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단상(斷想): 런던에서 (2)
2022년 12월 22일
오후 세 시면 해가 지는 계절이 돌아왔다. 늦게 떠오르는 해와 금세 찾아오는 어둠이 겨울을 보내는 자의 마음을 더욱 춥게 만든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고 했던가? 겨울에는 일찍 일어나는 자가 일찍이 어둠을 맛본다. 거실에 나가 차를 끓이고 한참이 지나면 서서히 동이 튼다. 이른 새벽인 것처럼 보여 시간을 확인하면 벌써 오전 9시다. 해가 뜨고 날이 밝아도 이곳의 흐린 날씨 덕에 쨍한 햇빛을 보는 일이 드물다. 그래도 작업실로 걸어가는 동안에는 조금이나마 광합성을 할 수 있다. 걸음을 재촉하며 재빨리 마스크를 벗고 아침 공기를 들이마신다. 차갑게 상쾌하다.
그렇게 30여 분을 걸으면 나의 오랜 아지트에 다다른다. 2014년 졸업 직후부터 지금껏 쭉 함께 하고 있는 이곳은 런던 남부 스톡웰(Stockwell)에 위치한 나의 런던 작업실이다. 가로로 길게 난 창문을 통해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목 정도까지 보이는, 아주 적은 양의 채광을 지닌 이곳에서 나는 올해도 겨울을 난다. 아쉬운 창문 덕에 작업실에 머무는 동안엔 햇빛을 보기 더더욱 어려워진다. 벌써 이렇게 어두워졌다고? 쨍한 형광등 불빛을 벗 삼아 의지하다 퇴근길에 불을 끄고 건물 밖으로 나오면서 내가 매번 하게 되는 말이다. 지하의 형광등은 간혹 시간 감각을 무디게 한다.
발치에 두면 미세하게 온기가 전달되는 작은 라디에이터를 켜고 작업실을 청소한다. 어젯밤 어찌나 난동을 부리며 작업을 한 건 지, 여기저기 널려 있는 거즈를 치우고 몇몇 붓에 아직도 묻어 있는 물감들을 세척하고, 미세하게 홍차 자욱이 남아있는 머그잔을 씻는다.
옆방에서 작업하는 친구가 따뜻한 홍차에 우유를 조금 타서 건넨다. 매번 나의 음료를 챙겨주는 고마운 친구다. 작업실 냉기에 금세 식어버릴까 뜨거운 차를 급하게 들이켠다. 속에 불이 나는 것 같다.
오후 다섯 시쯤 되었을까? 좁다란 창문을 올려다보니 땅거미가 내려앉은 지 좀 된 것 같다. 바깥의 어두움이 오늘따라 더 진하고 탁하다. 그 누구 와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음악도 듣지 않은 채 그림 앞에 붙들린 시간이 꽤 지났다는 걸 깨닫는다. 바깥의 바람 소리가 거세지고 비가 조금씩 오는 오늘 같은 날엔 일찍 집에 갈 채비를 한다.
작업실 문을 잠그고 나서는 순간 맡게 되는 시퍼런 겨울 향기에 온몸에 한기가 돈다. 드문드문 불이 켜진 벽돌집의 창문들을 바라보며 집으로 향한다. 가지런히 나열된 창문은 퍼런 바깥공기와 무척이나 대조되는 백열등 색을 발산하고 있다. 그 중 갖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 놓아 화려해 보이는 누군가의 창가를 올려다본다. 런던 시내는 말할 것도 없고 이 조용한 주택가마저 연말 분위기를 잔뜩 뿜어낸다. 마치 성냥팔이 소녀가 된 양 장갑을 잊은 손을 주머니 안으로 찔러 넣고 발걸음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