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연말 회고
올해 있었던 가장 큰 사건이라면 아이의 탄생이다. 7월 이후 아이가 삶의 중심이 됐다. 올해 12월까지 육아휴직을 선택한 덕에 아이와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기저귀 갈기, 분유 타기, 목욕시키기 등이 제법 손에 익었다. 아이와 함께 웃으며 적게 힘들고(아마도..?), 많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울 정도다.
육아휴직을 한 덕에 하반기는 일을 쉬었다. 회사에 입사하고 9년 정도 일을 했는데, 이렇게 길게 일을 쉬어본 적은 처음이다. 처음에는 어색했는데 복귀 시점이 다음 달로 성큼 다가왔다. 지금은 일하고 싶은 마음 반 아이랑 시간을 더 보내고 싶은 마음 반이다.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라도 다시 내년부터는 열심히 일 해야 하지만.
휴직 전까지의 상반기만 놓고 보면 전체적인 업무 몰입도가 낮았다. 휴직 직전인 6월의 어느 날 일기를 보니 이렇게 적어두었다.
"요즘은 공회전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는다. 시동은 걸어두었지만 제 자리에서 바퀴가 헛돌고 있다. 앞으로는 나아가지 못한 채 서있는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 과정에서 마음은 공허해진다."
올해 상반기만 놓고 보면 업무 진전감이 꽝이었다. 흔히 말하는 삽질하는 경우가 많았다. 팀 외부적/내부적 문제가 겹쳤다. 모든 문제를 나 바깥에서 찾고 싶지는 않다. 개인적인 문제도 있었다. 회고를 통해 좀 더 딥하게 들여다봐야 할 부분이다.
①외부적 요인
1)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업무에 있어 매니저에게 내 의견이 잘 반영되지 않았다. 어떤 프로젝트를 할 때는 의욕이 없어서 그저 매니저가 시키는 대로만 했다. 하지만 이렇게 하다가는 나한테도 남는 게 없겠다는 생각에 그다음 프로젝트를 할 때는 충돌을 감수하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이야기했다. 여러 번 충돌한 끝에 겨우 의견이 하나 반영되고, 대다수 의견은 반영이 안 되고, 이런 흐름이 이어졌다.
매니저 의견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면 '그래, 내가 틀렸구나'하고 생각을 고쳐먹었겠지만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안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나도 점점 지쳐갔고 매니저에 대한 신뢰도 사라졌다.
2) 업무의 결과물이 바로 눈에 보이지 않았다
기획 업무의 특성상 프로젝트의 범위가 넓다. 또한 조직에 큰 변화를 일으키거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 많다. 조직에 영향도가 큰 일들이다 보니 경영진 보고를 통과하기도 어렵고, 통과해도 실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실무자 입장에서는 기획부터 실행까지 간격이 너무 길었다. 업무를 하면 눈에 보이는 변화까지 보여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데 업무 특성상 그게 힘들었다.
3) 일이 잘 부러지지 않았다
일의 결과물이 바로 보이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그 결과물까지 가는 과정이 원활하지 않았다. 아예 프로젝트가 2-3주씩 멈추거나, 조직 내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 되어서 간단한 일이 몇 주씩 걸렸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프로젝트일수록 중간의 각 단계가 하나씩 잘 부러져야 한다. 그래야만 전체 스케줄이 잘 지켜지는 것도 있지만, 실무자가 진전감, 진척감을 가져야만 일을 하는 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 이 부분이 잘 안 되었다.
②내부적 요인
1) 일에 대한 주도권을 스스로 포기했다
일을 할 때 마음가짐이 느슨했다. '그냥 매니저가 시키는 대로만 해야지'가 올해의 디폴트 마인드셋이었다. 물론 중간에 각성한 적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기조가 그랬다. 이게 뭐가 문제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일하면 일하면 일단 재미가 없다. 개인적으로 배우는 것도 적다. 올해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그냥 대충 쉬어가자 같은 마인드였다.
여러 조건들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핑계 대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 그 정도로만 일하기로 선택한 것이다. 여러 악조건이 있어도 뚫고 나갈 만큼 일에 대한 애착이 크지 않았다. 이 일을 내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고 싶다는 간절함이 크지 않았다. 울고 싶은 데 빰 때려준 격이라고 해야 할까. 마침 일에 대한 동력도 크지 않은데 상황이 이러니 옳다구나 하고 마음을 내려놓았다.
2) 역량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개별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속속들이 꿰뚫을 만큼 역량이 있었다면 쉽게 주도권을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 모르는 빈 영역들이 많았고, 내가 주도하고 싶다면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더 노력해야 했다. 하지만 빈 공간을 채워가며 프로젝트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만큼의 에너지가 없었다. 프로젝트의 주요 내용을 속속들이 알았다면 더 적은 에너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더 적은 에너지가 필요했다면 좀 더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지 않았을까.
3) 일이 개인적인 가치관과 맞지 않았다
올해 인재개발 파트 부장님이 나에게 물었다. "인재개발, 조직문화, 인사 업무 다 해보니까 어느 쪽이 가장 잘 맞아요? 다 해본 사람은 프로님 밖에 없잖아요?" 순간적으로 지금 하고 있는 인사 업무라고 말을 못 했다. 사실 인사 업무를 하며(정확히는 인사 기획) 전에 하던 일보다는 잘 맞지 않다고 느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가 내가 일에 관해 가진 기본 가치관이다. 조직문화 업무는 구성원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된다고 느꼈다. 그래서 신나게 일했다. 하지만 인사 업무는 결이 다를 때가 있었다. 조직에는 좋지만 구성원에게는 좋지 않을 수 있는 일도 있었다.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입장이 충돌하는 프로젝트를 할 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물론 모두에게 좋은 소리를 듣는 일만 할 수는 없다. 회사 발전에 필요하다면 욕을 먹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그런 일을 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 당장 이 일이 조직에 필요한지 스스로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구성원들에게 필요하다고 말해야 할 때, 그럴 때 마음이 소진됐다.
①외부적 요인 : 부서/업무를 바꾼다
가능하다면 주변 환경을 바꿔 볼 생각이다. HR 파트 안에서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일과 부서가 있다. 조금 더 호흡이 짧고, 결과물이 바로 나올 수 있는 업무를 할 생각이다. 최근 2년 간 호흡이 길고, 결과물이 늦게 나오는 일을 주로 했다. 이런 종류의 일에서 분명히 배울 수 있는 점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좀 다른 일을 해야 할 때다.
②내부적 요인 : 오너십을 잊지 않고 역량을 축적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든다
'오너십', '주도권' 같은 단어들을 내년에는 잊지 않고 일하려고 한다. 사실 인사 파트로 오고 선배들이 많다 보니 심적으로 그들을 의지했다. 분명히 좋은 점도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후배 포지션에 위치시킴으로써 업무를 주도적으로 하지 못했다. 조직문화팀에 있을 때는 의지할 수 있는 선배가 없었고, 절박하게 일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장 크게 성장했다. 인사 파트에서도 그런 성장이 필요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동안 했던 업무에 대한 자발적인 공부이다. 자료를 찾아보고, 그걸 글로 정리해서, 나만의 기반을 쌓는 과정이 부족했다. 최소한 진행했던 프로젝트에 대한 회고라도 했었어야 하는데 그조차 하지 않았다. 시간이 없었다기보다는 업무에 대한 몰입감이 부족했던 탓이다. 내년에는 프로젝트가 끝나면 꼭 회고글이라도 하나씩 작성해야겠다.
"본진에서의 깊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고, 호오를 바탕으로 지속 가능한 과업을 찾으며, 숙련을 바탕으로 시간의 부가가치를 끌어올리는 과정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서 시작한 질문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송길영, <시대예보: 호명사회>
내년이면 일을 시작한 지 10년 차가 된다. 커리어 초반, 한 분야에서 10년 정도 일하면 꽤 프로페셔널하게 일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막상 그 시기가 가까워지고 있지만 여전히 허우적거리고 있다. 인사 파트는 여전히 빈 공간이 많다. 특히 노무는 시험으로 치면 낙제점이다. 차근차근 보완할 부분이 많다.
핑계를 대자면 그동안 HR 안에서 분야를 계속 확장했다. 인재개발, 조직문화, 인사기획으로 계속 커리어를 확장했다. "우리 회사에서 HR 전 분야를 겪어본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라고 나름 (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포지셔닝을 하고 있다. 여러 부서를 오간 경험이 나중에 쓰일 일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자주 부서가 바뀌어서 새로운 분야를 따라잡느라 가랑이가 찢어지고 헉헉 거리고 있지만...
HR 분야에서 나는 얼마나 깊어지고 있는가?
<시대예보 : 호명사회>를 읽다가 들었던 질문이다. 단순히 업무를 하는 것만으로 깊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일을 해도 주도권을 가지고 깊게 고민해서 해야 내 것이 된다. 24년에는 이런 자세가 많이 부족했다. 25년 연말회고 때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년에는 좀 더 깊게 일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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