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소 Oct 11. 2024

서랍을 열어, 당신이 넣어 둔 심장을 햝아보았습니다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고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어느 늦은 저녁 나는」이라는 시로 시작합니다. 이 시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합니다.



그때 알았다                              

무엇인가 영원히 지나가버렸다고


지금도 영원히


지나가버리고 있다고



 이 시집을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이 시를 소리내어 읽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한강을 좋아합니다. 사실, 좋아하는 게 어떨까? 하고 생각해서 좋아하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갓 대학생이 되자마자 반강제로 참여한 여러 모임에서 선배들은 어떤 작가를 가장 좋아하는 지 물었습니다. 동기들은 각자 이야기했습니다. 김애란, 편혜영 등등. 현재 문단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들이었습니다. 나는 그런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뭐라 말을 해야 할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소설 <향수>를 쓴 파트리크 쥐스킨트를 좋아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시 질문이 들어왔습니다. 한국 작가는? 도서관을 가을에 굴 드나드는 다람쥐처럼 드나들던 때였습니다. 그때 빌렸던 책 『내 여자의 열매』. 저는 한강의 이름을 댔습니다. 그녀의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못했을 때였습니다.


 그 뒤로 저는 무언가 골라야 할 때면 항상 한강의 이름을 댔습니다. 문장을 모방하는 과제를 해야 할 때, 작가론을 쓸 때. 그렇게 꾸물꾸물 한강을 읽어나갔습니다. 그리고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의 문장은 한 줄 한 줄이 시처럼 다가온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편집에는 시와 같이 아주 짧은 이야기가 실리기도 했습니다. 사실 그녀는 시를 쓰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수천 번의 밤이 지나고, 저는 울산의 한 서점에서 그녀의 시집을 발견했습니다. 긴 머리칼로 얼굴을 덮은 옆얼굴이 그려진 시집이었습니다. 저는 냉큼 시집을 사서 그 날 열리기로 한 독서모임을 기다리며 소리 내어 읽어보았습니다. 그녀의 언어를 하나씩, 핥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이후로 지금까지, 대략 한 달하고도 보름이 지나는 동안 시집을 두 번 읽었습니다. 한 번은 전부 소리를 내어서, 다른 한 번은 마음이 가는 시만 소리를 내어 다시 읽었습니다. 묵독을 했을 때 더욱 깊이 다가오는 시도 있었지만, 잘 쓰여진 시가 그렇듯이 소리를 내어 읽었을 때 혀끝에서 가장 섬세하고 예민하게 반짝였습니다. 어떤 시는 구조까지 완벽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어떤 시는 일부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아 밀어두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떠오르는 이미지와 의미, 구조까지 좋았던 시 몇 편을 소개하려 합니다.



검은 옷의 친구를 일별하고 발인 전에 돌아오는 아침 차창 밖으로 늦여름의 나무들 햇빛 속에 서 있었다 나무들은 내가 지나간 것을 모를 것이다 지금 내가 그중 단 한 그루의 생김새로 떠올릴 수 없는 것처럼 그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그랬지 우린 너무 짧게 만났지 우우우 몸을 떨면 울었다 해도 틈이 없었지 새어들 숨구멍 없었지 소리 죽여 두 손 내밀었다 해도 그 손 향해 문득 놀라 돌아봤다 해도                              



 「여름 날은 간다」라는 시입니다. ‘잎사귀 한 장 몸 뒤집는 것 보지 못한 것처럼’ 짧게 만난 친구. 누군가의 상주일지도, 문상객 일지도 모릅니다. 이후에 울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죽은 사람도, 화자와 금방 헤어진 사람도 모두 친구사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새어들 숨구멍도 없이 바쁜 지금, 화자에게 친구와의 기억은 지나가버린 나무들처럼 너무 빠르게 사라진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한강의 시에는 이렇게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의한 상흔이 곳곳에 박혀있습니다. 영혼의 상처입니다.



새벽에                              

누가 나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나쁜 꿈에서 깨어나면


또 한 겹 나쁜 꿈이 기다리던 시절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끝에 걸려 있었다



빛을


던진다면



빛은


공 같은 걸까



어디로 팔을 뻗어


어떻게 던질까



얼마나 멀게, 또는 가깝게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


때로


두 손으로 간신히 그러쥐어 모은


빛의 공을 들여다보았다



그건 따뜻했는지도 모르지만


차갑거나


투명했는지도 모르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거나


하얗게 증발했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거울 저편의 겨울2」입니다. 살아갈수록 어딘가에 찔리고 부딪혀 조금씩 상처를 입는데, 상처는 때로 삶의 외부가 아닌 내부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나의 꿈이 나를 흔들고, 괴롭게 만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토록 도달하고 싶어 나를 괴롭혔던 꿈이 내 일부가 되는 순간에 서면, 힘들어했던 과거의 나를 관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 시를 읽고 숙제처럼 명치끝에 걸린 꿈을 빛처럼 던져 올리고 난 뒤, 언젠가 그것을 쏘아 올렸던 날을 떠올려보고 싶었습니다. 


 한강의 시는 영혼의 상처를 스스로 어루만지고, 핥아줍니다. 화자의 상처는 화자만이 낫게 할 수 있다는 듯이. 삶이란 수북한 상처를 끌어안고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파고든 티끌로 진주를 만드는 조개처럼 천천히 상처를 치유해야하는 것입니다. 치유의 힘으로 우리는 계속 살아갑니다.



무엇이 나를 걷게 했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


등을 떠밀고


맥없이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는가 깨무는


혀끝을 감싸주었는가


비틀거리는 것은 햇빛이 아니었다.


아름다워라 산천, 빛나는


물살도 아니었다.


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


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


숙주이니, 병들 대로 병들면


떠나려는가


발을 멈추면


휘청거려도 내 발 대지에 묶어줄


너, 홀씨 흔들리는 꽃들 있었다


거기 피어 있었다


살아라, 살아서


살아있음을 말하라


나는 귀를 막았지만


귀로 들리는 음성이 아니었다 귀로


막을 수 있는 노래가


아니었다



 「유월」의 일부입니다. 내면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는 힘. 상처입고 절망해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치유의 힘, 삶에 대한 의지입니다. 이는 전적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옵니다. 심장이 든 서랍을 열어야만 꺼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귀로는 들을 수 없습니다. 귀는 외부의 소리를 듣기 위해 돌출된 기관이니까요. 막을 수 있는 노래도 아닙니다. 생존에 대한 의지는 우리가 꺼놓고 싶다고 꺼둘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내 속의 병처럼 나를 움직이는 의지. 그것이 나를 살아가게 합니다. 그저 가만히 있고 싶을 때, 삶에 대한 의지는 마치 병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살아가게 함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



 시는 한 편으로 완결된 세계입니다. 소설가는 자신의 작품으로 계보를 만들어야만 소설가라고 할 수 있다고들 합니다. 소설가의 ‘가’는 집 ‘가’자를 쓰니, 여러 편의 소설로 집을 이루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사람 ‘인’, 그저 사람입니다. 시처럼 살아가는 사람은 시인이고, 세상에 시를 딱 한 편만 내놓아도 시인입니다. 시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시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하나의 세계를 가집니다. 내가 눈을 한 번 깜빡일 때에도 세상에 수많은 시가 태어나고, 사라집니다. 많은 시들이 기뻐하고, 또 눈물짓습니다.


 이러한 것이 시여서, 저는 이 책을 다 읽었어도 이 책에 대해 전부 다, 한 번에 말하지는 못합니다. 너무 좋아서 독서모임에서 낭송하면서 소개해야겠다고, 문자로는 다 전하지 못할 감정이 담겨 옮겨쓸 수 없었던 시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본 이 시집의 아주 일부, 극히 일부만을 어떠한 맥락으로 엮어 소개할 뿐입니다. 이것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가 더 남아있겠지요. 시 구석구석에도, 제 서랍에도.



 우리는 자라면서 ‘시’를 배웁니다. 함축적, 내재율, 3음보 등등의 어려운 단어들과 함께요. 그런 단어들이 늘어날수록, 시인의 생애를 알아야만 할수록, 어떤 구절의 의미를 달달 외워야만 할수록 우리는 시에서 멀어집니다. 사실, 시의 본질은 그게 아니라는 걸 다들 알고 있습니다. 시는 평가의 대상도 아니고, 해석의 대상도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저 느끼고, 안아보고, 상상해보고, 그려보고, 읽어보면 그만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시는 극도로 정제된 언어이나, 동시에 규정지어지지 않은 말들입니다. 규범을 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언어입니다. 그 세계가 어떠한 곳인지, 시인은 마음속으로는 정해두었으나 상술하지 않습니다. 독자들의 서랍 속에 들어간 자신의 언어가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세계를 강요하지 않는 것, 어떠한 시기에 누가 읽더라도 서로 다른 완전한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것. 그것이 시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의 원류. 인간이 언어를 통해 처음으로 만든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른 이의 언어를 통해 부서지고, 다시 세워지기를 반복합니다.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읽고 계시다면, 혹은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보고 계시다면 저는 모두가 자기만의 시선으로 시를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입속을 부유하는 단어의 세계를 직접 소리내어 짚어가면서. 그 세계를 마음껏 상상해보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신다면 좋겠습니다. 그렇다면 꼭 한강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가 아닌 다른 시집을 읽을 때에도, 충분히 즐기실 수 있을 겁니다.




*

이 글은 2019년 8월, 독서모임 카페에 직접 쓴 감상문입니다. 한강 작가님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며 조금 퇴고해 브런치에 옮겨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