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감독은 블록버스트를 만들지 독립영화를 만들지 미리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사진가들도 그와 비슷한 결정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본다.
모데미 풀
야생화사진을 즐기는 내 사진동무들에게 ‘왜 유독 꽃 사진을 좋아하느냐?’고 물어보면 의외의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꽃이 좋아서’라거나 ‘꽃의 생태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대다수는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와서’라고들 말하기 때문이다. 의아한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지만, 그 분들은 사진가이고 ‘사진을 잘 찍고 싶어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니까 그 분들은 ‘야생화 꽃 사진에서는 내가 잘 하기만 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그런 관점의 이면에는 ‘다른 사진의 경우에는 자기만 잘해서는 결코 좋은 사진을 찍지 못 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는 길거리에 여성모델을 한 명 세워놓고 영상을 찍는 중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동영상이고, 나는 지금 유투브에서 어떤 동영상 강좌를 보고 있다. 유투버는 실제 사례를 들면서 영상촬영기법을 설명하고 있었다.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까지 잘 다룰 줄 알아야 좋은 영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가 말한 ‘통제할 수 없는 요소’란 모델 뒤의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행인들이다. 거리에 모델을 데려와서 영상을 찍을 때는 뒤에 돌아다니는 행인도 배경에 찍히기 마련이다. 그는 촬영 콘셉트에 맞는 적당한 장소에 모델을 데려와서 원하는 포즈를 취하고 표정을 짓게 만들 수 있지만 거리의 행인들은 자기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분은 영상의 배경에 포함되어 전체 구성에 많은 영향을 줄 것이다. 행인이 없으면 시선이 모델에 집중되겠지만 아니면 어수선해 보일 수도 있다. 혹은 행인이 적절한 위치에 등장하면 프레임이 균형을 이루거나 구도에 생기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영상을 만들기 위해 매우 중요한 부분이지만 영상촬영자는 행인들을 직접 통제하거나 그 사람들의 움직임에 개입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자기 통제권 범위 밖의 일인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요소’
나는 그 표현이 신선해서, 문득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진에서도 꼭 같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마치 ‘아픈 손가락’처럼, 내가 늘 관심을 갖고 주목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게 매우 결정적인 순간에, 내 의도와 정면으로 부딪쳐서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내가 뭘 좀 해보려고만 들면, 거의 매번 추가적인 자원과 희생을 요구하면서, 내 앞을 가로막고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다. 때로는 촬영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 때문에 나는 애타게 기다려야 했고, 부단히 찾아다녀야 했으며 여러 차례 반복해서 시도해야만 했다.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고성능 카메라를 샀으며 보기 싫은 배경을 뭉개고 구성을 단순하게 만들기 위해, 무겁고 값도 비싼 밝은 렌즈를 사는 등 새로운 장치를 사거나 업그레이드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많은 노력과 자원을 착취해갔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배신당했고, 성공보다 실패를 안겨준 사례가 더 많았던 것 같다. 그런 존재를 내가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꽝입니다.”
지난 가을 고삼저수지에 새벽촬영을 갔을 때, 우연히 만난 사진가가 그렇게 말했다. 정말이지 그날은 완전 ‘꽝’이었다. 기대와 달리 호수에 안개가 끼지 않아, 낚시터의 너절한 풍경은 볼품없는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흐린 날씨로 인해 빛의 강약에 따른 명암의 변화가 없어서 풍경이 밋밋했으며 새벽부터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호수에 잔물결이 일었던 것도 사진에 좋지 않았다. 그 때문에 호수표면에 반영이 생기지 않고 거칠고 불규칙한 디테일(물결)만 잔뜩 나타났다.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것을 기대하고 새벽부터 차를 몰아 멀리까지 달려갔지만 사진은 한 장도 건지지 못하고 그날 나는 꼼짝없이 빈손으로 돌아와야 했다.
자연 풍경사진의 성패는 거의 그 날의 일기에 좌우되었다. 그러나 일기는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다. 나는 다만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과 정보를 이용해서 날씨를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당연하게도, 예측은 자주 빗나갔고 모처럼의 촬영 길이 헛수고로 끝나는 일이 흔했다. 어쩌면 나는 그 때문에 자연 풍경사진에 대한 흥미를 잃었던 것인 지도 모른다. 간혹 운이 좋아, 그럴듯한 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그 때도 사진은 ‘나의 자랑거리’가 되지는 못했다. 운이 좋았을 뿐, ‘내가 잘해서 좋은 사진을 찍었다’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어쩌다 건진 좋은 사진 한 장보다는 그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사진가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사진촬영은 노력한 대가가 보장되지 않는 불확실한 방식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흔하다. 노을이 지지 않을 수도 있고 원하는 장소에 행인이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다양한 외부환경에 따라 촬영을 방해하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생기기도 한다. 빛이 비치는 상태가 좋지 않거나 좋은 촬영포인트가 있더라도 접근이 용이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때 만약 의욕에 찬 사진가라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두고 이런저런 궁리를 하게 될 것이다. 렌즈 앞에 붉은색 그라데이션 필터를 끼우려고 들거나 지인에게 행인 역할을 부탁할 지도 모른다. 어쩌면 출입이 제한된 곳에 들어가려고 경비원을 매수하려고 들 지도 모른다. 사진가들은 그렇게 더 나은 사진을 위해 여러 방안들을 강구해서 시도하려고 들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피사체와 그 주변 환경을 바라보는 사진가의 입장은 매우 ‘피동적’이며 대체로 ‘속수무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들은 제한적이며,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는 활동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보조 장치를 써서 촬영조건을 약간 보완하거나 찍어온 사진을 윤색할 수는 있지만 모든 것을 자기 입맛대로 바꿔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측면은 사진이 지닌 근본적인 속성이고 사진가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종의 전제조건이기는 하다. 그러나 자기가 할 수 있는 역할이 많지 않다는 걸 자각하면, 사진가는 때로 무기력해지고, 촬영이 고달프고 달갑지 않은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일의 성과가 주로 행운에 좌우된다면 자부심을 갖기도 힘들 것이다.
요즘 나는 종종 AF(자동초점)속도가 빠른 미러리스 카메라에 35mm 단렌즈를 끼우고 시내 길거리로 나간다. 거리 사진에는 그게 최적의 장비라고 나는 생각한다. 초점 문제... 그리고 거리에서 만나게 되는 피사체들의 크기나 피사체와 마주쳤을 때 그것들과 나 사이의 평균적인 거리 등을 고려하면, 그 정도 화각이 적당하고, 남들 시선을 끌지 않고 민첩하게 움직이려면 작고 가벼운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원하는 장면을 만나면 촬영위치를 잡고 카메라 다이얼을 조작해서 사진을 찍는다.
어떤 날은 횡재를 만나서 의기양양해서 돌아왔지만 다른 날은 실망한 나머지 풀이 죽었다. 물론 성패의 원인은 주로 그 날 거리의 상황과 날씨 같은 외부조건이지, 특별히 내가 뭘 잘하거나 잘못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늘 이런 말로 아쉬움을 토로했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잘하기만 하면,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거리에 빛이 비치는 상태가 여의치 않고 마음에 드는 피사체가 도통 눈에 보이지 않았던 어느 날, 지쳐서 어떤 건물 입구의 계단에 앉아 쉬면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모델을 한 명 데려와서 저 앞으로 걸어가게 하면 완벽한 그림이 될 것 같은데?’
‘플래시나 조명장치를 써서 내가 원하는 빛을 만들면 어떨까?’
‘사람들에게 양해를 좀 구해서, 배경에 잡히는 행인들을 통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내 머릿속 그림대로 만들어서 사진을 찍는 편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러면 너무 쉽게 (다른 면에서 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행운을 구걸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리고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이런 상상까지 해보았다.
‘아예 전부 내 머릿속 그림대로 만들어서 사진을 찍으면 어떨까?’
세트장을 만들어 소품을 넣고, 필요한 인물을 동원하고 조명도 설치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아마 내 의도가 100% 반영된, 완벽한 사진을 얻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내 통제권 안에 들어오면, 나는 내가 품은 의도가 십분 반영된 이상적인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진촬영 현장의 상황을 일종의 ‘전제조건’처럼 받아들이면서 마냥 행운이 내 편이 되어주기만을 기원했다. 한데 그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을 붙들고 씨름하며 속앓이를 하다 보니 한계를 느꼈던 것이다. 따지고 보니, 사진을 찍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전부 소극적인 활동들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주로 피사체를 찾아 막연히 돌아다닌다거나 아니면 적당한 배경을 발견하면 앵글과 프레임을 맞추고 셔터속도와 조리개 값을 설정한 채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가 만족스러웠던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좀 더 적극적으로 활약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그런 상상까지 해보았던 것이다.
어쨌거나 사진은 대게 일정한 상황이 주어지고, ‘사진가는 주어진 상황에 대처하거나 이용하는 식’으로 찍게 된다. 일출을 담는 풍경사진가 앞에는 ‘일출’이라는 사건이 있고, 그는 주어진 환경조건에 부응해서 적절한 장비를 선택하고 상황에 맞는 촬영수법을 써서 사진을 찍게 된다. 길거리 사진가는 거리상황에 맞게, 가볍고 속도가 빠른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탐색할 것이고, 상업사진가는 자기가 맞이한 손님의 요구를 파악해서, 그 사람의 개성과 스타일에 맞는 사진을 찍으려고 할 것이다. 전부 ‘주어진 상황에 맞추는 식’이라고 볼 수 있다. ‘주어졌다‘는 건 내 앞에 제시되어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부분‘이란 얘기다. 원칙적으로는 답을 적어야지 문제를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그리고 사진가가 원한다면, 피사체와 주변 환경을 마음대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거리사진가는 모델을 동원하거나 행인들을 통제해서 장면을 연출할 수 있다. 상업사진가는 손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촬영을 거절하고 아예 다른 인물로 바꿔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럴만한 명분과 권한이 있다면, 그리고 자원(資源)이 충분하다면' 이라는 전제는 붙는다. 그러면 더 많은 조건들이 사진가의 통제권 범위 안에 들어오고 그는 자기 의도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덧붙여서, 요즘은 자연풍경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디지털 후보정을 통해) 그림을 그려서 보완하고 보충할 수도 있다.
물론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스타일의 모델을 선택해서 어떤 옷을 입혀서 행인으로 만들지 고민해야하고, 그 사람들의 연기를 연출하는 문제까지 사진가가 떠안아야 할 것이다. 제대로 완벽하게 하려고 들면 들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고 더 많은 수고와 비용이 들 것이다. 물론 이 대목에서, 사진의 정체성과 관련된 본질적 질문이 떠오를 수도 있다. 일의 핵심이 연출력과 아이디어가 되면, 사진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기 때문이다. 카메라 앞에 놓인 외부환경에 사진가가 개입하면, '전혀 다른 사진'이 되거나 '사진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고, 가치평가를 비롯해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하지만 그 부분은 일단 접어두고, 지금은 ‘현실적인 문제들’만 검토해보고 싶다. 사실 나는 오히려 이 부분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사진의 정체성을 비롯한 가치나 의미 같은 문제는 스스로 만족하면 그뿐이다. 그리고 설사 길을 잘 못 들었다는 걸 뒤에 알게 되더라도 (생각만 바꾸면 되기 때문에) 되돌아오기 쉽다. 그러나 열정이 엉뚱한 데 불붙게 되면, 공연한 낭비만 일삼을 수도 있다. 쉽게 말해, 물리적 자원의 문제가 개입되다 보니 (많은 자원을 퍼부었지만, 성과가 없고 별 다른 의미도 느끼지 못하게 된다면) ‘타격이 클 수도 있겠다’는 뜻이다. 지나친 노파심일 지도 모르지만, 미리 한 번 짚어본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영화감독은 블록버스트를 만들지 독립영화를 만들지 미리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사진가들도 그와 비슷한 결정을 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고 본다. 오래전에 이른 새벽에 헬리콥터를 대절해서 미국 메인주 북동쪽 어느 아름다운 마을 상공에서 찍은 사진을 소개하는 사진가를 보고 나는 무척 부러웠다. 세트장에 자기 머릿속 장면을 그대로 완벽하게 제작해서 사진을 찍었던 <포콩(베르나르 포콩. 프랑스 사진가)>의 열정에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회화작품으로서도 전혀 손색이 없는 그의 아름다운 사진들을 보았을 때, ‘나도 그런 길을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수백 명의 여성을 누드로 만든 다음, 도시 길거리에 배치해서 찍은 사진을 어떤 잡지에서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나는 사진에 놀라기 전에 먼저 그 사진가들의 무모함에 놀랐다. 사진 한 장에 그토록 많은 자원을 퍼부을 수 있는 그 열정과 능력이 부러웠던 것이다. 원래 ‘예술’은 그렇게, 끝을 모른 채, 미(美)를 향해 분출하는 욕망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값진 성과는 그런 욕망의 결과물이며 누구나 잘 하고 싶다. 사실 나는 요즘도 사진을 찍을 때면, 매순간 어떤(피사체와 주변 환경에 손을 대고 싶은) 갈등을 느낀다.
나는 사진의 핵심이슈 중 하나는 ‘자원(資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비단 값이 비싸고 성능 좋은 장치에 대해서만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기본이고, 피사체를 만나는 데도 자원이 필요하다. 사진은 ‘현실의 공간에 현존하는 사물’을 피사체로 삼게 되므로 사진가가 사진을 찍으려면 부단히 움직여야한다. 다양한 장소에 가야하고 다양한 위치와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자동차 휘발유 값과 비행기 티켓 값이 들고 여행에 필요한 경비가 들 것이다. 그뿐 아니라, 피사체를 직접 연출하고 싶다면, 모델과 촬영 소품과 세트장을 만들기 위한 인력과 자재 등이 필요하고, 스스로 제작과 연출을 위한 기량을 갖추거나 따로 인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예의 그 동영상을 촬영할 때도, 사람을 동원해서 배경의 행인까지 연출할 수도 있는 문제다. 조명을 비추고, 그래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아예 세트장을 만들어서 찍을 수도 있을 것이다. 촬영자는 자기 머릿속에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그런 장면을 만날 수 없으니 (촬영을 효율적으로 하려고) 만들어서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현실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현실적인 문제’란 바로 머릿속 아이디어를 현실의 공간에 구현할 때, 그리고 연출을 하거나 그림(그래픽)을 그리는 데 자원이 필요하다’는 부분이다. 아마도 자본의 원리에 따라, ‘많이 투자할수록 좋은 작품이 나온다’는 식의 얘기가 설득력을 띨 수밖에 없을 것이다.
화가는 (돈을 한 푼도 들이지 않고 오직 상상력만으로) 머릿속 그림을 화폭 위에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진가는 원하는 게 있어도, 현실의 공간에 존재하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다. 무엇을 상상하든, ‘현실화’ 혹은 ‘가시화’해야만 일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만약 모든 것을 통제권 범위 안에 넣어, 자기가 상상하고 의도한대로 완벽하게 구현해서 사진을 찍고 싶다면, 많은 자원을 퍼부어야 할 것이다. 모델과 세트장이 필요하고, 찍을 수 없는 것을 찍기 위해 특별한 장치를 사야할 수도 있으며, 쉽게 갈 수 없는 곳에 가거나 접근할 수 없는 것에 접근하는 데도 많은 비용이 들 수 있다.
열정적인 사진가 앞에는 ‘자원을 얼마나 투입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이슈로 등장할 것이고, 곧바로 ‘명분’ 문제가 대두될 것이다. 그러니까 ‘많은 자원을 들여서 무엇을 만들 때는,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작품이 많은 돈을 벌어들일 가능성이 있다든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런 소모전에 뛰어들 수도 있는 문제다. 하지만 그런 확신도 의지도 없다면, 굳이 거기 발을 들여놓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내 생각에 만약 아마추어사진가가 단순히 ‘사진의 형식미’를 위해 그렇게 한다면,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다. 또한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니지만, 전문사진가라 하더라도 정말 그런 길을 갈 것인지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는 있을 것 같다.
사진에서 ‘통제할 수 없는 요소들’을 해결해서 통제할 수 있게 만드는 데는 자원이 필요하다. 한데 (다행스럽게도) 자원을 동원하지 않고도 더 많은 통제권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피사체를 가까운 거리에서 촬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촬영거리가 가까울수록 자원을 활용하기 용이하고 사진가의 통제권도 강력해진다. 사진가가 자기 사진을 위해, 뭔가 활약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커진다는 뜻이다. 반대로 촬영거리가 멀면 통제력은 약해지거나 통제가 거의 불가능해진다. 원거리에서 사진을 찍을 때는 앵글과 프레임을 창의적으로 조작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하다. 카메라와 피사체간의 거리가 멀어서 앵글조작이 거의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앉아서 찍거나 일어서서 찍거나, 위치를 좌우로 약간 이동해도 사진의 구성에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다. 장치의 기능이나 성능에 따른 차이도 잘 나타나지 않아서 값이 비싼 장치가 반드시 좋은 사진을 제공한다는 보장도 없다.
예를 들어, 자연을 대상으로 풍경 사진을 찍는 경우에는 따로 연출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대부분 주어진 상태 그대로 촬영하게 되고, (공간이 넓기 때문에) 프레임 선택도 매우 제한적이다. 따라서 지정된 촬영 포인트에서 멋진 풍경이 나타나주기만을 기다리면서 일정한 구도로 셔터를 누르는 게 사진가가 하는 역할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하면 근거리에서 찍는 인물촬영에서는 사진가의 역할이 훨씬 더 커진다. 자기가 움직여서 프레임과 앵글을 마음대로 변화시킬 수 있고, 결과물인 사진에도 그 변화에 따른 차이가 확연하게 보인다. 조명장치를 활용할 수 있고 인물의 포즈를 연출하거나 더 나은 배경이 있는 데로 이동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야생화 꽃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가의 역할이 인물사진보다 (더 가까운 거리에서 사진을 찍게 되므로) 훨씬 잘 부각된다. 작은 꽃을 근접해서 촬영하다 보니 사진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은 것이다. 사진가는 꽃이 핀 주변 환경을 어느 정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 주변의 풀이나 나뭇가지를 주워 전경에 배치해서 구성에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간단한 소품을 써서 (돈을 들이지 않고) 배경을 꾸밀 수도 있다. 설사 모델(꽃)이나 배경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자기 노력과 기지로 상당부분 커버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거리가 가까우면 장치 조작에 따른 효과도 증폭된다. 약간의 움직임만으로 구도를 다양하게 바꿀 수 있고, 초점과 피사계 심도를 조절할 때, 그 변화가 사진에 뚜렷하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사진기술’이 제대로 먹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가는 꽃사진을 찍을 때, 역량에 따라 다양한 수완을 발휘해서 자기 미적 감각을 한껏 보여줄 수 있다. 그야말로 ‘자기가 하기 나름’인 것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운보다는 실력과 노력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을 보면, 좋은 꽃송이가 이상적인 배경 앞에 피어있는 귀한 장면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던 사진가의 노력과 정성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그의 예민한 구성감각과 연출솜씨 등도 확연하게 보인다. 실제로 그 분야에서 좋은 사진을 찍는 사람은, 운이 좋거나 부지런한 사람이라기보다, ’솜씨 좋은 사진가‘라고 할 수 있다.
정리해 보면, 야생화 사진을 찍을 때는 피사체와 그 주변 촬영조건에 대한 사진가의 통제력이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넓어서, 사진가들은 자기효능감을 마음껏 누리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분들은 꽃사진에서 일종의 ‘자기 통제력’을 즐기는 것이다. 언제나 자기 능력만큼, 그리고 노력한 만큼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쉽게 빠져들게 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통제력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큰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아마추어 사진동무들은 야생화 꽃사진의 바로 그런 면을 좋아하는 것이다.
예술을 향한 열정은 치열하고, 무조건 ‘완벽’으로 치닫게 되어있다. 아마추어사진가가 사진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만약 사진을 그런(예술적) 관점에서만 바라본다면 (머릿속 그림을 만드는 데) 어떤 자원이 얼마나 많이 필요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한계가 있고, 그 끝이 눈에 빤히 보인다. 더욱이 기업이 아닌 개인의 입장이라면, 최선을 다하는 경우라도, ‘산업의 흉내를 내는 수준’에 그칠 것이다. 개인이 산업을 이기거나 따라다닐 수는 없는 문제다. 결국은 ‘적당히 할 수 밖에 없다’는 얘기로 귀결되고, 그건 전혀 ‘예술적인 태도’가 아니다. 열정이 선을 넘으면 작가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어차피 누구나 현실적 한계를 고려해서, 욕망에 제동을 걸고 규모를 제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야생화 사진은 너무 많은 자원을 들이지 않고도, 제작에서 사진가가 자기 통제력을 높여서 창작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한 가지 방편이 된다. 아마도 야생화 꽃 사진을 좋아하는 내 아마추어사진동무들은 사진을 향한 열정에 순응해서 막무가내로 내달리다보면 어떤 결과가 올지 빤히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별 무리 없이 자기가 할 수 있는 합리적인 방법을 찾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생각에, 지나치게 인위적인 치장에 몰두하지만 않는다면, 그 정체성을 크게 해치지 않고, 사진을 즐길 수도 있는 것 같다.
[ 바보는 삶이 본질적으로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똑똑한 사람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무의미하다는 걸 알면서도 나름의 방식대로 살며 즐긴다. (다니엘 튜더. 고독한 이방인의 산책) ]
물론 그 아름다운 꽃 사진은 ‘실제현실’을 그대로 반영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따라서 그런 사소한 연출행위들이 (사진에 어떤 메시지를 담기 위해서라 아니라) 오로지 형식미를 위한 노력일 뿐이라면 ‘무의미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스스로 거기서 어떤 의미를 느끼고 즐길 수만 있다면 상관없는 일이다. 흔히 고지식한 사람들은 삶에서 의미를 찾는 일에서 조차 (마치 주어진 소명처럼) 정해진 답이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게 단지 ‘자기 선택의 문제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야생화 꽃사진에는 보람과 즐거움을 누릴만한 요소가 생각보다 많은 편이다. 아마 한 번 경험해 보면 누구라도 빠져들 것이다.
오래전 어떤 모임에서 처음으로 야생화 사진촬영에 따라 갔던 날이 기억난다. 어떤 고수가 바짓단을 걷어서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이) 온통 멍이 든 자기 다리를 나에게 보여줬다. 그 때 나는 '그렇게 까지!' 라며 의아해 했다. 하지만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숲을 뒤져서 적당한 꽃을 찾아내면, 촬영할 방향과 거리를 가늠한 다음, 그 앞에 엎드려서 앵글과 프레임을 맞춘다. 피사체와 눈높이를 맞추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실제로 서서 보면 아무 것도 안 보인다) 주로 엎드려서 촬영을 하게 된다. 눈앞의 장면은 뷰파인더를 통해서 바라볼 때 비로소 구체화된다. 세상의 일부가 네모난 틀에 갇혀 액자속 그림이 되는 것이다. 좋은 빛이 드리워진 아름다운 꽃송이가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장면을 보면 짜릿한 전율을 느끼게 된다. 얼른 사진으로 담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진다.
하지만 들뜬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틀을 이리저리 움직여서 신중하게 구도를 결정한다. 피사체뿐 아니라 전경과 배경을 동시에 보면서, 구성에 대한 자기 미적 감수성을 십분 발휘해서 감각적으로 잘라내야 한다. 명암의 분포상태를 확인하고, 네 군데 테두리를 하나하나 살펴 보며, 어떤 것이 어떤 형태로 잘려나가는 지, 그 부분이 전체 구성에는 어떤 영향을 주는 지도 점검한다. 구도가 결정되면, 극도로 집중해서 초점을 미세하게 조절해서, 숨을 죽이고 셔터를 누른다. 손이 떨리거나 호흡이 흩어지면 사진은 여지없이 망친다. 그렇게 구성과 초점에 몰두하다 보면 (하필 돌 위에 엎드리는 바람에) 무릎이 다 까져도 아픈 줄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진은 거의 온전히 '내 노력의 결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