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그럴까?
흔히들 말한다. "헤매기 때문에 인생이다."라고. 정말로 인생은 헤매는 것일까? 나도 길을 헤매는 한 사람일 뿐일까?
헤매다는 길을 찾지 못하고 돌아다님을 뜻한다. 그렇다면 헤매지 않는 옳은 길이 있고 그 길의 끝에는 아름다운 도착이 있을까? 생물학적으로 보자. 자손을 남기지 못하면 헤매는 것이고 종의 번영을 위한 행동을 한다면 옳은 길일 테다. 종의 번영이라는 도착점은 명확하지만 참으로 삭막하다. 그렇다면 어떤 도착점을 위해 달려야 할까? 옳은 길이란, 아름다운 도착이란 존재할까? 애초에 이것들을 알 수 없기에 헤매는 것인가?
인생은 헤매는 것이라니. 광오하다. 인생에 정답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정답에 부합하지 못하면 모두가 낙오자고 정답을 알더라도 길을 찾지 못하면 모두가 미아인 것만 같다. 너무 보편적인 관점에서 접근했을지도. 그렇다면 인생의 목표가 모두 다름을 인정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인생의 목표를 찾는 과정에 있고 그것은 헤맨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꼭 목표가 있어야만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무작정 걷다 보면 평소에 보지 못한 들꽃, 조각 작품, 가게들을 볼 수 있을지도 그리고 그것이 여태까지의 헤맴의 목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말이다. 이 과정을 헤맨다고 볼 수 있을까? 목표를 찾기 위해 걷는 것 자체가 목표가 되어 올바른 길로 걸어갔다고 말할 수 있다. 과정에서 우리는 헤맨다고 느꼈지만 결국 한순간도 헤매지 않았다. 어쩌면 운명론과도 닿아있는 것 같다. 우리가 헤매는 것조차 예비된 운명이라면 그것이 정녕 헤매는 것이 맞는가? 목표를 찾기 위한 예비과정일 뿐이다.
아무튼 운명론은 저리 치워두고 만약 개인의 목표를 찾았다고 가정하자. 그 후로 헤맴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 모두가 최단거리로 갈 수는 없으니 사이사이 멀리도 돌아가 보고 잠시 멈추기도 하며 과정 속에 있는 불완전성을 헤맨다고 말해보자. 길을 모르기에 갈팡질팡하고 돌아다닌 끝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있다. 이 과정을 감내할 수 있을까?
우리는 2차원상의 한 점이라고 가정하자. 목표는 다른 한 점이다. 무작정 한 방향으로 뛰었을 때 목표에 도달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무한한 각도 중 단 하나의 경우의 수. 그렇기에 위험하고 두렵다. 게다가 이동량은 고려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멈춘다. 헤맨다면 멀어질 확률이 더 높지만 가만히 있으면 멀어지진 않기 때문이다. 사실 반이나 가기도 하고 말이다. 멈춘다면 적어도 헤매지는 않잖아.
그러면 멈추는 게 옳은가? 반박하고 싶어지는 어구로군. 가만히 있으면 반이라도 간다. 시작도 반이니 가만히 있기를 시작하면 모두 채워진다. 그런데 무엇이 채워지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헤맬 거라는 걸 알고 가만히 있는 나는 헤매며 오힐 더 멀어지는 너희보다 행복해." 비극적인 패배주의의 완성이다.
애초에 헤매는 것은 맞을까? 부정을 위한 부정만을 늘어놓고 있다. 그래 사실 인생은 헤매는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야. 모든 길이 옳은 길이고 모든 도착점이 목표였으면, 하지만 아닐 테지. 나의 길도 도착 없이 영원히 헤맬 것이다. 영원히. 그래도 쉬어갈 돗자리 하나쯤은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