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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Oct 17. 2023

·어떤 사진고민상담 코너

개념미술이 된 사진

누구나 볼 수 있는 진부한 것을 벗어나, 참신한 대상을 찾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려는 욕구가 생기는 건 필연적 사건이다. 그건 어떤 일에서든, 시간이 흐르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물론 사진가들의 시각은 변화하고 발달한다. 처음에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보는 수준’을 벗어나서, 남달리 특별한 관점으로 볼 줄 아는 눈이 생긴다. 경험이 늘어가고, 시각적 통찰이 깊어지면서, 대상과 관점 또한 다양하게 발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감각이 고도화(高度化)되는 과정일 뿐, 근본적인 내용이 바뀌는 건 아니고, 그걸로 ‘의미’가 생겨날 수는 없을 것이다.

한데 사진은 대체로, 미리 어떤 의도를 품고 제작을 시작하게 되면, 거의 그에 부응하는 결과물이 만들어지게 될 것 같다. 그 이유는 사진 제작과정에는 (그림을 그릴 때처럼) 감각에 의지해서 더듬더듬 헤매는 '험난한 작업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를 짜내고 계획하고 준비해서 사진을 찍는 과정은, 공산품을 만드는 것처럼, 거의 의도한 그대로 진행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촬영과정은 관념(연출이나 의도)에 의해 철저히 통제될 것이고 ‘실물 제작’은 기계장치(카메라)로 처리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중에 관념이 감각에게 바통을 넘길 틈이 없이 제작이 끝나 버리고, 사진에 남는 것은 결국 (당초 머릿속에 품고 있던) 관념 덩어리뿐인 것이다. 그런 사진 안에는 사진가의 의도와 생각이 엉켜있을 뿐, 감각적인 요소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있다 해도 중요하지도 않다. 그래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사진은 ‘그림보다는 글에 더 가까운 무엇’이 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사진가들이 진심으로) 그걸 좋아하느냐’하는 부분이다. 나는 사진가들에게 바로 이 점에 대해 묻고 싶다. 진심으로 좋아서 그런 방법을 선택한 게 맞는지? 

하지만 그와 반대로, 미리 어떤 생각(관념)을 갖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계획하고 연출해서 사진을 찍는다면, 거기에는 감각이 개입할 틈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의도(아이디어나 콘셉트)를 창안하고, 계획하고, 연출을 하는 과정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실제로 그 부분이 작업의 거의 전부를 다 차지해버리기 때문이다. 사진의 경우는, 사진가가 의미나 메시지에 집착하면, 저절로 (마치 작가가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일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관념적인 작업으로 흘러가게 될 것 같다.

흐린 날의 풍경은 애틋하다.

먼 것들이 아득하게 뒤로 물러나 있어서, 더 자세히 보고 싶어 하는 나를 안타깝게 만든다.

색채가 은근하고 명암 톤은 부드러워서 나는 관능미마저 느낀다.

보일 듯 말듯 아련한 풍경을 보면서, 그 느낌이 사진에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나 하고 조바심을 쳤다.

나는 그 관능적이면서도 아득한 풍경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탐닉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고, 개념적인 것은 거기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만일 개념이 중요하다면, 또는 세상을 향해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굳이 사진을 사용하게 되지는 않을 것 같다.


양수리 겨울

서점에서 사진잡지를 뒤적거리다가 흥미로운 코너를 하나 발견했다. 사진가들이 사진과 함께 고민사항을 적어 보내면 전문가가 조언을 해 주는 형식이었는데, 서두에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왔음에도 내가 제대로 사진을 찍고 있는지, 예술로서의 사진이 될 수 있는지, 대체 좋은 사진이란 무엇인지 등 이와 같은 고민을 가진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민을 가진 사진가들이 사연을 보내면 전문가가 조언을 해 준다는 것이다. 이른바 ‘사진고민 상담코너’ 인 셈이다.


어떤 50대 여성 사진가가 자기 사진이 작품성이 있는 지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다른 아마추어사진가들처럼, 즉흥적으로 여러 대상들을 촬영했지만, 이제부터는 일정한 주제를 정해서 사진을 찍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적었다. 그래서 어느 바닷가 마을로 가서, 동네 구석에 버려진 잡동사니들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어왔다. 사진을 첨부해서 함께 보내는 글 끝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이 사진이 작품으로서 가능성이 있을지 알려주시고, 어떤 점을 보완해야 할지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진에는 버려진 어구들과 낡은 주택 담벼락에 쌓인 잡동사니와 쓰레기 더미 같은 것들이 담겨 있었다. 어촌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상생활의 잔해들을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해서 흑백으로 처리한 사진들이었다. 


전문가는 사진을 진단하고, 긴 글을 써서 정성스레 조언을 했다. 그는 먼저 제의(祭儀)에서 시작된 예술이 현대예술로 변모해온 과정을 언급하고, 그 속에서 사진예술이 어떻게 흘러왔는지 설명했다. 사진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자기 사진이 예술작품이 될 수 있는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진가를 위해 필요한 내용이었다.


[1950년 후반부터는 멋진 대상이나 특별한 사건을 기록하거나 유명인의 초상을 찍는 것에서 탈피해서 사진가 개인의 사유세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변모했습니다. 기록매체가 아닌 표현매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 후 1960년대부터는 좀 더 주관화, 사유화된 사진이 등장하고 개념미술가들이 사진을 표현매체로 수용하면서부터 미술과의 경계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표현대상도 다양화되고 확장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사진가도 현대미술가처럼 결과물보다는 아이디어와 작업과정이 중요하게 되었고 표현대상의 제약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김영태. 월간사진예술 중) ]


정리하면 이런 이야기다.


‘기록과 초상사진 위주였던 사진은 점차 표현을 위한 매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개념미술가들이 작품에 사진을 활용하면서 사진과 미술 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진의 표현대상이 확장되었다. 그래서 사진에서도 결과물인 사진보다 아이디어와 작업과정이 중시되었다.’


한정된 지면에서 많은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글이었다. 개념미술가들이 사진을 활용한 게 왜 사진과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었을까? 사진가들이 개념미술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로 인해 사진의 표현대상이 확장되었고, 개념미술에서처럼, 현대사진에서도 아이디어와 작업과정이 중시되었다고 한다. 이 말을 사진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마치 '개념미술가들 때문에 사진에서 아이디어나 작업과정이 중요해졌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일이 실제로 그렇게 흘러갔는지는 모르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건 개념미술의 문제일 뿐이지, '사진이 그 방향으로 따라가야 할 이유'라고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론 ‘(미술의 한 사조(思潮)로서 개념미술이 있는 것처럼) 사진에도 일부 그런 경향성이 생겼다’는 식으로 읽으면 될 일이다. 하지만 ‘사진의 흐름이 바뀐 것’처럼 읽히고, 그것이 사진을 제대로 하고 싶은 사진가들이 따라야 할, 일종의 '지침'처럼 받아들여질까봐 걱정스러웠다. 그 밖에도 사진을 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유효하게 남아 있는 것 같기에 해 본 생각이었다. 나도 물론 사진을 매체로 개념미술을 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사진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래야만 합니다'식으로 권하면 암담한 마음만 들 것 같다.




‘개념미술’하면 떠오르는 것은 변기를 '예술작품'이라면서 미술관에 전시했던 뒤샹의 [샘]이다. 그 사건이 (개념미술의) 시작이었다고 전해진다. 잘 알려져 있듯이, 거기서 중요한 건 '변기'가 아니라, 변기를 미술관에 전시한 작가의 '아이디어와 그 행위'다. 사실 나는 그런 예술행위를 하는 사람들과 정서적으로 잘 교감하지 못하는 편이지만, 아마 그들은 (이런 것도 한 번 생각해봐! 식으로) 사람들에게 뭔가 말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변기는 왜 예술작품이 될 수 없어, 꼭 뭘 만들어야 작품이야? 예술이 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봐!” 라고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것이다. 중요한 건 ‘개념’이고 작품의 가치와 의미는 개념을 전달하는 방법과 과정에 있다. 말하자면 개념 즉, 아이디어가 핵심이고, 그게 곧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인 셈이다. 실제로 변기는 일반 자기(磁器)공장에서 찍어낸 공산품 중 하나였고, 예술작품으로서 어떤 의미도 가치도 없는 물건이었다.


사진을 개념미술의 매체로 활용한 예는 사진가 <김아타>의 작업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006년 여름, <김아타>는 얼음으로 만든 약 1m 높이의 부처상이 녹아가는 과정을 사진으로 촬영했다. '얼음부다(Ice Buda)'란 작품은 그의 'On Air Project'내 '얼음의 독백(Monologue of ice)' 시리즈 중 하나다. '얼음의 독백' 시리즈는 얼음 조각품이 녹아 없어지는 모습을 3-4컷의 사진으로 찍어, '존재하는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즉,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개념을 표현하려고, 얼음으로 부처상을 조각하고 그게 녹아가는 장면을 몇 장의 사진으로 찍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건 사진도 얼음조각도 아니다. '부처도 이렇게 사라지는데, 하물며 세상 무엇이든 사라지지 않는 게 있을까?' 라는 개념이 핵심이다. 그리고 정작 '예술'은 그 개념을 전달하기 위한 아이디어와 일련의 작업과정이다. 작품에서 얼음조각이나 사진은 그야 말로 (‘뒤샹의 샘’에서 변기와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아니다.


개념미술은 이렇게 ‘물질로서의 작품 자체를 부정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미술의 한 사조(思潮)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종종 이런 작업들을 볼 때면, 마치 텍스트로 구성된 문학작품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이 든다. 주제의 성질도 문학적이지만,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 는 개념을 절절하게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문학작품만큼 적절한 매체가 있을까? 그러니까, 그런 개념은 시나 소설을 통하면 더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그는 그런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얼음조각을 했고(조각을 직접 했는지는 모르겠다) 사진을 찍었던 셈이다. 그러나 남은 것이 사진뿐이라, '김아타’가 사진가로 불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가 도무지 사진가인 것 같지 않다. 얼음조각 역시 작품에 쓰였지만, 그를 '조각가'라고 부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에서 그렇다. 만약 그를 '조각가'라고 부른다면, 기성 조각가들은 속이 약간 상할 지도 모른다.


그는 ‘개념미술가’라고 불려야 마땅할 것 같다. 물론 '사진이 개념미술의 방식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인정하기 어렵다. 사진 그 자체에는 어떤 특별한 점도 보이지 않고, 아무런 의미나 가치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실컷 머리로 구상해서 일을 벌여 놓은 다음, 그저 얼음조각을 향해 셔터를 누른 것뿐이다. 제 3자가 사진을 찍어도, 초보자가 사진을 찍었어도, 아마 꼭 같은 사진이 찍혔을 것이다. 나는 그러고도 그 작품이 어떻게 해서 사진으로 분류될 수 있는지, 그가 왜 사진가로 불릴 수 있는지 잘 모르겠다.




‘사진가도 현대미술가처럼 결과물보다는 아이디어와 작업과정이 중요하게 되었고‘


예의 그 사진클리닉의 전문가는 마치 현대에 와서는 사진이 개념미술로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고, 그런 기준에 맞춰서 조언을 한다.


‘그래서 현대사진 혹은 동시대사진에서는 작가와 작가의 표현의도가 중요하지 어떤 대상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과물의 중심이 대상에서 작가 혹은 작가의 시각으로 이동한 것입니다.’


결국 현대사진에서 중요한 건 대상이 아니라, 작가의 시각 즉 ‘아이디어’라고 주장한다. ('사진'과 '대상'이란 말을 혼란스럽게 사용했지만) 어쨌거나 그건 명백히 개념미술의 중심사상이다.


‘아름답지도 않은 대상을 왜 찍었고,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는지 생각해 보세요’

‘미리 주제를 정해서 작업하는 것이 좋고, 주제에 대해 구체적인 생각을 정리해서 작업을 진행하면 결과물의 완성도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진에는 대게 (수수께끼 같은) 작가의 의도가 담겨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의도를 모르는 한, 관객은 작품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나는 사진에 대한 이런 관점이 '사진이 가진 고유한 성질'을 고려하지 않는 데서 생긴 ‘어떤 오해’에서 비롯된 것만 같다.


사진도 ‘미술의 유행을 따라가야 한다’는 오해...

아니 그 전에,

사진도 '미술과 같은 예술 활동’이라는 오해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의미’에 집착하다가 일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버렸다는 의심도 든다.

엉뚱한 방향...

그러니까 ‘감각적’인 성질이었던 사진작업이 어느새 ‘관념적’인 활동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사진계는 유난히도 그 정체성 문제로 혼란스러운 것 같다. 개념미술은 사진뿐 아니라, 모든 사물(공산품이든 자연물이든 무엇이든)을 활용한다. 문서, 문자, 음악, 영상 등등 가릴 것이 없다. 중요한 건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작업과정이고, 거기 실린 메시지이기 때문에 표현 수단은 무엇이든 상관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이 사진을 활용한 어떤 표현방식을 한 가지 찾아냈다고 해서, ‘사진이 그래야 한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건 아이러니다. 더욱이 그런 방식 만이 ‘사진을 하는 올바른 방법’이라는 식으로 주장한다면 그건 더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예술로서의 기반이 취약한 사진예술의 정체성은 실제 그렇게 흔들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에 사진은 이미 태생적으로, 개념미술의 속성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실물 작품의 제작을 기계장치에 맡겼는데 사진가가 (좋은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일 외에) 달리 뭘 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개념예술을 원하는 사진가들은 굳이 ‘따로 뭘 해야만 한다’는 식의 압박을 느낄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공산품의 성질이 강한 사진으로 예술활동을 한다는 건 (변기로 그렇게 했듯이) 이미 개념예술의 사상을 실천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기에 그렇다.



일반적으로, 사진을 찍는 과정은 매우 감각적이다. 피사체를 보면서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앵글과 프레임을 맞추고 카메라 다이얼을 돌려서 노출을 조절하고 초점을 맞춰서 셔터를 누르는 순간은 감각이 모든 상황을 지배한다. 그 순간에 관념은 끼어들 틈이 없다. 프레임 안에 나타나는 시각적 구성, 빛과 사물의 움직임 등 사진에 영향을 주는 제반 현황들을, 그야말로 ‘순간적으로’ 판단해야 하기 때문에 그 때 생각이 작동할 여지는 거의 없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미리 어떤 생각(관념)을 갖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계획하고 연출해서 사진을 찍는다면, 거기에는 감각이 개입할 틈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의도(아이디어나 콘셉트)를 창안하고, 계획하고, 연출을 하는 과정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실제로 그 부분이 작업의 거의 전부를 다 차지해버리기 때문이다. 사진의 경우는, 사진가가 의미나 메시지에 집착하면, 저절로 (마치 작가가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일과 마찬가지로) 완벽하게 관념적인 작업으로 흘러가게 될 것 같다.


예를 들어 미술이나 음악은 상당히 감각적이다. '감각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실제로 그런 작업을 할 때는 주로 감각이 지배하고 관념은 거의 맥을 못 추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게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의 의도’란 게 있어서, 그의 머릿속에 관념의 형태로 들어있다 해도,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감각으로 환원되어, 색과 형태로 혹은 소리로 표현될 것이다. 하지만 사진 제작에는 그런 과정이 (기계로 자동처리 되므로) '거의 생략된다'고 봐야 한다.


내가 알기로, 그림이나 음악은 상당부분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다. 실물 제작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고, 대체로 그 과정은 순탄치 않아서 시행착오를 거치기 마련이다. 어떤 그림을 그리겠다며 작심하고 계획을 세운 다음, 붓을 든 화가는 자기가 미처 기대하지 못했던 그림을 그리고 당혹스러워 할 수도 있다. 머릿속에 어떤 음악을 구상한 음악가는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음악을 만들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원래 ‘사람이 하는 일’이란 그렇게 흘러가기 쉬운 법이다. 처음에 계획했던 바와는 달리, 길을 잃고 감각에 의존해서 더듬거리다가는, 기대치도 않게 좋은 결과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한데 사진은, 사진가가 미리 어떤 의도를 품고 제작을 시작하게 되면, 거의 그에 부응하는 결과물이 만들어지게 될 것 같다. 그 이유는 사진 제작과정에는 (그림을 그릴 때처럼) 감각에 의지해서 더듬더듬 헤매는 '험난한 작업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를 짜내고 계획하고 준비해서 사진을 찍는 과정은, 공산품을 만드는 것처럼, 거의 의도한 그대로 진행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촬영과정은 관념(연출이나 의도)에 의해 철저히 통제될 것이고 ‘실물 제작’은 기계장치(카메라)로 처리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중에 관념이 감각에게 바통을 넘길 틈이 없이 제작이 끝나 버리고, 사진에 남는 것은 결국 (당초 머릿속에 품고 있던) 관념 덩어리뿐인 것이다. 그런 사진 안에는 사진가의 의도와 생각이 엉켜있을 뿐, 감각적인 요소는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있다 해도 중요하지도 않다. 그래서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사진은 ‘그림보다는 글에 더 가까운 무엇’이 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사진가들이 진심으로) 그걸 좋아하느냐’하는 부분이다. 나는 사진가들에게 바로 이 점에 대해 묻고 싶었다. 진심으로 좋아서 그런 방법을 선택한 게 맞는지?




나는 멋진 피사체가 제공하는 감각적 즐거움 때문에 사진을 찍게 되었다. 만약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새롭고 신기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대면하는 즐거움이 없었다면, 아마 처음부터 사진에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여전히 아름답고 경이로운 사물들을 마주하는 데서 오는 오감의 즐거움이 사진을 지탱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그 즐거움을 중심으로, 정교한 기계장치에 대한 욕망과 조형을 다루는 시각적 유희에서 비롯된 기쁨과 성취감이 사진 활동의 동력이 되는 게 유독 나에게만 해당되는 현상은 아닐 것 같다.


별다른 어려움도 없이, 순식간에 멋진 그림을 만들어주는 놀라운 기계장치에 대한 호기심과 더 유능한 장치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 시각과 사진 사이의 차이점을 분석하고, 빛과 세상 사물들 간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서 맛보는 즐거움. 사진은 그런 욕망과 호기심에서 시작되었고, 그 핵심에는 분명히 ‘감각적 즐거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드러나는 호기심과 관심의 양상도 변화하게 된다. 누구나 빤하고 구태의연한 것이 오래 반복되는 상태를 참지 못하고, 참신한 걸 원하면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때 심각하게, ‘의미의 부재’를 느끼게 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누구나 볼 수 있는 진부한 것을 벗어나, 참신한 대상을 찾고 새로운 방법을 시도하려는 욕구가 생기는 건 필연적 사건이다. 그건 어떤 일에서든, 시간이 흐르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현상이기도 하다. 물론 사진가들의 시각은 변화하고 발달한다. 처음에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보는 수준’을 벗어나서, 남달리 특별한 관점으로 볼 줄 아는 눈이 생긴다. 경험이 늘어가고, 시각적 통찰이 깊어지면서, 대상과 관점 또한 다양하게 발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감각이 고도화(高度化)되는 과정일 뿐, 근본적인 내용이 바뀌는 건 아니고, 그걸로 ‘의미’가 생겨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의미’에 대한 회의는 필연적이고, 결국 사진가는 회의에 가득 찬 질문들을 떠올리게 된다.


왜 찍는가?

그저 즐겁기만 하면 되는가?

더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는 걸까?

이게 과연 내 손으로 만든 걸까?

좋은 사진이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작품이라 불러도 괜찮을까?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

올바른 사진의 방법은 무엇일까?


‘무의미하다’고 느끼면서, 뭔가 ‘방법이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나는 사진가들이 자기 사진에 ‘의미가 비었다’는 생각 때문에, ‘의미를 채우려고’ 개념미술의 방법을 사진에 들여온 것만 같다. 원래 (예술사진이나 아마추어사진처럼) 구체적 용도가 없는 사진은 형식미에 치우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형식과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 안에 내용이 비어있는 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런데 사진가는 그 상태를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거기에 뭔가 '내용을 채워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개념미술은 의미로 똘똘 뭉친 작업이고, 사진의 내용을 가장 직접적이고 노골적으로 부여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사진에 내용이 없고 의미가 비어있어서 공허감을 느낀 나머지, 사진가들이 ‘개념미술을 받아들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개념미술은 형식은 없고 내용과 의미 뿐이니, 둘을 합치면 완벽한 결과물을 얻게 될 것이다. 통념도 정설도 아니지만, 나는 그런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의미에 대한 가장 심각한 착각은 의미를 '부여한다’는 식의 관점일 것이다. 그러니까 의미는 ‘생겨나는 것’이지, ‘만드는 건’ 아니다. 또한 ‘어떻게 하면 의미가 있고, 다르게 하면 의미가 없는 식‘도 아닌 것 같다. 의미란 ‘스스로 느끼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의미 있다‘고 느끼면 의미가 있고, 아니면 무의미한 것이다.


과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의미는 매우 주관적인 것이고, 의미 유무는 그 일에 공을 얼마나 들였는지’에 주로 달렸다고 한다. 즉, 사람은 많은 희생과 노력이 투입된 일 일수록 큰 의미를 느끼고, 쉽게 얻은 것은 의미를 잘 느끼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러니까 어떤 일인지, 무엇을 이루었는 지와 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 때, ‘의미’의 뜻은 ‘보람’에 더 가깝다.


그렇다면, 사진은 '의미'라는 면에서는 매우 취약한 매체일 수밖에 없다.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사진은 너무 쉽게 얻어지기 때문이다. 제작과정(특히 창조적인 성격을 띠는 역할부분)을 자동화된 장치를 써서 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무의미를 유발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너무 쉽게 만들어지기도 하지만, 사진은 상당부분 우연히 만들어지기도 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진가들은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던 부분에서 사진의 장점을 발견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갑자기 앞에 뭐가 나타나서 멋진 그림이 되었다든지,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좋은 빛이 비치거나 안개가 끼는 바람에 신비로운 풍경이 되었다든지 하는 식의 행운이 좋은 사진을 얻는 원인이 되는 경우가 잦은 것이다. 그 때 사진가는 자기가 사진에 기여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두고 회의에 빠지게 된다. 별다른 노력 없이, 외부 작용에 따라 자기작품의 성패가 좌우되니 무력감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사진을 일반적인 창작활동처럼 여긴다면, 무의미의 늪에 빠져 헤어날 길이 없을 것 같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사진을 받아 들이면 어떨까? 일반적인 창작활동에서는 개인의 기량과 역할이 강조되지만, 사진에서는 ‘피사체와 피사체가 놓인 외적조건이 중요시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버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진은 뭘 ‘창작하는 일’이기보다, 그저 다양한 시선과 여러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매체의 성질을 고려하면, 아무래도 그게 더 바람직한 태도인 것 같다. 카메라는 세상을 ‘바라보는’ 도구이고, 카메라 없이 사진은 성립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의미는 ‘억지로 부여하는 식’이라기보다는, ‘저절로 있거나, 생겨나는 것’이고, 크게 중요한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개념예술에서 등장하는 메시지들이 뭐가 그리 대단한가?

그런 방식으로 부여된 의미가 마음에 드는가?

왠지 나는 그저 '유치하고 억지스럽다'는 생각만 든다.


사실 사진이 개념미술을 따라 한다는 건 아이러니다. 아마도 개념미술은 사진에서 그 아이디어를 얻었을 것이다. 사진이 나타나자, 화가의 솜씨와 그림(회화작품)의 가치에 대한 회의가 생긴 것이 그 발단이 된 것이다. '실물제작'에 대한 가치가 흔들리다 보니 '개념'쪽에 무게를 두게 된 것이다. 그게 맞다면, 사진이 일부러 개념미술을 따라 하려고 든다면 '매우 엉뚱한 일'이라고 볼 수 있다. 사진은 존재 그 자체로서 이미 개념미술의 사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잡지의 지난 호(號)에서, 어떤 사진가는 도로 옆에 설치된 방음벽을 대상으로 사진작업을 한다고 했다. 그는 먼지투성이의 플라스틱 방음벽을 찾아서,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이 좋은 작품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물었다. 전에 또 다른 글에서, 어떤 사진가는 주차장에 그어진 주차 선만 찾아 다니면서 촬영한다고 했다. 그는 아파트나 공공시설 주차장에 그어진, 주차선의 형태를 통해서 여러 가지 사회문제들을 들춰내고 있었다. 사진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개념미술처럼)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계획을 세워서 사진을 찍는 것이다. 물론 (정확하게) 처음 의도했던바 그대로 제작된 작품을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장담하건대, 그렇게 제작된 사진은 이런 긴 에세이를 쓰는 일보다 훨씬 더 관념적이다. 그리고 솔직히 나는 그런 식의 사진찍기에 어떤 즐거움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고달프기만 할 것 같다. 물론 내가 모르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아마도 지적인 성격의 즐거움)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내가 보지 못하는 숨은 아름다움이 그런 피사체들 속에 감춰져 있는지도 모른다. 혹은 감각적인 것에 치우치는 나와 달리, 사진의 내용이나 의미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진가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어떨까? 그러니까 단지 그게 ‘사진을 하는 올바른(혹은 의미 있는) 방법’이라는 믿음 때문에, 억지로 그렇게 하는 것일 뿐, 속으로는 전혀 내키지 않는 경우라면 말이다. 사진가가 멋진 피사체를 만나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사진이미지를 통해서 감각적 아름다움을 구현하는 일에 눈을 감고, 오직 의미에만 집착한다면, 그걸 꼭 ‘잘된 일’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


아름다운 대상을 눈앞에 두고, 뷰-파인더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나는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사진의 미적 조형성이 머릿속의 개념과 어떻게 버무려질 수 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사진은 머리를 쥐어짜서 만들어낸 '관념의 산물'이기보다는 '감각적 탐닉'의 부산물일 뿐이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나는 내가 찍은 사진이 예술작품이라든지, 거기 예술적인 무엇이 끼어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의미가 그토록 중요하며, 그것으로 사진의 작품성이 평가된다니, 더욱 그렇다.


나는 마치 그 전문가가, 자기에게 질문을 했던, 아마추어사진가들에게 ‘개념미술가가 되라’고 조언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질문을 한 아마추어사진가들이 진심으로 개념미술가가 되고 싶어할 지 궁금했다. 주제넘게, 노파심도 생겼다. 혹시 마음에도 없고, 즐거움도 못 느끼면서, 아이디어를 찾느라 머리를 싸매고 다녔던 건 아닐까?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진지한 표정을 하고 세상의 뒷골목을 뒤지고 다니느라 사진의 즐거움은 다 잊어먹게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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