 비지땀을 흘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육체적 인간임을 새삼스럽게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만약에 다시 취업을 해야 한다면 쿠팡 물류센타 같은 힘 쓰는 곳에 다녀야 되겠다는 생각도 달리면서 했다. 이력서에 나이는 많지만 10 km를 한 시간에 완주한다고 쓰면 통과될 것 같다는 생각에 뛰면서 혼자 빙그레 웃기도 했었다.
그러나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내 나이를.
지난 봄 발목이 좀 이상하다 싶은 걸 무시하고 달리기를 계속하다가 결국 오지게 넘어지고 말았다. 왼쪽 무릎이 깨진 것은 물론 넘어지면서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은 왼팔까지 두뇌의 명령을 따라주지 않았다. 다행히 근육이 파열되거나 인대가 끊어지거나 뼈에 금이 간 것 같지는 않았다. 파스를 붙이고 찜질을 하고 무릎보호대를 구입하고 스트레칭을 열심히 하면서 천천히 안양천을 걸었다. 나는 경기나 훈련 도중 부상을 당해서 재활에 들어간 운동선수같은 마음이었다. 정형외과에 가서 액스레이를 찍고 물리치료를 받지 않고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나았던 몇 번의 경험을 믿기로 했다.
무릎의 상처가 아물고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음과는 달리 몸이 넘어지기 전으로 완전히 돌아가 주지 않았다.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조심하라는 몸의 신호를 무시했다. 살아오면서 시도했다가 포기했던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후회로 남아 있는 많은 일들이... 나는 달리기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포기하고 싶은 순간을 넘기고 넘겨서 10km까지 왔는데...
결국 나는 더 이상 10km를 뛸 수가 없게 되었다. 시작 전 달리기 앱에서 목표거리 10km 설정을 망설이고 있었다. 몸이 보내는 무언의 신호는 집요했다. 몸이 정신을 압도했다. 7km로 줄였고 5km로 줄였고 속도도 슬로우러닝으로 바꾸었으며... 언제부터인가 목표 거리도 설정하지 않고 시간도 재지 않았다. 하루키를 따라 하던, 중간에 절대 걷지 않는다는 원칙도 버렸다.
한달쯤 전부터는 아예 걷기만 하게 되었다. 산책하는 것보다 조금 속도를 내어 걷는 내 옆을 바람처럼 지나쳐 저만큼 달려 나가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구경꾼이 되어 버렸다. 주연에서 밀려난 조연처럼 씁쓸하고 서글펐다. 계절도 가을인데 말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이 시간을 재활의 시간이라 명명해 두고 있다.
<나는 요즘 왼쪽 무릎이 삐그덕거려서 글루코사민 복용하면서 걷기나 하면서 재활의 시간을 보내고 있어. 참석할지는 단언하지 못하겠지만 많이 좋아진 것 같아서 최대한 참석할 수 있도록 애써 보겠어. 단풍이 절정일 산도 그립고 너희들도 보고 싶네...>
이번 달 산행모임 단톡에 내가 올린 글이다. 글을 올리고 단톡을 쭉 올려 찾아보니 지난 6월 수리산 산행이 마지막 산행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5월에는 멀리 남양주의 예봉산 정상(678m)에서 머스마들 사이에서 브이자를 그리고 활짝 웃는 모습의 사진도 있었다. 그러나 활짝 웃는 얼굴 속엔 나만이 볼 수 있는 그늘이 보였다. 전에 비해 무척이나 힘들었던 산행이었던 것이다.
6월의 수리산 산행. 나의 나와바리라고 큰소리 치면서 늘 앞장서서 올라가서 뒤쳐진 머스마들이 좀 천천히 올라가라고 하던 그 수리산을 나는 처음으로 뒤쳐져 올라갔었다. 앞서 올라가던 머스마들이 멈춰서서 기다려주며 야 너 왜 그래 너답지 않게... 했었고, 그러게... 힘드네... 이제 하산할 때가 되었나보다... 내가 올려다보며 애써 웃으며 말했고, 야 벌써 하산하면 안돼... 우리 더팔오야 더팔오... 하며 가까이 다가온 나에게 힘주어 말했었다. 얼굴을 뒤덮은 열기와 땀을 훔쳐내며 숨을 몰아 쉬며...아무래도 안되겠다 더이른(일흔)으로 바꾸자... 했었던가...
그 산행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산에 가지 않았다. 산행모임 뿐만 아니라 혼자서도 산을 찾지 않았다. 특히 계단을 오를 때 왼쪽 무릎이 아픈데 요즘 산은 계단이 많은 까닭이다. 러닝도 하지 못했다. 다행히 걸을 때는 아프지 않아 안양천을 따라 안양예술공원까지 걸었다. 왕복 두 시간 가까운 거리다. 공원에서는 관악산이나 삼성산 산행을 끝내고 내려온 활기찬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커피숍에 앉아 있곤 했다. 도로 건너 인공 폭포수가 흐르는 광장에서 스트리트 뮤지션이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가 많았다. 아웃도어를 입은 등산객들을 떠들썩하게 지나가고 서너 명이 관객으로 앉아 있는...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나 어떡해... 너를 잃고 살아갈까...
그렇게 덥고 길었던 여름이 갔고 더욱 짧아진 가을마저 가고 있다.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롱패딩을 꺼냈고 보일러를 돌리기 시작했으니 초겨울로 진입했다고 해야 하겠지... 산을 찾지 않아도 러닝을 그만두어도 시간은 자기 역할을 엄숙히 수행하여 한 계절을 보내면 또 한 계절을 불러 온다. 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아침마다 혈압약보다 글루코사민을 더 챙기게 되었다는 사실 정도일 뿐.
좀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후회의 감정이 요즘 많이 든다. 러닝이 그렇고 방통대 공부가 그렇고 글쓰는 일이 그렇다....
늦은 밤 친구와 톡으로 필담을 나누다가 이런 글로 마무리를 지었다.
망설이며 미뤄두었던 글쓰기를 시작한 친구는 글쓰기 쌤이 진작에 글을 써 보지 그러셨냐고 뭐 지금 늦었다는 건 아니지만... 이라고 했다면서.
친구는 참... 서글프네 .... 라고 썼다. 나는
그러네...참... 하고 답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