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에 보이는 거 쫒으며 살기도 벅차다.
신애는 종교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 아들 준이를 죽인 살인범 면회를 간다. 하나님을 알려주고 자신이 직접 용서하여 주기 위해서.
그런데 문제는 그 찢어 죽일 새끼에게도 하나님이 있다는 거다. "하나님이 이 죄 많은 놈한테 손 내밀어 주시고, 그 앞에 엎드려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고,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원수는 성자聖者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약국 집사님이 말씀하시길 하나님의 모든 것에는 그 뜻이 있다던데, 이런 경우는 무엇인가. 아들 준이의 죽음을 통해 자신 외에도 살인자마저도 구원하려 드신 건가. 그런데 자신이 용서하기 전에 용서를 해버리는 건 무슨 경우인가.
그 이후로 신애는 무너진다. "보고 있냐, 보고 있냐고." 그녀는 하늘과 맞선다. 도둑질을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회에서 그것이 거짓임을 음악을 통해 말한다.
그러나 그녀가 유혹한 신자는 하늘 아래에서 그녀를 범하지 못한다. 거짓이라고 고래고래 외치는 노래 앞에서도 오히려 목소리 높여 함께 기도한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자신의 동맥을 긋는 것. 스스로를 파괴하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자살시도 이후 그녀가 정신병원에서 퇴원할 때 한 미용실에 들른다. 그곳에서 미용사로 일하는 살인자의 딸을 만난다. 그 아이는 학교도 그만두고 소년원도 다녀왔다.
그 아이의 눈이 죄스러움에 붉어진다. 신애는 눈을 감을 것 밖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아이가 그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치르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일까.
종찬은 딱 드러나기에도 속물이다. 넉살도 좋고 발도 넓다. 신애 외의 여자, 다방을 대하는 행동에 교양이란 티끌만큼도 없는 남자다. 그런 종찬을 신애는 속물적이라 칭한다.
그런데 영화에서 드러나기에 속물력(?)으로 신애는 절대 뒤쳐지지 않는다. 종찬이 준 가짜 상을 학원에 걸어두고 동생에겐 그 상으로 거짓말도 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자신이 보고 있는 땅이나 이제 막 알게 된 회장님의 이름을 들먹인다.
그게 납치의 빌미가 될지도 모른 채. 그렇게 파멸은 속물성에서 비롯되었다. 납치범이 금전 때문에 신애의 아들을 납치 및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선 놀랍게도 구원 또한 속물성에 있다. 신애가 하나님의 자식들을 욕보이려 여러 시도를 했던 날. 마지막 타깃은 종찬이었다.
그러나 그때 종찬은 처음 그녀에게 분노를 보인다. 무슨 짓이냐고. 그 미친짓 퍼레이드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렇게 종찬은 신애의 파멸을 막았다.
그뿐인가. 그녀가 밀양에 온 순간부터 정신병원에서 퇴원할 때까지도 함께 있던 것은 종찬이고 그녀를 위해 거울을 살며시 들어주는 것도 종찬이다. 종찬은 언제나 그녀를 탐하며 곁을 지켰다. 그는 성인도 성자도 아니다. 속물이다.
햇빛이 그의 미소 위에 걸려있다.
근데 속물이란 거 되는 게 대단히 어려운가? 우리 모두 속세에 산다. 그러니 세속적인 사람이고 속된 인간이다. 또 속사에 마음이 이끌리니.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물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웃 모두를 사랑하지 못한다. 뒤에서 가끔 욕도 해주고 화도 내며 적당히 웃고 배려도 한다. 그러므로 사람 곁에는 항상 사람이 있다. 천지와 온갖 규제 속에 뒤엉켜 살아가고 어쩌면 만물에 깃든 하나님의 사랑을 공유하는 대상은 사람대 사람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비밀스러운 햇빛은 직접적인 구원이 될 수 없다.
그러니 하늘에서 눈을 내려 이 땅에 굳건히 두 발로 서있는 존재를 보라. 그 비밀스러운 햇빛을 온몸에 받으며 당신의 주변을 맴도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건 이웃이기도 이웃은 우리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직접적인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게 영화가 종교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이 말하길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하고 일하신다. 그는 구원의 도구로써 사람을 이용하신다. 움직임의 주체가 자신이든 하나님이든 주변에 서있는 그 사람이 구원의 주체라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