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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물여덟 Oct 17. 2023

삼켜지도록 방치된 자유

언어의 한계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다. 세계에 오직 한 사람만 있다면 그는 자유로울까? 자유는 너의 비해 내가, 나에 비해 네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에 달려있다. 어떤 상태란 무엇일까? 무엇을 자유롭다고 정의하는지, 자유의 정의는 무엇인지, 비자유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 등.... A를 정의하기 위해 B를 사용하고, B를 정의하기 위해 C를 사용하는 언어의 망망대해 위에 우린 헤엄친다.

언어는 썩 효율적인 의사 전달 수단이 아니다. 언어를 이루는 단어들은 자연적 합의를 통해 특정한 범주의 의미를 포괄하고 깎이고 붙여가며 뜻을 전한다. 그렇기에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심지어 개인별로도 언어의 의미가 다르다. A라는 범주에 a, b, c 가 포함된다고 할 때 a를 생각하며 A를 말하면 성공적 의미 전달 확률은 34%에 불과하다. 심지어 연속적인 의미, 상황적 맥락으로서의 뜻을 전달하는 경우도 있기에 더욱 난감해진다. 이처럼 각자의 이해가 엇나가게 되는 경우에는 길고 긴 의미협상을 통해 생각을 연결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 언어로 이어지기에 상대방의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엇갈린 소통은 갈등을 낳는다. 미터와 피트를 혼동해 발생한 사고처럼 서로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 여기게 된다. 심지어 현실적 손해를 야기하기도 한다. 더 확장해서 세상 속 갈등의 많은 부분이 어휘의 문제에서부터 시작된다. 얼핏 서로 같은 말을 하는 듯해도 함의는 다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갈등 해결의 첫걸음은 문제를 명확히 정의하는 것에 달렸다.

관념적 정의를 넘어서 이 문제상황에 적용되도록 새롭게 어휘를 정의한다면 꽤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물론 서로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나는 이렇게 이해했지만, 이 부분에서 서로의 견해가 갈렸구나, 그러면 너의 행동이 이해되네. 더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해서 미안해 실은 이런 뜻이었어."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쉬운 걸 하지 않을까?

명확한 어휘의 정의 문제는 서로를 이해하는 발판이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파편화되는 지뢰이기도 하다.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집단의 문제가 될수록 문제는 다면화되고 분리된다. 권력은 집단에서 나오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권력이 필요하다. 그렇기에 대부분은 문제를 덮어놓는다.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고 몸집을 부풀린다. 크기에 현혹된 사람들은 그를 맹목적으로 따른다.

스스로 눈을 감아 장님이 되어 앞사람의 어깨를 짚고 걷는다. 단지 판단하기 귀찮다는 이유로. 스스로 자유로울 권리를 포기한다. 내 자유를 어디까지 할양할 것인가, 이 사람의 어휘는 무엇을 내재하는가. 판단의 시간이다. 물론 이 글도 한국어로 작성되었고 글자 언어 특성상 전달되지 못한 표현도 많다. 이 글을 읽을 것인가 아니면 훑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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