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걸음
2월의 마지막날이라 그런지 바깥공기가 여전히 차다. 개강식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 7시에 집을 나섰다. 집에서 서울대학교까지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고 강의실까지 도착하는데 거의 두 시간이 걸렸다. 서울대학교 정문을 들어서서 캠퍼스를 걸어 강의실까지 도착하는 10분이, 고등학생 때 못 이룬 꿈을 나이 50이 넘어서야 살짝 맛보는 느낌이랄까?
회사에서 장기위탁교육의 기회를 얻어,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진행하는 공공리더십 과정이란 교육프로그램을 10개월간 참여하게 되었다. 27년간 직장 생활하느라 고생했다고 내가 나에게 주는 안식년 같은 기회.
수업은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라, 매주 금토일 3일간은 꿀 같은 연휴이다. 어렵게 얻은 기회이니만큼 이 기회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기 위해, 주중에는 열심히 서울대 캠퍼스 생활을 즐기고, 주말에는 혼자 여행을 떠나기로 작정했다. 내가 가장 애정하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내가 카메라와 인연을 맺은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이다. 학기 초 우연한 기회에 고3선배에게 픽업되어 가입하게 된 사진부가 그 시작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나의 취미생활이 운 좋게 군대 보직으로까지 이어져 미 8군에서 카투사들을 위한 신문을 만드는 기자로 근무하게 되어, 2년 동안 내내 총 대신 카메라를 끼고 살았다.
물론 그때는 흑백사진이라 내가 직접 암실에서 필름 현상과 사진 인화를 손수 했었다. 고등학교 사진반에서도 직접 암실 작업들을 했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낯설지 않았고 선임들로부터 이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군 생활을 나름 재미있고 보람되게 보내고 제대해서도 나의 주특기는 순수 취미생활로 그 후로도 쭈욱 이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롯데그룹에 공채로 입사하여 호텔롯데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처음 배치받은 부서가 면세점이라는 곳이었다.
지금은 해외여행이 워낙 자유롭고 문턱이 낮아져서 많은 사람들이 자주 해외여행을 즐기지만 80년대 후반만 해도 해외여행 자유화가 풀린 지 얼마 되지 않아 해외여행을 다니는 사람이 적었고 더더구나 대학을 막 졸업한 나는 해외여행 경험이 전무한 터라 '면세점'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몰랐다.
신입사원 현장교육을 받으면서, 이곳이 해외로 여행을 하는 국내외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수입명품들을 판매하는 명품백화점이라는 설명과 함께, 입점해 있는 수많은 명품들을 실물영접할 수 있는 귀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이름도 생소한 루이뷔통, 에르메스, 샤넬 등 수백 개의 명품 브랜드의 이름과 히스토리, 제품 구성, 제품의 디자인과 특징 등 정말 공부해야 될 것들이 많은 신입사원 시절을 그렇게 화려하게(?) 보냈다.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 내가 왜 면세점에 배치되었는지도 서서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롯데면세점에서의 다사다난했던 10년간의 세월과 그 후에 회사를 옮겨 근무했던 한국관광공사 면세점에서의 4년, 그리고 우연히 내 품으로 찾아온, 설렘과 두려움이 공존했던 기회...
제주도에 국내여행객들을 위한 면세점이 최초로 개점하는데 그 준비팀에 합류해 달라는 스카우트 제안. (아내의 말로는 내가 그 제안내용을 설명하면서 엄청 설레고 들떠했다고 한다)
롯데면세점과 관광공사 면세점을 거치면서 내가 개점프로젝트와 리뉴얼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개점, 재개점한 면세점만 7~8개가 되다 보니 그 경험을 인정받아서 얻게 된 스카우트 기회.
오롯이 내가 처음부터 참여하여 만드는 한국 최초의 면세점이란 타이틀이 주는 두려움과 설렘, 앞으로 이직하지 않는 한 계속 제주도에서 살아야 한다는 전제가 딸린 근무조건, 어쩌면 가족과 떨어져 기러기 아빠 생활을 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지만 나에게는 역시 설렘이 너무 컸었나 보다.
그렇게 시작된 제주도에서의 직장생활, 그리고 드디어 200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대단원의 문을 연 한국 최초의 내국인면세점인 JDC면세점(JDC면세점은 제주공항 국내선 대합실에 본점, 제주항에 분점 2개로 시작)이 세상에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