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에는 능소화가, 그리고 화단에는 주황색 원추리꽃이 피어 있었다. 능소화는 젊은 이들에게 SNS 인증사진으로 유명한 꽃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한강 변의 능소화 길을 찾아 나섰을 것이다. 능소화가 소위 말하는 핫플레이스에 가서 볼 수 있는 꽃이라면 원추리는 그 반대이다. 아파트 화단의 조경수로 인기 있는 식물이기에, 슬리퍼를 신고 집을 나서는 가장 무방비의 상황에서도 눈에 띄는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능소화, 그리고 원추리 모두 꽃대를 빽빽하게 뽑아내는 친구들인지라, 6월 말 7월 초의 바깥은 온통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물론 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온통'이겠지만.
서울숲의 맥문동
주황색의 원추리 꽃이 피어 있던 아파트 화단에는 8월의 계절이 되자 보라색의 물결이 일었다. 맥문동의 꽃이다. 원추리보다 더 빽빽한 꽃대를 올려 말 그대로 보라색이 된 화단에 놀라 사람들은 저 꽃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 평소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가 어느 순간 온통 보라색이 되었다면 궁금할 만하다.
마치 영국의 화단에나 있을 법한 꽃의 모양새를 한 까닭에 그들은 왠지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을 가졌을 것이라 기대한다. 이들에게 '맥문동'이라 답해주면 그렇게 쉬운 이름이었냐고 흠칫 놀라기도 한다.
서울숲의 비비추
그리고 맥문동보다는 조금 덜 화려하지만, 같은 시기에 보라색을 한 스푼 더해주고 있는 이 꽃은 비비추이다. 간혹 흰색 꽃을 피운 비비추를 마주치기도 하지만, 어째 아파트 화단과 공원에는 보라색이 더 많은 것 같다. 비비추는 꽃을 피우기 전엔 줄무늬가 잘게 가 있는 잎들이 밀집되어 있는 모양새다. 어째 그 모습이 땅을 흙째로 놔둘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못난이 식물처럼 느껴지다가도 꽃을 피우면 그 꽃대의 모습이 한없이 고혹적이다.
에린기움과 리아트리스
7월 초에는 김포의 한 대형 카페에서 역시나 보라색 꽃 두 개를 마주쳤다. 에린지움과 리아트리스라는 꽃이다. 둘 다 쉽사리 보기 어려운 식물인데 이렇게 또 마주하면 괜히 알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다. 엄밀히 말하면 에린지움은 보라색이라기보다는 파란색에 가깝다. 도깨비방망이처럼 포실포실한 털들과 그 중심 모두 빛바랜 오묘한 보라를 띄고 있는 게 매력적이다.
에린지움
개화시기를 찾아보니, 8월이 된 지금 리아트리스는 아마 졌을 것이고, 에린지움은 그보다는 개화 시기 종료일이 늦어 지금까지 잘 피어 있을 것이다.
부들레야
얼마 전, 성수동의 한 식당 앞에서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이제는 져 가고 있는 보라색의 꽃이 핀 나무를 발견했다. 내가 모르는 꽃이기에 포털 사이트의 꽃 검색 기능을 활용해서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해 했다. 하지만 꽃이 져 가는 시기에 있어서 그런 것인지, 스마트렌즈는 여러 번이나 조리개를 열고 닫았지만 끝내 이름을 알 수 없었다.
결국 식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인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질문 글을 올렸고, 답변이 거의 1초 만에 달렸다. 답은 부들레야라고. 역시 즐기는 사람, 그중에서도 취미를 독하게 즐기는 사람은 대단하다 싶었다. AI와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도 소위 말하는 '덕질'에서 오는 힘을 아직 이기지는 못한 것이다. 부르는 이름이 여러 가지가 있는 것 같았다. 붓들레아, 부들레이야, 부들레아. 어떤 이름인들 이제 이 나무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