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단상(斷想): 런던에서 (3)
202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저녁이다. 24일과 25일에 운영하는 가게들이 없기 때문에 도시 전체가 적적한 느낌이다. 12월 내내 여기저기 연말 분위기로 한껏 들뜬 모습을 하다 막상 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그 어떤 곳도 갈 수 없다는 것이 모순적이고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올해는 기차 파업까지 겹쳐 집 앞을 지나는 기차도 운행을 멈췄다. 덕분에 매우 고요한 휴일을 보낼 수 있었다.
그동안 런던에서 여러 차례 연말을 맞이하는 동안 가족이 없는 나를 챙겨주는 친구들이 몇몇 있었다. 이맘때마다 운 좋게 영국 친구들의 가족 모임에 초대되어 함께 하곤 했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모임을 지양하게 되면서 이번 연휴에는 딱히 계획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더군다나 이틀 전 독감에 걸리는 바람에 사람을 만나기 꺼려졌다. 오늘도 특별한 것 없이 집에서 보내는 평범한 하루가 되겠다고 생각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려 하는데 어디선가 굵직한 현악기의 선율이 들려온다. 밖을 내다보니 기찻길 아래 몇몇 아치(Arch)에서 불빛이 새어 나올 뿐, 인적은 없다. 소리는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아치에서 들려왔다. 누군가 그 밑에서 연주를 하는 것이다. 창문에서 내려다보는 각도가 애매하여 아치 밑의 연주자는 보이지 않는다.
바이올린이다! 둥그렇고 단단한 벽돌 아치가 어느 콘서트홀의 천장으로 변모하며 조용한 거리에 아름다운 소리가 울려 퍼진다.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인적 없는 동네,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기찻길 아래 아치는 어쩌면 굉장한 음향시설을 갖췄는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연주자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가 무척이나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길거리 공연을 하는 것일까? 그러기에는 동네가 너무 외지고 오늘은 이곳을 지나는 이가 없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이 텅 빈 곳에서 누가 이토록 낭만적인 행위를 하는 걸까? 외로운 이일까, 꿈꾸는 자일까? 타지에서 음악을 공부하는 외국에서 온 유학생일까? 연휴에 학교는 닫고 집은 방음이 되지 않아 연습하러 나온 것일까?
이런저런 상상을 펼치며 창가에 기대어 넋 놓고 연주를 듣는다. 연주는 황홀했고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차가워 보일 정도로 삭막한 풍경에 이런 음악이라니, 이질적이지만 근사하다. 산타를 믿기에는 너무도 많이 커버린 지금, 오랜만에 예기치 못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느낌에 마음이 설레었다. 밑으로 내려가 보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눌러 담았다. 언제든 낭만적인 것을 찾고 싶을 때, 편안하게 떠올릴 수 있는 장면으로 오랫동안 간직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무계획 여행을 하며 때때로 예기치 못하게 맞이하는 사건들이 결국가장 진한 추억으로 남을 때가 많다. 기찻길 아래의 어느 미스터리한 연주자는 연휴에 칩거하는 독감 걸린 한 여자를 매우 특별한 여행자로 만들어주었다. 외롭고 고독한 곳에서 조용히 꿈꾸는 자들에게 들려오는 겨울밤의 바이올린 연주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다가오는 새해에는 어떤 여행이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