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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로유재 Aug 09. 2023

밤 사생 (寫生)

홀로 걷기 - 보기 - 그리기


숲의 초입은 아직 그리 어둡지 않다. 낮이 지나가며 뿌린 주황빛 노을이 숲의 가장자리에 촘촘히 박혔다. 선잠이 깬 풀꽃들과 나무 덤불 곁으로 보랏빛 그늘이 무덤덤하게 드리워진다. 오랜 시간 사람들이 오가며 넉넉히 다져진 흙 길을 따라 들어간다. 나무들 사이로 지는 해의 눈망울이 슬쩍슬쩍 보이다가 결국 그 동그란 빛마저 시야에서 벗어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처 없이 숲길을 따라 걷다 문득 정신은 차려본다. 대로변을 지나던 자동차 소리도, 길 중앙에 서있던 가로등 불빛도 너무 멀어져 버렸다. 어느새 꽤 깊은 숲 속이다. 오전에 내린 비가 채 마르지 않아 물컹해진 잔디가 두 발을 감싼다. 풀벌레의 울음과 컴컴한 어둠이 섞여 위잉 위잉 바람 소리를 내며 숲 안을 두른다. 여전히 뿌리내리고 있는 잘린 나무 기둥이 보인다. 그곳에 앉아 허리를 굽혀 가방에서 재료를 꺼낸다. 휴대폰으로 조명을 켜고 손바닥 정도 크기의 캔버스를 비춘다. 붓을 쥔 오른손과 휴대폰을 든 왼손이 한눈에 보인다. 양 무릎이 서로 맞대어져 작은 캔버스를 지탱하고 있다. 흰 캔버스와 그것을 비추는 불빛 사이로 하루살이들이 모여든다.

 

숲길을 지나오며 엿본 것들을 떠올린다. 나뭇가지 사이로 간간이 별도 보였고, 흐린 구름도 보였고 희미하게 달도 보였다. 아주 오래된 기억을 품은 두꺼운 나무들을 보았고, 삼삼오오 같은 뿌리를 공유하는 가느다란 나무들도 보았다. 호숫가에 정신 사납게 드리워져 있던 버드나무도 떠오른다. 옅은 바람에 흔들리는 이파리들임을 알지만 묵직한 어둠에 싸여 그저 움직이는 거뭇한 뭉텅이로 보였다. 하지만 나는 훤한 대낮에도 이미 그것들을 보았기 때문에 딱히 공포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지나오며 본 것, 기억하는 것을 토대로 붓 끝에 파랑을 담아 밑그림 없는 그림을 그린다. 이젤도 의자도 없는 곳에서 엉거주춤 등을 구부린 채로. 허벅다리에 얹어진 작은 캔버스에는 붓 끝의 미세한 진동이 흐른다. 오늘이 세 번째이던가? 어둠이 내린 공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아무 의미도 품지 않는 풍경들을 담아보겠다고 가장 편한 차림을 하고,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작은 캔버스를 챙겨 오는 일. 이것은 종일 불이 꺼지지 않는 도시에 살고 있는 화가가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탈- 곧 밤의 사생 寫生인 것이다.

 

밤에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아주 비효율적이고, 어느 화가에게는 무척 불합리한 일 일지도 모른다. 자연의 온갖 형태와 색이 ‘밤’이라는 옷을 입고 거대한 어두움으로 거기 그렇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를 관찰하여 화폭에 세세하게 담아내기 어렵고, 적당한 조명이 없는 이런 어둠 속에서 어떤 형상을 자세히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에게 야외 사생은 어떤 환기 같은 것이다. 내가 보는 것, 경험하는 것, 어두운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시간 등을 응축하여 캔버스 위에 빠른 속도로 담아내려고, 실제로 보지 않아도 본 것만 같은 풍경을 더듬거리며, 평소에 느끼기 쉽지 않은 감각을 찾아가려는 짧은 산책이다.

 

형광등 불빛 아래 밤이고 낮이고 같은 그림들을 보며 보내는 일상을 떠올려본다. 바퀴가 달린 편한 의자에 앉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발을 구르며 기다랗게 네모진 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러다 문득 어두운 곳에서 그림을 그리는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전, 형광등이 없던 시절의 예술가들을 생각한다. 흔들리는 등불에 의지해 작은 책상에서 글을 써 내려가던 소설가들, 촛불에 의지한 채 어두운 방에서 자화상을 그리는 화가들을 떠올린다. 불편이 불편인지도 몰랐던 시절이라 해도, 어두움이란 인간에게는 언제나 익숙지 않은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무섭고 불편한 어둠이 찾아와도 그저 묵묵히 하던 것을 하던 사람들. 무엇이 그들을 계속 쓰고 그리게 했을까? 이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며 조용한 붓질을 하는 밤이면, 나의 작은 마음엔 어쩐지 시원한 바람이 분다.

 

돌아갈 채비를 하고 휴대폰 불빛을 끄면, 발치의 풍경마저 어둠 속으로 숨어든다. 주변의 소리들이 증폭되며 나의 청각은 예민해지고 동공도 커진다. 어둠에 눈이 적응될 무렵, 어디선가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든다. 우거진 수풀에서 여우가 어슬렁 나온다. 여우는 잠시 멈춰 섰다가, 곧 그 자리에 앉아 나를 응시한다. 한참 눈싸움을 하다 몸을 일으키니 다시 수풀 사이로 들어가 버린다. 저번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아무래도 같은 녀석인 것 같다.

 

퐁 하고 물 위로 무언가 떨어진다. 그 소리에 놀라 호숫가의 덤불이 감았던 눈을 뜬다. 놀란 눈이다. 밤의 정적을 깨는 것은 결국 사소한 사건이다. 호수에 떨어진 무언가가 원을 그리며 나무들을 깨운다. 그걸 보던 바람이 무서운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모여들던 벌레들도 자취를 감추는 걸 보니, 비가 오려나보다. 캔버스를 뒤집어, 물감이 닿은 면이 품에 닿지 않게 꼿꼿이 세워 들고, 빗방울이 떨어질까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불현듯 한밤에 비를 맞으며 그림을 그리는 일은 마치 아무도 읽어주지 않을 글을 쓰는 것과 같다는 생각도 든다.

 

자연이 만드는 소리로 둘러싸인 무대에 커튼 모양을 한 새벽비가 내려올 준비를 한다. 덕분에 오늘 밤의 사생은 앙코르 없는 마무리가 될 것이다. 집으로 향하는 길, 양쪽으로 서 있는 가로수들이 기립박수를 쳐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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