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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은실 Sep 01. 2023

가장 ○리단길스러운 곳, 행리단길

경리단길에서 시작되어 이름 붙여진 전국의 ○리단길.

서울에만 해도 망리단길(망원), 연리단길(연남동), 송리단길(송파), 비수도권 지역에도 황리단길(경주), 해리단길(해운대), 양리단길(양양), 객리단길(전주) 등 수없이 많은 ○리단길들이 있다.


대부분 2030대의 한참 트렌드에 예민한 청년들이 갈 법한 소위 '핫플레이스'를 ○리단길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 그런데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바로 '오래된 장소들'이라는 것이다. 오래된 지역의 ○리단길은 대체로 낮고, 프랜차이즈가 들어오기 전, 즉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기 전에 머물러 있다.


오래된 지역과 건물을 재개발·재건축하는 것이 당연한 우리나라에서, 건물의 연한이 길어야 채 40년을 넘지 못하는 나라에서 오래된 장소는 희귀하다. 그리고 재밌다. 신축 빌딩 1층에 깔끔하고 평범한 인테리어를 해 둔 카페보다, 주택을 기막히게 개조한 카페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는 것이 더 재미있다. 시공업체에서 몇 달 만에 찍어 낸 깔끔하기만 한 인테리어보다, 각기 개인의 훌륭한 감각이 다양하게 살아있는데 보는 재미가 없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리단길로 불리는 곳에 가면 '이랬던 건물을 이렇게 리폼할 수가 있다고?'하고 놀라는 편이다. 최근 방문했던 수원의 행리단길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리단길스러웠다. 물론 내가 전국 방방곳곳의 모든 ○리단길을 다 가 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다른 곳의 ○리단길보다 더 자연스럽게 기존의 건물을 이용했다는 측면에서 그랬다.



다른 ○리단길의 가게들이 건물에 새로운 옷을 입혔다면, 행리단길의 센스는 대체적으로 그 건물에 장신구만을 더 채워주는 느낌이었다. 일종의 도색이나 마감재 변경을 최소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가게들은 간판과 소품 몇 가지만으로 존재감을 크게 드러내고 있었다.


조선의 백자, 백의가 높게 평가받는 이유는 장식을 최소화하면서도 그 우아하고 수려한 분위기는 내는 데에 있다. 원래 대놓고 드러내는 것보다 은은하게 드러내는 것이 더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일까. 처음 가 본 행리단길은 '이랬던 건물을 이렇게 리폼할 수가 있다고?'에서 느껴지는 놀라움보다 훨씬 큰 놀라움을 줬다.

'이렇게 오래된 건물에 간판 하나만 달았는데 이렇게 들어가고 싶게 느껴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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