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락사락
도서관에서 낡고 두꺼운 책을 빌렸다. 50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이었다. "사람 손을 많이 탄 책이니 재미있겠지. 제목도 눈이 가고." 책을 빌리고 제법 선선해진 거리로 나와 책을 펼치는 순간 놀라운 경험을 했다. 표지가 접히는 것이다. 한번도 펼쳐져본적 없는 것 마냥 표지의 접히는 부분은 빳빳했다. 맨뒤 책 정보를 보니 작년 11월에 초판 인쇄된 파릇파릇한 책이었다. 나온지 1년도 안된 책이 모서리가 닳고 손떼가 많이탔으면서 한번도 펼쳐지지 않았다니. 상상력을 무럭무럭 피어나게 하는 일이 아닌가?
수없이 많이 빌려졌지만 한 번도 읽히지 않은 이유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이를테면 케이크의 딸기니까. 끝끝내 읽히지 못한 지식은 어떤 기분일까? 해주고싶은 말이 이렇게나 많은데, 심지어 나를 가져가기까지 했는데, 펼쳐지지 못한 마음은 아마 친구와 술에 취해 실없는 이야기를 한참 늘어놓고 싶은 날 친구들이 모두 연락을 받지 않을때의 기분과 비슷할 것 같다. 어디든 가줄 준비가 되어있는데 받지않는 기분이란!
조금 더 들어가서 읽히지 않는다면 책은 무슨의미가 있을까? 태블릿이 보급되면서 구태여 책을 빌리는 것은 비효율적인 행위가 되었다. 전자책을 사지 않아도 책을 저렴한 값에 구독하여 읽어볼 수도 있는 시대가 왔다. 그럼에도 도서관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꾸준히 사용된다. 그건 아마 책이 주는 힘이 아닐까? 책을 들고다니는 것만으로, 책을 빌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충족되는 자기만족적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대여파워! 책이 읽히지 않더라도 나를 꾸미는 무거운 악세사리가 되어버린것이다. 지식을 동경하여 책을 빌리는, 타인의 시선과 자기만족이 어우러진 욕망의 충족. 읽히지 않더라도 책은, 종이책은 그 자리를 영원히 지킬 것만 같다.
사실 나조차도 비판적 사고력과 인문학적 소양만을 위해 책을 읽지는 않는다. 스리슬쩍 사람 많은 카페로 가서 책을 꺼내 사락사락 넘긴다. 그게 나쁜가? 나는 이를 논할 자격이 없으니 누군가가 말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나쁘대도 책을, 종이책을, 카페에서 읽을거다. 내가 그걸 원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