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스스로가 어떤 인물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자신에게 익숙해진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이다. 세월이 갈수록 인간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그 인물을 점점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아멜리 노통브. 오후 네 시)]
노부부가 한적한 시골에 집을 마련했다.
남편 <에밀>은 고등학교 라틴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아내 <쥘리에트>와 조용한 시골에서 노후를 보내는 꿈을 꾸었고, 65세가 되어 은퇴하면서, 마침내 동화 같은 그 꿈이 실현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부부의 유일한 이웃인 앞집 남자가 매일 오후 네 시에 집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전직 의사인 <베르나르댕>씨는 말없이 소파에 앉아 커피를 한 잔 얻어 마시며 정확하게 두 시간 머물다가 돌아갔고, 그 일은 매일 반복되었다.
그가 왜 매일같이 방문하는지, 그리고 두 시간씩이나 입을 꾹 다물고 앉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평소 늘 화난 듯한 표정을 지었고, 질문을 하면 그저 모든 것이 귀찮고 성가시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릴 뿐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베르나르댕>씨는 엄청난 비만증 환자로 오로지 먹고 자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의 아내를 돌보고 있었는데, 그래서 <에밀>은 그가 삶에 지친 나머지 인생의 모든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추측일 뿐 정작 당사자에게서는 아무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앞에 마주 앉은 사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떤가?
남은 우리 자신을 볼 수 있는 거울이고, 오직 이 거울을 통해서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상대방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상대를 탐색하던 우리 관심의 화살촉이 곧장 나를 향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가? ’
하지만 거울 없이 알 수 있는 건 없고, 우리는 곧장 ‘자아정체성 혼란’이라는 인생 최악의 곤경에 빠진다.
남편 <에밀>은 교양 있고, 남들과 대화하기 좋아하며, 손님에 대한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예’ ‘아니오’ 식의 간단한 대답 외에 대화가 되지 않는 손님을 두 시간씩 상대하는 일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고역이었다.
두 부부는 매일 오후 네 시로 예고된 그 고통에 한없이 예민해져 갔으며, 마침내 모든 일상이 그 일에 지배당하는 지경에 이른다.
동화처럼 시작된 이야기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블랙코미디 같은 분위기로 흘러가고, 교양 있고 학식이 풍부한 훌륭한 인격체인(자기 스스로도 그렇다고 믿었던) <에밀>은 마침내 그의 성가신 이웃인 <베르나르댕>씨를 살해한다.
[꽃말에는 오해의 소지가 많다. 그 후 나는 가련한 사랑이라는 꽃말이 지닌 등꽃의 절규가 진정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애원이었다. 담을 타고 올라가는 등나무의 모양은 여왕의 옷자락에 매달리는 사람의 모습을 방불케 했다. 눈물 섞인 한탄처럼 떨어져 내리는 푸른 꽃송이, 그 협박 섞인 탄원을 나는 들을 수 있었다. <인생은 긴 한탄, 끝나지 않는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켜 주오>. 나 스스로 내가 내린 결정을 아무리 반박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가 살아 있을 이유, 그가 죽지 말아야 할 이유, 그를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같은 책 p179)]
<베르나르댕>씨의 침묵과 그의 불행해 보이는 삶 그리고 권태롭고 무관심한 태도가 결국, 힘겹게 그를 상대하던 <에밀>의 본능 속에 숨은 '하이드'를 끄집어낸 것이다.
소설은 <에밀>이 이렇게 말하면서 끝을 맺는다.
“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지 더 이상 알지 못한다. ”
뷰파인더 안의 풍경도 소설 속 이웃처럼 말이 없다.
속을 알 수 없는 무심한 풍경을 상대하다 보면, 생각의 화살촉은 결국 나 자신에게로 향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