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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경험하는 공항은 일부에 불과하다 - 9

"Are you a VIP?"

현대사회에서 비행기만큼 계급이 잘 보이는 공간이 있을까?

요즘 세상에 백화점이든, 온라인 쇼핑몰이든 등급을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항공사의 등급제도야 말로 직설적이고 적나라하다. 아마도 밀폐된, 한정된 공에서 모두가 인지할 만큼 명확하게 티가 나기 때문일 것이다.

"손님, (일반석은) 비행기 뒤쪽 칸 화장실을 이용하여 주십시오."
"손님, 해당 음식은 퍼스트에만 제공됩니다."
"아아, 탑승을 시작합니다! 비즈니스 승객은 별도의 통로로 탑승하여 주십시오."
"회장님! 지점장인 제가 게이트까지 모시겠습니다. 아드님 결혼 뉴스에서 보았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잘 알다시피, 항공사를 자주 이용하는 우수회원, 또는 VIP 들에게는 별도의 체크인, 휴식, 대기공간이 제공되며, 탑승/하기 순서도 1순위이다. 심지어 기내 화장실에서 쓰는 손비누의 브랜드마저 다르다는 치사스럽지만 냉혹한 현실. 모든 승객은 누가 일반 승객인지 아닌지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일전에 한번 출장 차 해외 갔다 돌아오는 공항에서 의 일이다. 당시 잠도 못 자고 너무 피곤해서 마스크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아이고 XX님(내 이름) 왜 줄 서고 계세요, 얼른 나오세요" 하고 날 잡아끄는 게 아닌가. 안면이 없던 그 공항 지점장님이었다. 그때 난 고작 책임급 직원이었을 뿐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쨌든 나름 공항 본부의 최상위팀 직원이 해외로 나왔다는 소문에 편의를 봐주고 싶으셨다 보다. (우리 팀 팀장님의 영향력이 공항에서 막강할 시절이었다) 극진히 끌려 나올 때(!)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며 옆 사람의 말을 듣게 되었다.

대한항공 퍼스트클래스 체크인 공간. 아무나 못들어간다. 살아생전 손님으로 들어가 볼 수 있겠지..

"오빠 저 사람 되게 높은(?) 사람인가 봐. 직원이 직접 데려가네? 뭐지?" 무언가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고 싶었지만 동시에 묘한 우월감이 드는 희한한 기분이었다. 이런 게 바로 인간의 인정욕구일까? 이런 욕구들이 쌓여 사람들이 모닝캄(대한항공 우수회원)이 되고 다이아몬드 플러스(아시아나 우수회원)에 목매다는 거 아니겠는가?


사실 요즘시대에 우수회원은 너무나도 많아 직원들이 손님 얼굴을 기억하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국내공항은 특성상 손님들이 비행기를 기차처럼 자주 이용하기 때문에 가족같이 카운터 직원들과 안면을 트고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들 한다. 모 지방공항 직원은 시내 나이트에서 부킹 한 아저씨가 며칠 전에 본인이 응대한 우수회원이었다는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을 정도.

또 항공사는 특히 전담팀(파트)이 있을 정도로 VIP승객 응대에 공을 들이는데 여기서 VIP는 단순히 비행기를 많이 탄 우수회원이 아니다. 보통 국회의원, 기업가, 연예인, 저명한 사회인사 등이다. 예로부터 VIP 응대 직원은 용모가 우수한 (소위 말해, 잘생기고 이쁘고 우아하고 고상한) 직원들로 차출되었으며, 그들의 최우선적인, 필수 능력은 바로 "입 조심"이었다. VIP 승객이 나오는 날이면, 이미 며칠 전부터 승객 명단이 공항에 전달되고, 관련 팀은 "빡세게" 브리핑을 한다.

"회장님 최근에 XX회사랑 법정 공방 중이니 그쪽 방향으론 대화 금지 "
"사장님 최근 따님 결혼식 있었으니 관련 내용으로 안부 인사"
"이사님 사업확장으로 출국하시니 관련 주제 나오면 응대가능하게 관련 뉴스, 상식 습득"
"최근 의원님 자녀 사생활 이슈 루머 있으니 자녀 관련 대화 지양" 등등.


공부할 것도, 할 말도, 하지 말아야 할 말도 얼마나 많은지 어휴. 립스틱도 제대로 안 바르고, 목젖이 보이도록 호탕하게 웃는, 승객들을 반존대응대하는 수더분한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그런 나에게도 시련이 찾아오게 되었으니, 그것은 바로 일본 소도시 출장에서의 VIP 등장...! 두둥.

이런 작은 공항에 대체 왜 오시는 거에요 VIP님들..!

번화한 도쿄나 오사카도 아니고, 일본의 작은 소도시에 VIP가 올 것이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첫 오퍼레이션 출장으로 가뜩이나 긴장한 나에게  X월 X일, 그것도 설상가상으로 2팀의 VIP가 동시 같은 비행기 탑승 예정이니 신중히 응대하라는 본사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과연 어떻게 그들을 맞이하였을지.. 투비컨티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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