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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디 Nov 14. 2023

·사진가가 여행을 가야 할 이유

새로운 대상일까 새로운 관점일까?

매일 마주치는 진부한 일상의 풍경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정말 가능할까?

만일 그럴 수만 있다면, 일이 얼마나 효율적일까?

시간과 돈을 낭비하고, 여러 불편들을 감수하면서, 일부러 여행을 다닐 필요가 없게 된다.

오래 함께해야 할 주위사람들을, 마치 처음 만났던 순간처럼, 늘 설렘을 갖고 쳐다볼 수 있게 된다.

그러면 고통스런 이별도, 위험부담이 있는 새로운 만남도, 반복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호기심과 모험심에 가득 차서, 삶을 지루하지 않고, 생생하게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관점을 바꿔서 익숙한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런 횡재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오키나와 <선셋비치>에서 보았던, 그 날의 노을을 보며 가슴이 팔딱팔딱 뛰었던 것처럼.

생각해 보면, 그 태양이 그 태양이고 그 바다가 그 바다이며, 같은 하늘아래 펼쳐진 자연현상이었다.

거기서 달라진 건 오직 나뿐이었다.


일본 오키나와 선셋비치


나는 때로 내가 마치 '피사체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불가사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갈수록 관심을 끄는 대상이 줄어들고 사진 찍을 거리가 귀해지는 현상을 보면, 내가 사진을 찍어 치울 때마다 피사체가 하나씩 사라져 가는 게 분명하다. 어제 흥미로웠던 사물이 오늘은 별 감흥을 느낄 수가 없고, 지난번에 메모리에 가득하게 사진을 찍어왔던 그 장소에 오늘 다시 가보면 사진 찍을 거리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사진을 시작한 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고, 탐색과 포착활동이 셀 수 없이 반복되어 새로운 피사체는 거의 고갈되어버린 게 틀림없다.


이제 새로운 곳도 없고 새로운 것도 거의 없다. 게다가 설상가상 격으로, 내가 카메라를 메고 자주 사진을 찍으러 다니는 이 도시 거리는 사진을 찍기에는 매우 척박한 환경인 것 같다. 사실 이런 조건에서 좋은 사진을 찍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 <브레송>이 살아 돌아와도 별 수 없을 것이다. 여기는 비가 오면 물이 고여, 인근 건물의 반영이 비치는 ‘생라자르 역 광장’ 같은 멋진 장소가 없다. 자전거 탄 사람이 지나다니는, 좁은 길옆에 서있는 ‘이에르’의 나선형 패턴이 아름다운 계단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거리에 빛이 아주 귀하다. 대책 없이 높게 쌓아 올린 건물 때문에 해가 들지 않는 골목은 하루 종일 어둡고 우중충하다. 높은 빌딩 사이로 나있는 좁은 도로에는 차와 사람들이 바글거린다. 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상업적인 테마로 가득 차있다. 행인들의 욕망을 자극할 목적으로 꾸며둔 게 분명한 화려하고 선정적인 쇼-윈도우와 야비한 원색의 간판이 즐비한 이 거리에서는 제 아무리 취향이 고상한 사진가라 해도 저급한 키치적인 이미지 밖에 포착할 수 없을 것이다.


거리의 사람들도 카메라에 우호적이지 않다. 사진의 공격성이 부각되고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치 자기가 사진의 잠재적인 피해자인 것처럼 생각한다. 행인들은 자기모습이 사진 한 귀퉁이에 나오는 게 무슨 큰 재앙이라도 되는 듯이 카메라 앵글을 의식하고 예민하게 군다. 거리의 사진가에 대해 무관심하지도 않다. 상인들은 사진을 찍어서 무슨 고발을 하려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서 카메라를 경계하고, 사진 찍는 행위가 어떤 형태로든 장사에 피해를 주지나 않을지 조바심을 내는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엄격한 자기 검열 끝에, '괜찮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사진을 활용하는 아주 소심한 사진가에 속하지만 그런 사실을 알려 줄 방법도 없다.


이 도시의 길거리에서는 세상과 교감하며 자유롭게 사진을 찍는 게 여의치 않고, 일상의 공간에서 피사체를 찾아 다니는 일도 생각처럼 간단치 않다. 그래서 사진선생들이 흔히 말하는 ‘주변에서 찾아보라’는 식의 조언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그는 문을 열고 나가면 집 앞에 오래된 유적지가 기다리고 있는 외국의 어느 유서 깊은 도시에 살고 있는 지도 모른다. 고급레스토랑처럼 꾸민 식당과 새파란 물이 채워진 수영장이 있는 집에서, 패션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의상을 걸친 여인과 함께 살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에 나오는 진기한 동식물이 득실대는 원시림 속에서 카멜레온과 함께 살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일상에는 아름다운 빛이 충만하고 사진 찍을 거리가 풍부할지도 모르지만, 내가 살고 있는 일상의 공간은 그렇지 않다. 여기는 유럽의 어느 도시처럼 고색창연한 건축물도 없고, 햇빛이 잘 드는 운치 있는 거리도 없다. 사진이 잘 받는 핑크색 피부에 패션모델처럼 차려 입은 아름다운 여성과 멋진 신사복에 중절모가 잘 어울리는 남자가 카페에 앉아 차나 맥주를 마시며 일상을 보내는 모습도 볼 수 없다. 시멘트와 콘크리트 덩어리로 빚어진 이 진부한 일상의 공간에 대체 무슨 사진 찍을 거리가 있단 말인가? 게다가 한 줌도 안 될, 쓸 만한 피사체는 내가 다 먹어 치워 버린 지 오래다.


어떤 식으로 말을 하든, 결국 사진의 피사체는 특별한 대상, 특별한 형태 혹은 특별한 상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적인 측면만 본다면, 그런 것을 ‘아름다움’이라고 하든 ‘예쁘다’고 하든 혹은 ‘우아하다’거나 ‘멋지다’라고 말하든 다 같은 이야기다. 다만 그것은 ‘일상’이 아닌 ‘특별한 것’이어야 하고, 일상인 경우에는 ‘특별한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별한 관점'이란 색다른 앵글이나 프레임 일수도 있고, 남들이 눈 여겨 보지 않는 사물이나 상황 혹은 사건에 대한 관심 어린 시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시선조차 전부 고갈된 것 같다. 내가 다 빼먹어 먹어버린 것이다.




요즘 세상에, 사진가의 딜레마는 ‘이제 더 이상 새로운 사진은 없다’는 데 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사진들은 전부 전에 어디선가 보았던 낯익은 사진뿐이다. 내 사진을 사진동호회 사진게시판에 올리려다 보면, ‘그게 그거라’는 생각에 머쓱한 느낌이 들어 망설이게 된다. 자꾸 보면 식상해지기 마련이니, 새로운 걸 갈구할 수밖에 없다. '좋은 것'도 계속해서 좋을 수는 없으니, ‘새로운 것’이라고 부르는 것뿐이다. 따라서 ‘새로운 것’은 곧 ‘좋은 것’이라고 바꿔 불러도 될 것이다.


[ 사진은 아름다움을 창조하지만 (사진을 너무 많이 찍어서) 고갈시키기도 한다. 예컨대 저 아름다운 자연도 지칠 줄 모르는 아마추어 사진 광들의 손길에 무릎을 굽히지 않았던가. 이렇듯 이미지가 범람하게 되면 저녁놀조차 진부해져 보이는 법이다. 슬프게도 오늘날 저녁놀은 사진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수전손택. 사진에 관하여. p132) ]


어떤 것이 진부해지는 속도는 새로운 걸 찾아내서 전파하는 매개자에 달려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들의 갈망과 열정이 크면 클수록, 더 부지런할수록, 그 속도는 빨라질 것이다. [손택]의 말처럼, 열정적인 '아마추어 사진광'들 때문에 이제 저녁노을조차 진부하게만 보인다. 더 이상 시선을 잡아 끄는 새로운 풍경은 별로 남아있지 않은 것 같다. 사진에서 관점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사진가가 새로운 사진을 보여줄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하나는 새로운 피사체를 찾아 다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점을 다양하게 변화시켜서 (같은 대상을) 새롭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열정적인 사진가들에 의해 이미 너무 많이 찍혔고, 매체의 발달로 인해 너무 많이 퍼져나가는 바람에 사진은 세상에 너무나 흔해졌다. 사진의 피사체가 고갈되어, 발로 뛰어서는, 더 이상 새로운 걸 보여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설사 이 말이 지금은 약간 과장된 것처럼 여겨진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볼 때, 더 중요한 건 피사체를 바라보는 사진가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관점과 역할을 중시하는 후자의 입장을 더 좋아하고 옹호했던 것 같다.


전자가 소비적인 반면, 후자는 생산적이라고 믿었다.

전자는 피사체를 고갈시키지만 후자는 시각을 창조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전자는 무지막지해서 취향에 맞지 않는 반면, 후자가 약간 영리해 보였다.

전자의 생각은 얄팍하고, 후자의 논리가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전자가 눈앞의 성과에 집착한다면, 후자는 먼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성과보다 과정을 더 중요시 한다는 건 필시 미래를 내다보는 계산 끝에 나온 결론일 터였다.

그래야 개인의 발전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자에 비해 후자의 방식에는 얼마든지 파고들 수 있는 '깊이'가 있을 것도 같았다.

당장 손에 쥐게 되는 사진만 쳐다 볼 일이 아니라 나 자신에 집중해야 할 터였다.


다른 무엇보다, 나는 ‘나의 역할’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전자의 경우 감동을 주는 것은 카메라 앞 현실의 공간에 놓인 그 대상이다. 나는 그런 대상을 발견한 다음, 놓치지 않고 최대한 온전하게, 카메라에 담기만 하면 된다. 따라서 1차적으로 중요한 건 '대상'이 된다. 좋은 대상을 만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중요한 건 ‘사진가인 나’다. 카메라 앞의 대상은 단지 사진을 위한 재료일 뿐이고 ‘나의 솜씨’를 통해서 얼마든지 좋은 사진으로 탄생할 수 있다.


내가 마음을 먹고 노력하면 언제 어디에 있든지, 나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카메라 앞에 놓인 대상이 완벽하면 완벽할수록 사진가인 내가 할 역할은 줄어들 수도 있을 것이다. 예컨대 나는 ‘감동이 오지 않으면 셔터를 누르지 마라’는 식의 말에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카메라 앞에 놓인 것이 이미 '충분히 감동적'이라면, 대체 당신 역할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내가 뭔가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고, 감동도 내가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생각에 약간 회의를 느낀다.




나는 여행자의 기분을 느껴 보려고, 자주 관광객이 많은 시내 길거리로 나가서 사진을 찍는다. 그 사람들 눈에는 모든 게 새롭고 신기하게만 보일 것이고, 그런 마음이 내게 전염되어 나도 같은 느낌을 맛볼 수 있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물론 거리 풍경이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피사체가 아니라 나 자신이고 나의 '관점 혹은 시각'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행객들의 시선에는 낯선 장소에서 느끼는 두려움이,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신선함이 가득했다. 그들의 설렘이 전이되어, 그 안에 섞이면, 나도 함께 마음이 설렜다.


어린 시절에나 느낄 수 있었을, 세상과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도 되살아났다. 카메라를 들고 사람들을 훔쳐보는, 그 불온한 행동에서 짜릿한 쾌감도 맛 보았다. 개구쟁이 시절의 못된 모험심(?)이 기억나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여행을 자주 다닐 수는 없으니, 관점을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안을 그런 식으로 찾아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게 생각대로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최소한 내가 맛 보았던 그 신선한 느낌이 사진에까지 전이된 것 같지는 않다.


[사진이란 누구나 아름답게 보는 장면을 이미지로 담는 게 아니고 세상을 자기 눈으로 아름답게 (혹은 달리) 인식하는 것이다. (이광수. 사진인문학 p29)]


한데 '인식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사진가들이 잊기 쉬운 진실이 하나 있는 것 같다. 그건 바로, 사진에서는 어떤 것을 '느끼거나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진은 '가시적인 존재'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하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사진으로 찍을 수도 없다. 사진가가 남들과 다른 창의적인 시각과 참신한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야만 남들과 차별화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피사체나 현실의 공간에 그런 것이 존재해야만 사진이 성립할 수 있다. 가슴이나 머릿속에 든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흔히 사진은 사진가의 눈과 마음을 통해서 바라본 '내면의 풍경'이라고들 말하지만, 나는 솔직히, 사진가 내면에 들어있는 그 감정이나 인식이 어떤 방식으로 사진에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나는 사진이 나의 인식이나 정서와 무관하게 찍히는 바람에 당혹스러웠던 기억뿐이다. 내가 감상에 취하거나 편견을 가지고 주관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보아도, 사진은 그렇게 찍히지 않았다. 사진은 언제나 ‘그런 나의 시각이 공정하지 않다‘고 지적이라도 하듯이, 냉정하게 객관적인 결과물만 손에 쥐여 주었다.


그래서 나는 감정을 절제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억누른 채, 객관적인 눈으로 피사체를 보려고 애를 써야 했다. 지나고 보니, 그게 곧 사진을 배우는 과정이고, 카메라를 닮은 눈을 가져, 사진가가 되어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물론 누군가 '참신한 관점을 가진 사람이 더 창의적인 사진을 찍어낼 수 있다'고 말했을 때, 그건 좀 솔깃하게 들렸다. 평소 우리는 늘 익숙한 방식으로 보게 되고, 그런 시각으로는 어떤 깨달음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당연히 새로운 사진을 찍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참신한 것’은, 그런 게 현실의 공간에 존재할 때나 의미가 있지, 마음 속에 맴돌기만 하면 아무 소용도 없다.


특히 사진에서, 창의성과 주관적 관점 등을 강조하다 보면, 결국은 '그림을 그리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는 문제여서, 나는 항상 그 부분이 꺼림칙했다.




[지각상의 획기적인 발견은 단순히 사물을 응시하고 그에 대해 더 열심히 생각하는 데서 나오지 않는다. 획기적인 발견은 지각 시스템이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모르는 무언가와 대면했을 때 나온다. 익숙하지 않은 것을 맞닥뜨리면 두뇌는 평소의 지각 범주를 버리고 새로운 범주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상식파괴자. 그레고리 번스(지은이), 김정미(옮긴이) p62)]


새로웠던 것이 진부하게 변하는 이유는 물론 ‘익숙함’ 때문일 것이다. 익숙해지면, 더 이상 관심을 기울여서 보지 않게 된다. 호기심과 상상력은 작동을 멈추고, 전에 만들어둔 범주에 맞춰서 자동적으로 보게 된다. ‘범주’란 ‘으레 그러려니’ 하는 식으로, 이미 잘 알고 있는 ‘시각의 틀’같은 걸 말한다. 볼 때마다 매번 처음 보듯이 본다면 몹시 소모적일 테니, 효율성을 고려하면, 당연한 일이다. 아는 부분은 익히 알고 있는 그대로일 거라고 가정하고, 대충 그냥 넘어가는 식으로 해도 되는 것이다.


시각은 살아남기 위한 일만으로도 엄청나게 많은 정보를 처리해야 한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는 자동차를 피해야 하고, 사무실에서는 상사와 고객의 표정을 살펴야 한다. 그러니 효율적으로 되기 위해 융통성을 부리는 건,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보다 보면 (아내가 헤어스타일을 바꾼 걸 못 보는 등) 실수를 할 수도 있다.


창의적이 된다는 건, 바로 ‘범주’를 깨고 모든 것을 처음처럼 새롭게 바라본다는 뜻이다. 물론 ‘처음 본 듯이 새롭게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런 건 오히려 ‘망각’이 하는 역할과 비슷하다. 만일 잊어 버렸기 때문에 새롭게 보인다면, 그건 혼자 새롭게 보는 것일 뿐, 정작 새로운 시각은 아니다. 그걸로 마음을 다스릴 수는 있겠지만, 남들에게 새로운 걸 보여줘야 하는 창의력과는 관계가 없다. 사진가는 나에게만 새로워 보이는 게 아니라 남들에게도 새로운 사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아마도 그 중요성은 ‘관점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바라봄으로써, 주위를 환기시키고, 전에는 보지 못했던, 사물의 다른 면을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너무 일찍 범주화해 버린 나머지, 미처 보지 못했던 어떤 면모를 뒤늦게나마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아마 그게 바로 창의적인 시각을 가지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 만으로 그런 획기적인 변화를 기대하긴 어려운 것 같다. 물론 전혀 창의적인 사람이 아닌, 나의 한계일 수도 있겠다.




영원히 새로운 건 없고, 모든 것은 퇴색하여 진부하게 변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건 '세상의 진리'이고 그래서 굳이 ‘관점’을 앞에 내세워야 할 이유가 된다. 사진의 피사체는 세상에 이미 존재하는 것이고 관점 역시 ‘이미 거기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진의 표면적 아름다움은 빛의 농간이거나 장치의 표현력일 것이다. 사진가는 단지 그런 것을 적절하게 이용할 뿐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피사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진가의 관점이 된다. (새로 만들어낸 게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들에서 새로운 면모를 들춰낼 때, 의미 있는 부분은 바라보는 관점뿐이다.


‘피사체는 유한하고 관점은 창조적이며 무한하다'


그러나 요즘 이런 신념이 약간 지나친 형태로 퍼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관점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아이러니한 문제도 나타났다. 바로 사진가는 ‘오로지 진부한 것만을 사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이 생겼다’는 문제다. 논리적으로는, 이미 특별하거나 색다른 것이라면, 굳이 사진가가 개입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그런 것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볼거리가 될 수 있다. 사진가는 어떤 것이든 낯설게 볼 수 있는 눈과 그런 시각을 사진으로 구현할 수 있는 카메라를 가지고 있다. 그의 임무는 진부한 세상을 색다르게 바라 본, 그 참신한 관점을 세상에 제시하는 것’이다.


옆에 있지만, 한 번도 주의 깊게 바라본 적이 없는 것.

늘 봐 왔으나, 한 번도 그런 방식으로 본 적이 없는 시각.


훌륭한 사진이란, 그렇게 대수롭지 않은 것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소외된 것들의 특별한 면모를 들춰내서, 진부한 일상의 풍경조차 (마치 처음 도착한 여행지에서와 같이) 가슴 두근거리면서 바라보게 하고, 외면했던 사람들의 시선을 끌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사진일 것이다. 그때 사진은 전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것이고, 사진가로 인해 새롭게 창조된 시각이기도 하다. 그거야말로 온전히 '사진가 자신의 것'이고 그의 창작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념과 희망에는 약간 과한 측면도 있는 것 같다.


'관점만 중요하고 피사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관점도 어차피 피사체로부터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둘은 동시에 작용해서 서로 상대의 효과를 잠식하는 성질을 가진 것도 같다. 그래서 관점에 치중하면 피사체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피사체가 특별할 때 관점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시너지 효과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새로운 피사체 역시 무수히 많은 새로운 관점들을 갖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피사체와의 만남은 ‘블루오션’을 만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오키나와로 여행을 다녀온 뒤, 처음 시내에 나갔던 그 날, 명동과 인사동은 여전히 여행객들로 북적거렸다. 외국 관광객들이 명동거리에 펼쳐진 좌판에서 (특별할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길거리 음식들을 사먹으며 신기해하고, (그 지겨운) 경복궁에 불편하기 짝이 없는 한복을 입고 와서는 호들갑을 떨며 사진 찍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단숨에 그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여행객들 눈에는 모든 게 새롭게 보일 것이다. 기분은 전염된다. 여행객들의 긴장되고 들뜬 마음이 전해져서 모처럼 ‘내가 살아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오키나와 나하공항에서 처럼, 인사동과 명동거리에도 세찬 바람이 불어제쳤다. 그날 나를 환영한 건, 공항에서 불었던 세차고 따뜻한 바람이었고, 나는 금세 새로움에 젖어 들었다. 하지만 명동거리에서 나를 맞은 바람은 익숙한 가을 찬바람이었다. 추위에 몸을 움츠린 채, 커다란 여행캐리어를 끌고 돌아다니는 해외여행객들을 보니,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바로 며칠 전의 내 모습이 보였고, 그들 생각과 그들의 감정이 내 마음에 더 잘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새로운 바람이 새로운 관점으로 이어지진 못했던 것 같다. 나는 풍경을 더 이상 달리 볼 수 있는 방법을 몰랐고 나의 느낌을 사진에 담을 수도 없었다.


[상상을 자아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지각시스템을 전에 본 적이 없는 사람, 장소, 사물과 대면시키는 것이다. 범주는 상상의 무덤이다. 상상을 무덤에 갇히지 않게 하려면 그 동안 경험해 본 적이 없는 환경을 찾아야 한다. (상식파괴자. 그레고리 번스(지은이), 김정미(옮긴이). p99)]


나는 여행객의 시선을 빙자해서, 그 동안 신물 나게 보아왔던 진부한 일상의 모습을 요모조모 열심히 보려 했지만, 새로운 사진이 얻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애는 썼지만, 내 머릿속 ‘범주’가 깨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창의성을 얻는 일은 잠시 주위를 환기시키는 정도로 해결되는 간단한 과제는 아닌 모양이다. 하긴, 기분의 변화가 '지각시스템'의 변화로까지 이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관점도 어차피 피사체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는 문제다. 물론 내가 창의적이지 않거나 한계에 부딪혔겠지만, 그래도 '관점만 중요하고 피사체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쥐어짜는 거죠 뭐!”


‘사진 찍을 게 참 귀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하고 내가 물었을 때, 내 아마추어 사진동무가 한 대답이 그랬다. 늘 보던 일상의 공간에서 참신한 피사체를 찾으려고 애를 쓰며, 함께 여기저기 기웃거렸던 그 날, 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비치면 (혹시 그럴듯한 사진이 될 수 있을까 하며) 집착하고 매달렸다. 관점을 바꿔서 새로운 시선으로 보려고 애를 썼다. 나는 요즘 그렇게 피사체가 고갈된 진부한 일상의 공간에서 (나를 쥐어짜며) 겨우겨우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지금, ‘늘 보던 것들이나 보면서 새로운 관점을 갖는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며 푸념을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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