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란 무엇인가 : 시선
사진은 사진가의 시선이다.
그림에는 ‘시선’이 없다.
시선은 생명체의 전유물이며 사진만이 가진 고유한 표현수단이다.
시선이 잘 보이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며 시선이 없으면 죽은 사진이다.
사진의 정체성에 관한 긴 고민 끝에 나는 사진은 다른 무엇일 수 없고, 오로지 '시선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 생명체의 눈에는 시선이라는 놀라운 속성이 있다.
(...)
시선이 있는 눈과 시선이 없는 눈은 어떤 차이가 있나?
이 차이를 바로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생명은 시선이 시작하는 곳에서 시작한다.
신은 시선이 없었다. (아멜리 노통브. 이토록 아름다운 세상. p 9) ]
사진찍기는 ‘보는 행위’다. ’무엇은 무엇이다‘ 식의 말에는 그 사람의 생각이나 주장이 들어 있기 마련이고, 나는 지금 사진찍기의 핵심이 ’보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보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것은 ‘시선’이고, ‘시선’은 그대로 사진에 담긴다. 그리고 사진에서 내가 인정하는 유일한 가치가 ‘시선‘이고, 거기서 온전하게 ‘사진가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시선’뿐이다. 그밖에 다른 것들은 (말만 무성할 뿐) 별로 대수롭지 않다.
예를 들어, 사진의 메시지(내용)는 사진가의 의도가 담겼다기보다 주로 피사체가 보내는 것일 때가 많다. 내 생각에 사진가는 굳이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 가끔 아전인수 격으로, 제 나름의 해석을 덧붙이기도 하지만, 잘 먹히지 않을 것이다.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진의 그림(형식)은 근본적으로, 사진가의 창작물이라기보다 기계장치(카메라)의 생산물이다. 따라서 멋진 사진을 찍었다고 해서, 사진가가 솜씨를 뽐내면서 으스댈 일은 아닌 것 같다. 차라리 피사체가 된 풍경이나 모델을 칭찬하거나, 자기 행운에 감사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복제를 위한 도구’라는 사진의 정체성 문제에 얽매이지만 않으면 사진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는 있다. 기록하고 증명하는 데 머물지 않고 적극적으로 연출을 해서 가상의 세계를 만들거나 덧칠을 해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퍼포먼스를 벌이는 등 사진을 개념예술의 수단으로 써 먹을 수도 있다. 그 밖에도 자기표현을 위한 창작의 도구로서, 사진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도 ‘사진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대다수의 사진가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사진’과는 차이가 있는 것 같다.
나와 대부분의 내 아마추어사진동무들은 일정한 선을 넘는 연출행위나 과도한 그림 그리기에는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물론 영화감독이나 개념미술가가 되고 싶은 생각도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사진은 단지 ‘보는 행위’일 뿐이다. 아름다운 장소나 의미 있는 것들을 만나면, 자기 ‘시선’으로 재단해서 프레임에 집어 넣어 사진을 뽑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관찰하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은 사람이 사진가가 된다. 바라보는 행위가 ‘시선’을 만들어내고, 사진가의 시선은 사진에 담겨서 남들에게 전달된다. 이게 내가 사진에서 발견한 유일하게 유의미한 관점이다. 따라서 내 생각에, 좋은 사진은 사진가의 시선이 잘 나타나 있는 사진이다.
시선의 의미
‘시선’이란 단어는 여러 의미로 읽힐 수 있다. ‘어떤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식으로 쓰이면, 관점이나 견해라는 뜻이 된다. ‘시선이 부드럽다, 날카롭다 음흉하다’ 식으로, 보는 행위 속에 포함된 '성질' 같은 걸 표현할 때도 시선이란 단어를 자주 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단어의 원래 의미에 한정해서 얘기하고 싶다. 여기서 말하는 '시선'은 사람이 무엇을 볼 때 나타나는 ‘구조적인 선’ 으로서의 시선이다.
시선은 ‘눈이 가는 길’, 곧 ‘눈길’이다.
시선의 한 쪽에는 그것이 향하는, 즉 보여 지는 대상이 있다.
그리고 그 반대방향으로 따라가면, 바라보고 있는 눈이 있다.
시선의 한 쪽 끝은 사진 프레임 속 어느 곳에 맞춰져 있고, 다른 한 쪽은 프레임 바깥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으며, 시선은 그 두 지점을 연결하는 선이다.
사진에서는 사진가의 시선이 만들어내는 이 ‘구조적인 선’이 잘 보여야 한다.
나는 ‘시선’은 오직 사진만이 가진 고유한 표현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관점’이 관념적이고 주관적이라면 '시선'은 실제적이고 객관적인 성질이 강하다. 같은 풍경을 바라보며 서로 비슷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해도, 화가의 그림에 담긴 것은 ‘해석된 결과물’인 반면, 사진가가 찍은 사진에 담긴 것은 거의 '실물의 연장'이다. 따라서 그림에서는 사진처럼, '시선'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림은 '실체'라기보다는 화가의 머릿속에서 창조된 '환상'에 더 가깝다. 거기에는 시선이 없으며 억지로 그려 넣더라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림 속 장면은 ‘시선’의 존재감이 희석되는 대신 ‘관점’이 강화된다. 관객은 주로, 화가의 눈을 통해 그림을 보게 된다. 그러나 사진은 그런 식으로 보여 지지 않는다. 사진의 관객은 사진가의 관점을 배제하고, '사진 속 대상'을 자기가 직접 보려고 든다. 예컨대 인물이 찍힌 사진을 보여주면 대뜸 '이게 누구예요?' 하고 묻는다. 그러나 인물이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면 좀처럼 그렇게 묻지 않는다. 풍경사진에서는 장소가 어딘지, 언제 찍힌 사진인지가 중요한 관심사가 되지만, 풍경화에서 그런 건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그림을 볼 때, 주로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해 한다. 그러나 사진을 볼 때, 사람들의 관심사는 사진가 또는 그의 의견이나 해석같은 것이 아니라 사진에 찍힌 그 대상이며 피사체 그 자체에 관한 것이다. 즉, 사진가의 내면이 아니라 피사체를 본다. 사진가의 생각이 아니라, 피사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더 궁금해 한다. 사진가의 의도보다 피사체가 보여주고 싶었던 게 무엇인지에 더 관심이 많다. 사진가의 관점보다 카메라 앞에 놓인 그 순간, 실제 상황이 어땠는지가 궁금하다.
이런 현상을 보면, 사람들이 사진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가 어떤 것을 원하든, 사진가는 결코 관객들이 이런 태도를 바꾸도록 설득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피사체에 꽂힌 사람들의 관심을, 억지로 자기 자신이나 사진 그 자체를 향하도록,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만약 그가 사진가로 남기를 원한다면, 설득을 하려고 들어서도 안 될 것 같다. 정체성이 흔들리면 모든 게 흔들리게 된다.
영상(이미지Image)의 한계
사진은 피사체가 발산한 빛에 의해 생긴 자국이며 틀을 대서 찍는 방식으로 제작된다. 그 과정에는 사진가의 해석이 개입할 여지가 거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진을 좀처럼 누군가의 해석으로 보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그건 사진가가 자기 사진을 ‘해석’으로 봐주기를 간절히 원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사진가가 “저는 이러저러하게 표현했습니다.” 라고 말하면, 관람자는 “표현? 그런데 그건 원래 그랬던 것 아닌가요?” 라며 의아해한다. 혹은 “당신이 그걸 바꿔버렸나요?” 식으로 말하면서, 실망하고 비난할 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사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진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다르게 보려고 들지 않는 것이다. 내 생각에, 사진가는 차라리 '뭘(특히 자기 내면을) 표현하겠다'는 생각은 접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 보다는 피사체의 입장에서 대변자가 되어, 그가 원하는 걸 충실하게 전하는 자세를 갖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그 때 중요한 건 오직 '시선'뿐이다.
[ 회화나 조각은 물리적인 존재감(표면, 질감, 붓 자국이나 손자국, 크기 등등)을 뚜렷이 보여준다. 반면 그런 특성이 없는 사진 속에서 사진가의 시각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필립 퍼커스. 필립퍼커스의 사진강의 노트 p57) ]
‘사진 속에서 사진가의 시각을 드러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약간 더 비관적이다. '쉬운 일이 아닌' 정도가 아니라, 훨씬 더 심각해 보이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사진은 영상(Image)이고, 영상은 (물리적 존재가 아니므로) ‘물리적인 존재감’이 아예 없다. 물리적 존재라면 당연히 가지고 있어야 할 질감과 양감과 무게감이 없으며, 단지 그런 것의 낌새를 약간 느끼게 해주는 ‘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게다가 영상은 혼자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으며, 항상 ‘무엇인가의 영상’일 수밖에 없다. '누군가의 이미지'를 두고 ‘그 누군가'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는 문제다. 사진이 (조각이나 회화처럼) ‘물리적 존재감’에 기대어 무엇을 표현하려고 드는 시도는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인 것 같다. 그러면 사진은 '사진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사진가는 '사진가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어 그 정체성을 잃게 된다.
종이사진이라면, 그림(회화)과 같은 예술작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흔히 사진가들은 자기 탐미적 욕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않는 현실의 여러 제약과 한계들을 접하면서 힘겹게(?) 사진을 찍는다. 사진의 무대가 되는 현실세계는 그런 방해요소들이 만연하고 또 일상적이다. 회피하거나 극복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적절한 장치를 갖추고 기술로 극복해야 할 뿐 아니라 기다리거나 수완을 발휘해야 하고, 비용을 들여서 좋은 것들을 만나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부담스러운 일이고, 눈이 높고 기대가 클수록 부담도 커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미지에 변형을 초래하는 사진기법들을 활용하고 회화적인 수단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피사체와 시간을 선택해서 사진을 찍고, 연출을 하거나 사진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오로지 미(美)의 관점에서 실행하는 '맹목적인 선택'을 비롯해서 무의미한 연출과 덧칠한 그림들은 당초 피사체가 지녔던 의미를 지우거나 희석하게 된다. 그러면 사진은 맨 처음 피사체로 선택했던 대상과는 동떨어진 새로운 그림처럼 되고 만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근엄한 노인’이 되고, 설악산의 공룡능선은 ‘아름다운 산의 능선’이 되는 식이다. 실제(實際)는 사라지고, 피사체와 분리된 '새로운 그림'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 사진은 누군가의 사진이었을 것이고 어떤 사건이었을 것이며 어떤 장소였고 어떤 순간의 그런 모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당초의 의미는 사라지고 그림만 남는다. ‘실체가 없다‘는 치명적 한계를 품은, ’제한적인 그림‘이 탄생한 셈이다.
물론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겠다. 사진을 그냥 ‘그림(繪畵)의 일종‘으로 보면 되지 않을까? 실제로 ‘인화된 종이사진’은 이미 ‘실체’라고 할 수 있다. 종이 위의 얼룩인 그 ‘영상(image)’이 아니라 ‘인화된 종이사진’만을 ‘사진’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처럼, 피사체에 얽매일 필요 없이, 나의 생각과 의도를 사진에 표현할 수 있고, 그 의미나 내용을 보는 사람들의 자유로운 해석에 맡길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러면 굳이 '사진'이라는 범주에 얽매여서 표현의 한계로 전전긍긍할 이유도 없게 될 것이다. 한데 나는 아닌 것 같다.
만약 종이사진이 그대로 충분한 미적가치를 보여줄 수만 있다면, ‘사진이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방식‘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사진이 정말 감각적 실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되묻고 싶다. 내가 보기에, 사진은 도무지 (회화작품처럼) 독립된 ‘감각적 실체’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미술관에 가서 회화작품들을 직접 관람해 보면 그런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종이사진은 고작해야 ‘영상이 인화지라는 가벼운 옷을 걸친 정도’다.
거기서는 사람의 손길이 닿은 흔적이나 붓이 지나간 자국 같은 것은 볼 수 없고, 실체는 단지 ‘인화지 위의 얼룩’에 불과하다. 회화적 구성미를 볼 수는 있을지언정, 오감을 통해서 만지고, 보거나 듣고, 냄새 맡고 느낄 수 있는 그런 실체는 아닌 것 같다. 냄새가 후각으로만 존재하듯이 사진도 시각으로서만 존재한다는 얘기다. 실체가 아니기에, 그걸 만든 사람의 손길과 숨결을 느낄 방법도 없다. 눈을 감으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어서, '감각적 실체'가 되기에는 한계가 분명한 것이다.
실제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나는 갤러리에 걸린 그림같은 사진들을 볼 때, 별로 놀라거나 불타오르지는 않았으며, 단지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정도였던 것 같다. ‘세련된 그림이군!’ 그러니까, 경험에 버무려지지 않고 사실을 가리키지 않는 사진은 대체로 사색(思索)에 부응하지 못할 뿐더러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도 없는 것 같다. 그림사진을 볼 때면 나는 머릿속에 어떤 감회도 떠오르지 않았고, 그래서 나는 사진은 ‘피사체나 대상의 이미지로서 존재할 때만 의미가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리얼리티가 중요하다.
사진은 어떤 실체에 카메라를 겨눈 다음 셔터를 눌러서 제작한 시각 이미지다. 이미지는 ‘(그 이미지를 제공한) 실체가 존재한다'는 가정 아래서만 의미 있게 존재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인정한다면, 사진표현의 핵심은 결국 ‘리얼리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걸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에 기초해서, 그걸 위한 표현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진가가 자기 내면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어떤 표현을 하기 위해 ‘사진을 창조해내는 식’은 아닌 것이다.
이미지의 주인이 그 ‘실체’인 것처럼, 사진의 주인도 피사체가 되고 말을 하는 것도 피사체가 된다. 따라서 사진표현은 피사체의 의도에 따르는 게 순리에 맞고, 사진가는 '그 의도를 살펴서 거기 부응하도록 노력하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쉽게 말해, 아름다운 것은 더 아름답게, 특별한 것은 더 특별해 보이도록 개성을 강조하는 식이 된다. 새로운 걸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가지고, 존재감을 돋보이고 과장하는 식인 것이다. 물론 피사체가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수는 있는 문제고, 그 때는 사진가의 판단과 의견이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에서 리얼리티란 ‘실제를 실제보다 더 생생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실체의 존재감을 약화시키거나 존재 자체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행위는 사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와! 실감나네!“
사진도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만들 필요가 있다. 사진은 (관점을 보여주기보다) ‘경험을 전달하는 것’이고, 그것도 실제보다 과장해서 전달하는 것이다. ‘시선’은 존재감을 강조하고 리얼리티를 구현하는 핵심이 된다. 사진가의 시각은 ‘시선’이라는 형태로 사진에 표현된다. 사진가는 그것으로 사진에 어느 정도 자기 존재를 드러낼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보았을 것이고 어떤 시각으로 보았을 것이라는 식의 추측은 항상 가능하기 때문이다.
회화적인 방식으로는 시선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시선’은 현실에서 사진가가 마주쳤던, 실재하는 대상과 그걸 바라보았던 사진가 사이의 대치상황을 드러내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물론 화가도 시선을 그려낼 수는 있겠지만, 리얼리티가 없어서, 사진처럼 실감이 나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에 사진에서는 인물이 포함되어 응시하는 눈길이나 외면하는 표정 같은 게 있다면, 시선은 아주 간단하고 강력하게 표현된다. 피사체가 된 사람의 시선은 사진가의 시선에 대응해서 생긴 반응일 것이고, 그 시선을 보면 거기 있었던 사진가의 존재 역시 바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사체가 인물이 아니어도, 대상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시선은 사진에 표현될 수 있다.
사실 '시선'이 잘 보이게 사진을 찍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진가가 감정이입을 해서, 피사체를 열심히 노려본다고 사진에서 ‘시선’이 강조되어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가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하면서 보았든지 간에, 사진표현은 여러 가지 물리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거리나 초점이나 명암의 대비상태나 눈을 사로잡는 어떤 패턴이나 색이나 선명하고 흐린 상태, 원근감과 크기 등이 사진에 표현된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이 사진에 나타나는 양상에 따라 ‘시선’의 존재는 보일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그건 오직 ‘기술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은 보여주지만 사진은 보여 진다.
보여 지는 것에는 ‘관점’이 필요치 않고, ‘시선’이 중요하다. 시선이 잘 나타나 있는 사진을 보면 (현장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사진가의 존재가 느껴진다. 사진 속 시선은 현장감을 고조시키고 존재감을 호소해서 보는 사람에게 '사진이 사실 그대로'라고 믿게 만든다. 그렇게 ‘누군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구조적 형태로서 잘 보이면 '좋은 사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진이 '그려졌다'거나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들면 '시선'은 급격히 약화된다. 상상 속의 존재를 바라볼 때는 시선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에 놓였던 '실제 현실'의 존재감이 흐려지면서 '시선'도 약화되는 것이다. 시선이 약화된 사진은 그림처럼 보이면서, 사진 고유의 기운도 사라진다.
사진가가 창작하는 것은 ‘그림’도 아니고 영화처럼 연출된 가상의 ‘신(Scene)’도 아닐 것이다. 나는 사진가의 창작물은 그가 어떤 것을 바라 볼 때 나타나는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시선이 창의적'이면 '사진도 창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창의적인 시선이란 '보는 시각이 새롭다'는 뜻이다. 남들은 잘 보지 않는 것들을 보거나, 남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 방식으로 보는 것이다. 사진을 만드는 나머지 과정도 주로 ‘시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현상하고 인화하는 과정에서, 사진을 찍을 때 확정된 구성요소들을 다시 검토해서 적절히 조절하는 것이다.
시선은 사진이 가진 고유한 표현수단이며, 화가가 그림솜씨를 뽐내듯이, 사진가는 사진에 담긴 자기 '시선'을 자랑해도 되지 않을까?
사진에 시선을 표현하는 방법은 사진을 찍을 때면 누구나 신경 쓰는 일반적인 것들이다. 일단 피사체를 부각하면 시선이 강조된다. 그래서 먼저 ‘자기가 본 것이 무엇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기술적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시선은 사라질 수도 있고 엉뚱한 곳을 향할 수도 있다. 어떤 것을 보고 사진을 찍었다고 해서, 사진에서도 항상 ‘그걸 보고 사진을 찍은 것처럼 보인다’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카메라에도 시선이 있고, 시선의 방향은 초점이 맞춰진 곳을 향할 것이다. 그러나 카메라가, 사람 눈처럼, 초점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다. 사람의 시선에는 두뇌의 작용(마음)이 포함되지만, 카메라에는 그런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것에 정신이 팔려서 그것만 보고 사진을 찍어도 사진에서는 다른 것들까지 다 중요하게 보일 수도 있다. 뿐 아니라 카메라는 곁눈질로 앞을 바라보면서 주변에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지도 못한다. 시선이 비스듬히 진행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초점이 전부는 아니다. 카메라의 시선을 사람의 시선처럼 써먹으려면 약간의 기술이 필요할 것 같다. 어떤 것이 잘 보이게 하려면 그 밖에 다른 것은 잘 보이지 않게 해야 한다. 사진 안에는 특별히 초점이 맞는 부분이나, 빛이 집중되는 부분이나 명암의 대비가 두드러지는 부분, 선명한 부분 등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나머지 부분에는 그런 속성이 약화되어있어야 한다.
하지만 제일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남들 시선을 끌 수 있는 좋은 피사체(좋은 조건을 포함한)를 선택하는 것이다. 좋은 피사체를 선택해서 상황에 맞게, 카메라 위치를 설정하고 렌즈화각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선이 잘 드러나는 기하학적 구성을 사진의 형식 안에 구현해 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과 면과 색과 명암의 대비로 이루어진 세상의 구조를 잘 이해하고, 장치의 기계/광학적 원리를 사진의 구성에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할 것 같다.
사실 ‘시선을 구현하는 일’은 사진의 기본이다. 자기가 뭘 봤는지, 뭘 보여주고 싶은지, 의도를 분명히 하면 시선은 자연스레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들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 사진의 기본이다. 그리고 ‘본 것’에 초점을 맞춰서 피사체를 부각하는 것이다. 구성을 단순화해서 통일성을 기하는 것도 본 것을 구체화해서 시선을 잘 드러내는 방안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게 전부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나머지는 별 것 아니다.
중요한 건 피사체와의 만남이고, 만남이 임팩트(Impact)있는 것일수록 시선을 구현하기 쉽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특별한 존재는 그 자체로서 이미 관심의 대상이 되어 시선을 끌어 모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 있는 순간이나 극적인 장면을 만나는 건, 현실적으로 흔하지도 않고 쉬운 일도 아니다. 그래도 머릿속 그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서둘러 연출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건 사진다운 방법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사진에서는 ‘시선’이 잘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기다리면 기회는 온다'라는 믿음 역시 사진을 통해 얻게 되는 소중한 지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