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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식의 흐름 Jan 09. 2024

세 아이를 키웁니다.

절로 겸손해지는 예측불가 삼 남매 육아

 결혼을 하자마자 우리에게 찾아와 준 선물 같은 큰 딸을 임신하고 첫 출산을 경험하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낮 선 곳에서 외롭고 힘든 육아가 시작되었다. 딸은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지만 나 아닌 타인을 위한 24시간 365일의 삶은 꽤 나 버겁고 답답했다. 신랑은 이제 막 취업한 직장에서 고군분투하느라 야근이 잦았고 서울로 이직해 출퇴근 시간도 굉장히 길었다. 

나는 가정에서 아이와 온종일 시간을 보냈다.

 엄마로의 생활이 아주 조금씩 적응이 되어갈 무렵 첫째와 두 살 터울인 귀여운 둘째 딸을 출산했다. 

무던한 성격으로 잘 먹고 잘 자던 첫째와는 달리 둘째 딸은 입도 짧고 예민했다. 어른들 말씀처럼 둘째가 생기니 두 배로 힘든 게 아니라 세 배는 힘든 것 같았다. 밤마다 안았다 눕혔다를 반복하며 손목이 나가도록 토닥토닥해주다가 아이와 함께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이유식을 만드느라 내 밥 굶기는 다반사였고 그렇게 정성껏 만들어 주어도 놀리듯이 혓바닥으로 날름 뱉어내곤 했다. 

 산더미같이 쌓여가는 집안일과 씨름하고 있는데 이유 없이 징징대는 둘째를 보며 문득 ‘나도 어릴 때 저랬겠지? 우리 엄마도 참 힘들었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아이를 낳고 보니 타인의 삶이 조금씩 이해되어 갔다. 그렇게 철 들어가는 내 모습이 조금은 낮 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화장실 갈 시간도 거울을 볼 여유도 없이 아이 둘을 돌보느라 나의 24시간은 그냥 그렇게 순간 삭제되었다. 그래도 두 딸은 토끼같이 예뻐서 견딜 만했다. 요즘 엄마들은 직장맘 할래? 육아맘 할래? 하면 백이면 백 직장을 다닌다고 하는데 나는 육아가 나에게 꽤 잘 맞다고 생각했다.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보며 출퇴근 시간 지옥철을 견디는 것보다 내 가족 뒤치다꺼리하는 게 좀 답답한 건 있어도 더 마음 편한 나였다. 게다가 아이들이 크는 모습을 직관하는 것은 나에게 꽤 나 큰 기쁨이었고 얌전한 편이었던 두 딸은 그나마 내 일말의 품위는 지켜주었다. 막내 녀석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둘째의 돌잔치 날 부산에 계신 친정엄마가 올라오셔서 대뜸 물으셨다.

“내가 오늘 새벽에 태몽을 꾼 것 같은데 니 아니제?”

“엄마 무슨…! 끔찍한 말하지 마. 지금도 얼마나 힘든데.”

“그래 그럼 다행이고~ 둘째도 어린데 아니겠지! 그래 아니 여야지. “

 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극구 부인했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언젠가는 셋째를 낳고 싶다고 생각하긴 했어도 지금은 아니었다. 결코 지금은 아니었다. 그러나 엄마의 태몽은 정확히 내 것이 맞았고 그로부터 10개월 후 연년생으로 똘똘한 막내아들이 태어났다. 우리는 그렇게 5명의 완전체가 되었다. 결혼 전부터 삼 남매를 낳고 싶다고 줄곧 이야기했었는데 정말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너무 일찍 생긴 셋째라 두렵기도 했지만 기대가 되기도 했다. 저출산 시대에 얼마나 바람직한 일인가? 내가 대단한 사람은 못되어도 출산으로나마 국가에 이바지한다는 괜한 자부심마저 느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앞으로 다가올 칠흑과도 같은 어둠을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딸 딸 아들. 삼 남매는 금메달이라고 했던가? 파란색을 준비하라고 넌지시 알려주신 의사 선생님께 헹가래라도 쳐 드리고 싶었다. 

 21세기에 요즘 새댁이 웬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냐고 치부할진 모르겠지만 남편이 장남이라서 그런지 마음속으로 은근히 아들이었으면 하고 바랐다. 시부모님도 은근히 바라시던 눈치였는데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뻐하셨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우리에겐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첫째 둘째 때문에 조리원에서 일주일밖에 있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셋째는 출산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폐렴에 걸렸다. 연년생인 둘째도 고열로 밤잠을 설쳤다. 신생아라서 대학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는 소아과 의사 선생님 말씀에 아직 작디작은 아이를 끌어안고 나는 정신없이 대학병원으로 뛰어갔다. 출산할 때 하혈을 하는 바람에 내 몸도 많이 약해진 상태였는데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아이를 간호해야 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싸늘하게 느껴졌다. 출산으로 성치 않은 내 몸은 돌보지 못하고 아이가 잘못될까 두려워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아들을 돌보다 보니 결국 나에게는 온몸을 칼로 긋는 것과 같은 극심한 추위를 느끼는 산후풍과 함께 극도의 불안장애가 찾아왔다. 두 아이를 출산하고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고통. 워낙 밝은 성격이라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는 남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심각한 불안증세를 겪고 난 후 나는 심신이 모두 피폐해져 있었다.

 치료 끝에 셋째는 회복했지만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곧바로 쓰러지고 말았다. 근처 병원으로 가게 되었고 이 상태로는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 셋째는 서울에 계시는 시어머니께 맡겨졌다. 멈추지 않는 불안증세와 앞으로 아이를 기를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매일 아침 눈뜨는 것이 두려웠다. 창문을 꽁꽁 잠근 채로 아무리 옷을 많이 껴입고 이불을 두 겹 세 겹 덮어도 살을 에는 추위에 고통스러웠다. 몸이 정신을 지배하는 것인지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것인지 내 생활은 모두 엉망이 되어 버렸다. 깜깜한 터널 속에서 금방이라도 어둠이 내 숨통을 조여 오는 것 같았다. 죽음 외에는 이 불안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 것 같다는 끔찍한 생각이 매 순간 엄습했다. 

 그런 내 상황을 알게 된 이웃들은 정성껏 반찬도 해서 보내주고 두 딸을 데려가 봐주기도 하고 집에 찾아와 매일 손 붙잡고 기도도 해주었다. 나는 나를 위해 매일같이 기도해 주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우리 막내를 빨리 데려와서 내 손으로 안아보기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회복하고 싶다는 의지가 샘솟았다. 우리의 기도는 하늘에 닿았고 내 상태는 많이 호전되어 시댁에서 아들을 데려올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시간 들이었다. 

그러나 지나고 돌이켜 보니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더불어 살아가는 소중함도, 정신적인 아픔으로 고통받는 분들의 심정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을 것이다. 아이는 정말 혼자 키우는 것이 아니었다.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맞았다. 이 일을 계기로 나는 한 뼘 더 성장할 수 있었다. 

 지금은 5학년 3학년 2학년이 되어 매일같이 지지고 볶고 웃고 떠드는 삼 남매를 보면 왠지 모르게 감동적이고 감사하다. 출산과 육아는 생각보다 힘들고 고단한 여정이지만 자녀가 주는 기쁨과 행복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값지다. 육아가 힘들긴 참 힘들었어도 아마 세 아이를 낳은 건 세상에 태어나 내가 가장 잘한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각박하고 어두운 이 세상을 각자의 빛으로 아름답게 비춰나갈 나의 걸작품들! 

 아이들을 꿀 떨어지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면 옆에 있는 남편은 이야기한다.

“나 때문에 저렇게 이쁜 애들이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 잘해~!!.”

”으이그~~ 그래 뭐 그렇다 치자!”

“하하하하하하.” 이럴 때는 한 번 져주는 게 상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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