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숑 - Promenade D'Automne
일본에서 꼭 가보고 싶었던 홍차 매장 중 하나가 포숑이었다. 08년도였나 뉴욕에서도 포숑을 찾았었는데 그 전년인가에 철수하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고 한국에서도 포숑이 입점했다고 좋아했는데 얼마 못 가 철수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포숑은 아직도 프랑스 여행 가는 누나들에게 부탁해야 겨우 얻을 수 있었던 동경의 대상으로 계속 남아있다. 벌써 계절이 돌아와 작년이라고 말하는 게 어울릴 것 같은 지난겨울의 첫 일본 여행에서 어쨌든 포숑 레스토랑도 방문하고 백화점 식품관이지만 포숑 매장도 방문해 봤으니 정말 행복한 시간이었다. 식품관의 작은 가게, 그 안의 작은 진열장 안에 주루룩 놓여있던 원통형의 틴케이스들 중에서 단풍이 막 수놓아져 있던 차가 있어 지나치지 못하고 하나 집어왔다. 불어도 일어도 읽지를 못하니 정확히 무슨 차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뒤에 한자로 홍차라고 써있는 건 읽을 수 있었어서 냅다 집어왔는데 집에 와서 보니 바닥에 영어로 autumn stroll tea라고 써있었다. 상관없이 집어왔을 테지만. 포숑의 Promenade D'Automne, 가을산책이다. 이름이 무슨 쇼팽 에튀드 이름 같다. 90g 틴이고 3300엔으로 상미기한은 25년 3월까지인데 아마도 제조 후 2년이지 싶다.
상품정보를 찾는데 좀 고생을 했다. 포숑 홈페이지에도 정보가 없고 검색해 봐야 일본어 페이지만 한두 개 나오고 말아서 이게 뭔가 싶었는데 찾다 보니 일본 한정으로 발매된 게 아닌가 싶은 정보가 있다. (https://www.instagram.com/p/CyNfcxMNXOx)
포숑가 니혼노 “아키” 오 이미-지 시테 츠쿳타 진자-티-. 진자-야 시나몬 오 코코치요쿠 부렌도시, 마론 야 쿠킷- 노 아마이 카오리가 히로가루 후레-바-티- 와, 야사시쿠 죠-힌나 쿠치아타리가 토쿠쵸-테키 데스. 스토레-토 와 모치론, 미루크티- 니모 오스스메 후카마리유쿠 아키노 히니 핏타리나, 카오리 타카이 진자-티- 데, 코코치요이 히토토키 오 스고시테 쿠다사이
포숑이 일본의 “가을”을 이미지하여 만든 진저 티입니다. 생강과 시나몬을 편안하게 블렌드하고, 밤과 쿠키의 달콤한 향기가 퍼지는 플레버 티는 부드럽고 품격 있는 맛이 특징입니다. 스트레이트 티는 물론 밀크티로도 추천 깊어가는 가을날에 어울리는 향기로운 진저 티로 편안한 시간을 보내세요
일본의 상품정보 스티커를 잘 벗겨내니 영어로도 설명이 써있는데 A gourmand tea with sweet and enveloping notes of chestnut and ginger라고 되어있다. 밤 어쩌고 차 어쩌고 하는 설명이 매대에도 붙어있었던 거 같은 기억이 난다. 생강, 시나몬, 카다멈, 잇꽃과 가향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아마도 잇꽃으로 붉은 단풍의 이미지를, 생강, 시나몬등으로 노란색과 갈색의 이미지를 입힌 뒤 밤계열의 가향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뚜껑을 열어서 향을 맡아보면 매우 스파이시한 향이 치고 올라온다. 패키지 디자인은 단풍놀이인데 향은 뭐 본격 크리스마스다. 굉장히 당황스럽고 이거 그냥 짜이 아닌가 싶은 찰나에 살짝 달달한 향이 함께 느껴진다. 밀가루 냄새! 아까 설명에서 봤던 쿠키향이 난다. 구움과자의 달달한 향이 한번 스치고 가더니 그 뒤로는 희미하지만 분명한 존재감이 느껴진다. 섬세한 가향이다. 건엽을 덜어내니 예상대로 온갖 낙엽색이 들어있다. 포숑이 이런 색감으로 블랜딩을 하던가? 싶은 느낌이다. 가을 Stroll에 딱 맞는 이미지라서 보고 있자니 기분이 가을가을해진다.
하던 대로 6g의 찻잎을 끓는 물 300ml로 2.5분 우려낸다. 매콤한 향이 잔 밖으로 퍼져나간다. 생강의 쏘는듯한 매운 향이 날을 숨기고 카다멈, 시나몬과 함께 은은한 스파이스로 위장한 느낌이다. 한 모금 마셔봐도 입으로 넘어오는 차보다 코를 통해 후각을 두드리는 스파이스향이 훨씬 지배적이다. 이래서야 단풍이 아니라 크리스마스 아니겠나 싶다. 밀크티로 짜이느낌 나게 마셔야 할 것 같은 특징인데 감기에 좋을 것 같단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 절반쯤 마시고 나니까 어디서 자꾸 단맛이 나는 기분이다. 찻물이 실제로 달지는 않은데 이게 어디서 나는 단내일까 생각하다가 이 차가 마롱티 카테고리처럼 되어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밤과 생강이라는 키워드였지! 아까 건엽에서 맡았던 쿠키 같은 향에서 연결되는 달달한 향이라고 생각하니 납득이 됐다. 그러고 보니 약간은 마롱쿠키 같은 느낌이 희미하게 있다. 근데 마롱은 말 안 하면 전혀 모르겠는 정도. 솔직히 생강과 시나몬이 달달하게 잘 우러났다고 해도 믿겠을 정도의 연한 달달함과 향이다.
밀크티를 위해 좀 더 진하게 우려 본다. 11g을 약 200ml의 팔팔 끓는 물에 3분. 아주 찌인하게 우려내니까 오히려 스파이시한 느낌은 줄어들고 탕약스러운 향이 난다. 탕약의 묵직 달달한 향. 우유를 부어주자 이제야 다시 차의 영역으로 돌아오는 기분이다. 스트레이트가 짜이스러운 향이 났으니 당연히 밀크티로 어울리겠거니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진하게 우려냈음에도 스트레이트에 비해서 향은 확실히 약해졌고 생강이 강해서인지 우유에서 붕 뜨는 맛이 느껴진다. 짜이에서는 그 공간에 다채로운 향신료들이 들어와서 뭔가 채워주는 느낌이 드는데 이도저도 아닌 공간이 붕 뜨니까 오히려 생강의 흔적이 잡미처럼 느껴진다. 밀크팬에 짜이식으로 끓이니 그나마 좀 낫긴 한데 회감이 돌듯 달달하게 향이 나는 매력이 다 사라져 버리는 건 마찬가지다. 짜이라고 하기엔 너무 연하고 차맛을 온전히 느끼기엔 또 생강향이 강해서 우유에서의 벨런스는 잘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생각 없이 초코초코한 다식들과 함께 하기엔 물론 좋았다. (돌려까기)
50g에 2000엔 수준이면 꽤나 비싼 편이고 아무래도 밀크티로 몇 번 마시려다 보면 소비속도도 빠른 편이라 체감 가격은 더 높아진다. 올해는 간이 배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퍽퍽 퍼마셨지만 총평을 하려니 아무래도 가격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가을은 이렇게나 매콤한가 생각했었는데 일본의 가을을 이메-지 했다고 하니 다시 또 알쏭달쏭이다. 밤이 없는 마롱티, 겨울 같은 가을차. 도대체 산책을 어딜 어떻게 헤맸길래 겨울이 되도록 집에를 못 가니. 이른 추위에 어울릴 것 같았던 포숑의 가을산책, 프롬나드 드오똔.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