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욕망을 간과한 마르크스
*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
마르크스가 살았던 19세기는 산업혁명으로 급격하게 사회가 변화되고, 자본에 의한 또 다른 계급사회가 형성되면서 사회 모순과 불평등이 첨예하게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당대 마르크스가 쓴 『자본』은 마르크스 정점을 이루는 책으로 평가 받는다. 이 책에서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와 잉여노동, 이윤 등을 다루며 자본에 대해 다양하게 분석하였다. 자본주의의 경제적 모순과 폐해를 총체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던 마르크스는, 현대 노동운동의 이론적 지침을 제공한 만큼 그의 이론은 매우 구체적이다. 공산주의적 이상사회를 앞당기고자 했던 혁명적 의도에도 이입되면서 사상적 배경이 된다.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자의 잉여분 가치를 자본가가 취한 것이며, 이를 자본에 재투자하면서 잉여분 가치착취가 늘어나며, 삶의 질이 하락한 노동자로선 상품구입 능력이 떨어지는 도미노현상으로 인하여 결국 자본주의가 종말을 가져올 것이라 확신하였다. 당대 사회적 미치는 영향이 컸던 만큼 많은 논쟁이 벌어졌지만, 이러한 마르크스 사상과 시각은 당시로서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평생 시대적 반항과 혁명가로써 역동적이나, 한편으론 고단한 삶을 살았던 마르크스는 ‘모든 인간은 순수하다’라는 이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적으로 인간의 적극성과 합리성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근본적으로 이웃에 선하고, 우애하며 협동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사적 소유가 시작되면서 인간성이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 두 개 주체계급을 자본가와 대립되는 노동자로 구분하였다. 사회경제적 구조논리에서 간단한 원리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인간사회라고 할 수 있다. 평등한 사회주의 국가에도 감시·감독하는 관리자가 필요하며, 이를 이끄는 정치 지도자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꼭 계급이 아니더라도 서열이 정해지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
또한 교수, 학자, 예술가, 과학자, 철학가 등 지식 생산자를 어떻게 분류할 것인가에 깊이 있는 논의나 논증이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사회적 합의에 의한 복지와 교육에서 생산되는 미래 자본에 대한 깊은 성찰도 요구된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를 간과하였던 것이다. 지금 K-POP, K-드라마 등 대한민국이 향유하고 보유한 문화적 가치만 떠올려도 금방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처럼 공동체적인 상부·상조 협동심이 발휘되어 갈등 없이 평등한 사회 일원으로서 이상을 실현하는 사회가 정착된다고 하지만, 구태여 프로이트를 설명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소유욕과 근원적인 경쟁 심리인 생물학적 본능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발칸반도 여섯 개 민족을 하나로 묶어 유고슬라비아를 태동시켰던 티토 집권당시 집단농장이나, 공장의 생산력이 기대치 50%를 살짝 넘는다는 것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부익부 빈익빈 등 여러 문제점이 있어 최선의 선택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마르크스 『자본』은 복잡한 구조 속에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여러 시각에서 바라보고 연구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
사족을 덧붙이면, 사회주의를 책으로 공부한 사람은 지독한 사회주의자로 무장한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몸으로 겪어본 사람은 철저한 반사회주의자가 된다. 나는 이도저도 아닌 까닭에 무정부주의를 따르지만, 솔직하게 뭐, 살짝 깊이 있어 보이려는 헛된 폼을 잡는 것일 뿐이다. 어쩌면 다다이즘에 가까울 수도 있다.
“자유를 사랑하는가, 평등을 추구하는가?”
그러나 자유와 평등 둘 다 향유할 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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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한가하게 이따위 글이나 쓰고 있다니 스스로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횡설수설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릴 듯해 썼지만, 차마 이 포스트에 붙이진 못하겠다. 가치가 없어서가 아니라, 위에 쓴 내 글이 상처받을까 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