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의 단상(斷想): 런던에서 (1)
2022년 12월 12일
런던에 눈이 내렸다. 올해 첫눈이다. 진눈깨비 같은 눈이 흩뿌려지기 시작하면서 창 밖은 희뿌연 안개를 머금은 듯 서서히 불투명한 막을 드리웠다.
오래전, 학교 가는 버스에서 영국 친구가 해 준 말이 떠올랐다. 이곳사람들은 겨울이 되면 마치 자신들이 런치 박스 (lunch box) 안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고 했다. 런치 박스가 무슨 말인가 했더니 여분의 음식이나 도시락을 담아 다니는 반투명한 플라스틱 통을 말하는 것이었다. 친구의 말을 들으며 바라본 버스 차창은 수증기로 뿌옇고, 손으로 동그랗게 문지르니 보이는 바깥의 풍경은 허옇고 차가웠다. 말 그대로 도시락통에 담겨 바깥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지금 모두 도시락 통 안에 살고 있다는 거야?”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기억하는 겨울의 런던은 대부분 희뿌연 느낌이다. 겨울 안개가 내려온 강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스모그로 몸살을 앓던 50년대의 런던 모습을 상상하게 되기도 했다. 하늘과 강의 경계가 흐려지고 붉은 벽돌 건물도, 청동 동상도 모두 회색빛으로 보이는.
도시락 통에 관한 대화를 나눴던 버스 안의 기억에서 서서히 멀어질 때 즈음, 집 앞에 내리던 진눈깨비 같던 눈송이가 점점 통통한 모습을 띄더니 금세 곳곳에 쌓이기 시작했다. 런던에서 눈이 이렇게 소복이 쌓이게 되는 장면은 보기 드물다. 기찻길 너머로 자그마하게 보이는 여러 개의 벽돌집 지붕들이 하얗게 수 놓이고, 그렇게 겨울 밤은 잔잔히 하얘진다.
바람이 적은 날 내리는 눈은 이토록 고요하다. 때때로 얕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둥글게 무리 지어 내리는 눈송이들은 마치 축제를 즐기는 반짝이는 정령들처럼 유려한 모습이다.
누군가의 발자국도, 새들의 흔적도, 기찻길의 매서움도 천천히 덮인다. 펑펑 쏟아지는 눈이 어떤 이의 목소리가 되어 바람에 나부낀다.
천천히 가도 돼 –
2022년 12월 13일
출근길의 기분이 사뭇 다르다. 간 밤에 내린 눈에 길거리가 하얗고 예쁘다. 차가 다니지 않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걸으니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길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낮은 지붕과 벽돌담, 수풀들도 모두 하얀 모자를 쓰고 있다. 차가운 이른 아침 공기에 코 끝이 시리지만 밤새 내린 눈이 닿은 곳들이 한없이 깨끗하고 상쾌해 마음이 부푼다.
많은 것들이 움츠러드는 계절에 맞이한 흔치 않은 아름다운 아침. 만일 이곳이 거대한 도시락 통 안의 세상이더라도 꽤 괜찮은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