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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일린 Apr 05. 2024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면, 그만인걸까?

[영화] <메이 디셈버>를 보고서 

(본문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과거를 결코 후회로 남겨둘 수 없는 여자 

후회는 일상이다. 그때 왜 그랬을까. 잘 몰라서, 미숙해서, 때로는 욱하는 마음에, 심지어는 왜 그랬는지 조차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과거의 내가 한 일에 후회가 섞인 한숨을 내뱉곤 한다. 과거를 곱씹고 또 곱씹으며 후회하는 모습이 어리석다는 걸 알면서도, 멈추지 못하는 스스로를 자책한다.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며 밤마다 이불킥을 하고, 스스로 땅굴을 판다.      


인생에 후회란 단어란 없다는 듯이 사는 여자가 있다. 미성년자였던 아들의 친구를 유혹해 불륜을 저지르고, 수감생활 이후 아이까지 낳았다. 파렴치하다고 손가락질받을 짓을 저지르고 나서도 바람의 대상이었던 아들의 친구와 재혼해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산다. 간간히 주변으로부터 협박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주위의 불편한 시선이 쏟아짐에도, 이사 한 번 가지 않고 행복한 모습을 전시하듯 보여주는데 주저함이 없다. 


여자는 과거를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후회로 남아선 안 되는 것에 가깝다. 그래서 아들 친구와의 관계는 한순간의 흔들림이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 사랑이어야 했다. 여자는 그 점을 지속적으로 남편이 된 젊은 남자에게 주입한다. 우리는 사회의 통념을 거스르는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불같은 사랑에 빠진 것뿐이라고.      


과거를 후회해선 안 되는 여자는 조금이라도 후회할 만한 일이 벌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열심히 만든 케이크 주문이 취소되었을 때, 여자는 자신이 쏟아부은 과거의 노력과 시간이 헛되어 버려지게 되었다며, 세상이 무너진 듯 울부짖는다.      


한 톨만큼도 과거를 후회하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여자는 역설적으로 과거에 매여 살면서, 현재를 살아내지 못한다. 후회는 과거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흘러 보내기 위해 거쳐야 할 절차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후회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으로 가득한 여자는 본인과 주변 사람을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가둘 뿐이었으니까.            

주입받은 과거에 의심을 품게 된 남자 

둥근 알이 유선형의 유충이 되고, 다시 번데기가 되는 과정 내내 겉모습의 변화는 그리 크지 않다. 극적인 변화는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는 과정에서 벌어진다. 꾸물거리는 애벌레는 파닥이는 날개가 생겨나며 전혀 다른 모습을 거듭난다. 꾸물꾸물 기어다는 움직임이 전부였던 애벌레는 나비가 된 후, 좁디좁은 케이지를 벗어나 날개를 팔랑이며 사방이 뚫려있는 하늘로 날아오른다.      


수시로 강요하는 여자의 가스라이팅에 단단히 얽매인 남자는 지금의 삶이 스스로가 선택한 길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잔잔하고 평온해 보이던 남자의 일상은 아이들의 고등학교 졸업식을 앞두고, 자신들의 삶을 영화화하는데 참고하려고 찾아온 동갑내기 여배우가 등장하며 크게 흔들린다. 

     

사건의 주인공의 내면을 완벽히 파악해 낼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당당하게 등장한 동갑내기 여배우는 남자를 유혹한다. 남자는 여자의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순간 남자는 자신의 과거에 의문을 품게 된다. 과거의 자신은 그저 한 순간의 유혹에 넘어갔을 뿐, 운명적이고 영원한 사랑에 빠진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자각에 눈을 뜨게 된다.      


오랜 세월 믿어 왔던 자신의 삶이 사실 뿌리째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는 의심의 칼날은 스스로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과거를 후회하고 부정한다는 건, 갓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아이들의 존재마저 부정해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과연 아이들은 부정의 산물에 불과할 뿐인가. 남자는 딜레마에 빠진다.   

   

졸업식에서 여자는 식장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지만, 남자는 식장 울타리 밖에서 울음 섞인 웃음만 짓는다. 제대로 후회할 기회조차 갖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 버린 남자는 과거를 후회하고 싶어도 마음 놓고 후회할 수도 없다. 제대로 과거를 꼭꼭 씹어 삼키지 않고 방치하면, 언젠가 소화시키지 못한 과거에 잠식된다는 걸 여실히 보여준다. 


과거를 온전히 재현할 수 있다고 믿는 제삼자   

노자는 말했다.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뛰어난 것이라고. 나는 내가 알지 못함을 안다는 소크라테스의 역설도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자와 남자 사이에 한 여배우가 나타난다. 여배우는 두 사람의 관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고 과거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자신이 알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맑은 물처럼 너무나 명확해 보이던 과거는 오히려 제삼자인 여배우가 한 발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가라앉았던 부유물이 떠오르며 혼탁해진다. 여자는 스스로를 속이고 있었고, 남자는 여자에게 속고 있었다. 현재의 영향을 받아 과거가 조금씩 뒤틀어지고 있건만, 제삼자인 여배우는 오로지 당시의 상황에만 집착하며, 진실에 다가가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과거는 영원불변하게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이미 벌어진 과거의 사건은 작은 사실 조차도 바꿀 수 없으니까. 여배우는 그 당시 상황 속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옆에서 관찰하기만 하면, 과거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여자와 같은 화장을 하고, 동일한 장소에서 같은 행동을 한다. 심지어 남자를 똑같이 유혹하기까지 한다. 그 당시와 같은 상황과 경험을 하기만 하면, 그들을 온전히 재현해 낼 거라 확신한다.    

   

과거의 사건은 여전히 변함없지만, 제삼자인 여배우의 개입으로 과거에 대한 각자의 해석은 기괴한 파열음을 내며 틀어진다. 과연 객관적인 관찰이란 가능한 것일까. 개입하는 순간 틀어지는 과거를 어떻게 받아들여할까. 관찰로서 누군가를 오롯이 이해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개입하지 않는 관찰이라는 행위 자체가 처음부터 허구의 개념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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