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의식의 흐름 Feb 22. 2024

불혹의 삶

마흔을 넘기고 보니...

20대 초반에 내 시선에서는 삼십 대 후반 직장 선배 언니들은 정말 어른 같았다.

세상을 다 알 것 같고 남자를 다 알 것 같고 왠지 뭐든 다 너그럽게 품을 수 있는 거목 같은 느낌이라고나 할까? 당시 서른넷 정도 되었던 고연봉의 골스미스인 한선배 언니는 나의 생일에 값비싼 아이크림을 선물하며 'oo아! 스무 살부턴 아이크림과 영어 이 두 가지는 절대 놓지 마! 그리고 넌 아직 어리니까 여기에 머물지 말고 진짜 하고 싶은 게 생기면 미련 없이 떠나!'라고 했다.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질적인 조언이었기에  어리고 순진한 나는 언니의 조언을 마음깊이 새겼던 것 같다.


나의 30 대란 육아로 영 혼 육을 갈아 넣었어야 했기에

아이크림은 귀차니즘에 항복하고 손에서 놓아버린 지 오래였고, 아이들을 씻긴 후 발라준 대용량 크림을 급하게 내 얼굴에도 발라 주는 게 전부였으며 영어는 혀가 굳은 건지 뇌가 굳어버린 건지 돌아서면 까먹어 버리는 기억력에 스스로 좌절하다가 동시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는 휴대폰이 나왔고 통역어플이 잘 되어있는 인공지능 시대이니 굳이 공부할 필요 없을 거야 하며 자기 합리화를 한다. 하고 싶은 걸 하겠다고 과감히 퇴사를 결정하고 호기롭게 회사를 떠났지만 꿈은 이루지 못한 채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여전히 작은 일에 화를 내고 언제나 감정조절에 실패한다. 삼십 대 후반의 나도 여전히 참 어리고 미성숙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여고생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나 할까? 나이가 주는 중후함이나 노련미는 여전히 나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듯하다.


마흔이 되기 전 39세 가을의 나는 좀 이상했었다.

그저 숫자에 불과하고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오늘이었을 테지만 인간이 규정해 놓은 나이라는 테두리와 가을의 서늘함이 묘하게 버무려져 뭔가 아주 많이 쓸쓸하고 헛헛했다.

내가 왜 이러지? 정말 아줌마가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빼박 마흔 넘은 아줌마.

스물아홉 살이 되면서부터 나는 이미 출산한 아줌마가 되어있었고 노화는 이미 스무 살 때부터 시작된다고들 하는데 새삼스레 진짜 늙어간다는 강력한 느낌을 받았다. 미혹되지 않는 불혹이 마흔이라는데 나는 여전히 인터넷쇼핑과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끌려다니기 일쑤인 미혹 그 자체의 삶을 사는 듯했다. 삼 남매 말고는 이루어 놓은 것 하나 없는 것 같았고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 강력히 몰려왔다. 불혹의 다른 이름은 불안이 아닐까? 싶을 만큼…


몸이 항상 찌뿌둥해서 큰맘 먹고 필라테스를 시작했는데 내 체력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운동신경이 그렇게 없는 사람은 아닌데 숨도 너무 급격히 차오르고 근력이 1도 없는 듯했다. 내 몸도 마음도 맘에 들지 않는다며 애꿎은 신랑에게 신세한탄을 해댔고, 가을 감성의 노래를 찾아 들으며 청승 아닌 청승을 떨었다. 시시때때로 상념에 사로잡혀 눈물이 주룩 흘렀고 우울증인가갱년기가 일찍 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래서 20대 때를 떠올리며 십여 년 만에 록페스티벌도 가고 안 하던 쇼핑도 해보며 여러 가지로 내 헛헛함을 해결하고자 용을 써보았다.


그렇게 39세의 가을과 겨울을 보내고 마흔이 되자마자 신년부터 이름도 생소한 메니에르라는 질병이 나를 찾아왔다.

면역력문제가 가장 큰 요인이라는데 하여간 나는 작년 1년간 이 어지럼증을 동반한 불쾌한 녀석과 매일같이 씨름해야 했다. 더 큰 병들로 고생하시는 분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내 질병은 그저 소소한 것일지 모르나 그래서 아프다 아프다 이야기하기도 죄송스럽지만 나에게는 꽤나 힘든 시간들이었다.

마흔 즈음 다들 한 번씩 몸이 아프다던데 정말 그런 걸까? 그렇게 이 몹쓸 녀석은 내 일상을 꽤 어지럽혀 놓았다. 그동안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들이 더는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여행도 쉽게 갈 수 없었고 매일 먹는 밥도 모래알 같이 느껴졌다. 어지러움 때문에 운동도 할 수 없었고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졌다. 나에게 진정한 자유가 사라진 것만 같았다. 이 상황만 벗어나면 참 감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수시로 찾았고 약을 계속 먹어도 차도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불청객으로 찾아와 나를 괴롭혀왔던 어지럼증으로 인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불혹 증후군?! 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어지럼증과 고군분투하는 동안 그런 일련의 감정들은 다 사치처럼 느껴졌고 그런 감정들에게 놀아날 정신이 없었다. 그저 이 어지럼증만 깨끗이 사라져 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오직 한 가지의 바람만 남게 되었다.


마흔 하나가 된 올해 나는 몸도 이전보다 많이 나아졌고 언제 우울했냐는 듯 새로워졌다. 제2의 인생을 시작해보고 싶다는 꽤나 거창한 각오가 생기고 새로운 일을 시작해 볼 용기가 마구마구 샘솟는다.

작년부터 마음속에 간직해 왔던 글도 쓰기 시작했고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음과 양, 득과 실, 일장 일단이 있다. 아픔도 때로는 성숙의 기회가 되고 적절한 자기비판과 스스로에 대한 불만족은 오히려 더 나은 내가 되고 싶다는 동기를  발현시켜 주는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꿈을 이루고, 하고자 하는 일을 성취하는 것에는 정해진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불혹에 찾아온 불청객은 나에게 잊고 있던 자유로움에 대한 감사와 정체성을 선물해 주었다.

그 시기를 잘 견디고 새롭게 태어날 나의 인생 2막을 스스로 응원하며 기대해 본다.

어제는 갑자기 한 살 연하의 신랑이 말했다."나 마흔이 되니까 좀 기분이 이상해. 나는 전혀 안 그럴 줄 알았는데 거울을 볼 때마다 폭삭 늙은 것 같아. 나도 자기가 말한 불혹증후군인가? " 나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던 신랑이 이제 내가 겪은 그 감정을 느끼는 듯했다. "그래 사람은 누구든 겪어봐야 그 사람의 심정을 아는 거지~ 내가 먼저 겪은 선배니까 도와줄게! 힘내자 이 또한 다 지나가니까!"


작가의 이전글 엄마와 딸(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