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여행 25일차 - 노르웨이의 웅장한 자연과 만나다

by 이 범수


진정한 노르웨이 여행의 시작이었다. 25일간의 여정 중에서도 오늘만큼 자연의 웅장함에 압도된 날이 또 있을까 싶다. 아침부터 마음이 설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프랑스의 우아한 산들, 스위스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알프스와는 또 다른 감동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트롤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트롤스티겐

첫 번째 목적지는 트롤스티겐(Trollstigen)이었다. '트롤의 길'이라는 뜻의 이 도로는 노르웨이에서도 가장 유명한 관광 명소 중 하나란다. 1936년에 완공된 이 산악도로는 해발 858미터 높이에서 11개의 헤어핀 커브를 그리며 험준한 산을 가로지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한 폭의 그림이었지만, 동시에 아찔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좁은 도로, 가파른 경사,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커브. 이 길을 만든 사람들의 용기와 기술에 새삼 감탄했다. 1930년대에 이런 길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당시 노르웨이 정부는 관광업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 험준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이 대담한 프로젝트를 추진했다고 한다.

전망대에 도착했을 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발 아래로 펼쳐진 풍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스티그포센(Stigfossen) 폭포가 320미터의 높이에서 하얀 물줄기를 떨어뜨리고, 그 아래로는 이슬텐달렌(Isterdalen) 계곡이 깊숙이 파여 있었다. 노르웨이의 산들은 정말 남성적이고 웅장했다. 우리나라의 부드러운 산세와는 전혀 다른, 빙하가 깎아낸 듯한 날카로운 절벽들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많지 않은 한적한 곳을 찾아 대금을 꺼냈다. 북유럽 고지대의 맑은 공기를 가득 들이마시고 대금을 부는 이 순간이야말로 나만이 누리는 여행이 진정한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악은 언어를 초월한다더니, 이 웅장한 자연 속에서 부는 대금 소리는 마치 자연과 대화하는 것 같았다.

바위틈의 향나무가 주는 깨달음

차를 세워두고 산을 오르다가 놀라운 광경을 발견했다. 바위 틈에서 자라고 있는 향나무 한 그루였다. 이 높고 척박한 환경에서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모습이었다. 바위를 따라 마치 덩굴식물처럼 기어가며 자라고 있었다.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오랫동안 가꾸어진 분재를 보는 것 같았다.

이 향나무를 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혹독한 환경 속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형태를 바꾸어가며 적응했지만, 향나무라는 본질은 결코 잃지 않았다. 여전히 그 특유의 향기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인간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여러 시련과 변화 속에서도 유연하게 적응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본질은 지켜나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지혜일 것이다.

구드브란드스유베트의 물결과 인생 이야기

트롤스티겐을 지나 구드브란드스유베트(Gudbrandsjuvet)로 향했다. 이곳은 1901년에 발견된 협곡으로, 빙하가 녹은 물이 수천 년에 걸쳐 바위를 깎아 만든 자연의 조각품이다. 높은 산에서 내려온 물이 좁은 협곡을 통과하며 거대한 강물을 이루어 흘러내리는 모습은 자연의 힘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강가에서는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했다. 한 쌍의 젊은 연인이 차가운 강물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8월이라고는 하지만 노르웨이 산간 지역의 물은 여전히 차가룽 텐데, 나도 발을 물에 담가보니 20초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들에게는 그런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차가운 물도 따뜻하게 느껴지는 걸까? 젊음이란 정말 아름답고 용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10대로 보이는 딸아이 둘과 여행 온 미국인 가족의 아빠기 사진을 찍고 있어서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다.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벌어졌다. 남편은 배경의 모든 것을 담아달라고 했고, 부인은 나체의 연인들은 절대 나오지 않게 해달라고 당부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부부간의 이런 차이는 비슷한가 보다.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나 가정을 이루고, 때로는 의견이 다르지만, 그런 차이 속에서도 서로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조금 더 내려가니 강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는 장관을 볼 수 있었다. 물의 힘이 바위를 깎아내며 만든 이 협곡은 마치 지구의 역사책을 보는 것 같았다. 수만 년, 아니 수십만 년의 시간이 만들어낸 예술 작품이었다.

실테 호수에서의 평온한 시간

실테(Sylte)에 도착했을 때 또 다른 커다란 호수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수많은 요트가 정박해 있는 모습은 마치 그림엽서 같았다. 노르웨이 사람들의 여유로운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긴 겨울을 견디고 맞이한 여름을 최대한 즐기려는 그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호수 주변을 거닐며 한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이렇게 맑고 깨끗한 호수인데도 물고기가 보이지 않았다. 사실 지금까지 여행하면서 본 여러 호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라켄에서 만난 할머니는 호수에 물고기가 많다고 했는데, 왜 눈에 띄지 않을까? 아마도 물이 너무 깊거나, 아니면 물고기들이 다른 곳에 숨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연은 항상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호숫가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며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노르웨이의 광활하고 험준한 자연을 제대로 보려면 차량 없이는 힘들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29일까지의 렌터카 예약을 마쳤다. 미리 정해둔 일정에 매여 있기보다는 현지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대응하는 것이 더 좋은 여행을 만드는 법이다.

롬스달스곤돌렌에서 바라본 전경

하루의 마지막 일정으로 롬스달스곤돌렌(Romsdalsgondolen) 전망대를 찾았다. 케이블카를 타고 해발 708미터 높이까지 올라가니 온달스네스(Åndalsnes) 시내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롬스달 협곡과 라우마 강이 만드는 풍경은 한 폭의 파노라마 사진 같았다.

해가 서서히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오늘 하루를 되돌아보았다. 아침에 느꼈던 설렘부터 트롤스티겐에서의 감동, 바위틈 향나무가 주는 깨달음, 구드브란드스유베트의 웅장한 자연, 그리고 실테 호수에서의 평온함까지. 하루 종일 자연이 주는 다양한 메시지를 받았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이는 온달스네스는 인구 2천여 명의 작은 도시다. 1870년 라우마 철도의 종착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이곳은 이제 등산과 관광의 거점이 되었다고 한다. 작지만 알찬 도시의 모습이 정겹게 느껴졌다. 큰 도시의 번잡함 없이도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벨기에 가족과의 만남

호텔로 돌아와서는 뜻밖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벨기에에서 온 한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20년 전, 큰아들이 태어나기 전에 3주간 노르웨이를 여행했던 추억이 너무 좋아서, 이번에는 아이들과 함께 다시 찾았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벨기에에서 여기까지 차를 몰고 왔다는 점이었다. 무려 4,000킬로미터를 운전해서, 독일을 지나고 덴마크에서는 페리를 이용해서 노르웨이까지 온 것이다. 20년 전의 추억이 그토록 강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20년 전에 감동받았던 모든 장소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여행자끼리 나누는 정보는 어떤 가이드북보다도 생생하고 소중하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조언들은 앞으로의 여정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벨기에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여행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아름다운 추억은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소중해지고, 그 추억을 다음 세대와 함께 나누고 싶어진다. 여행은 단순히 새로운 곳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평생 간직할 보물을 수집하는 것이다.

오늘 하루의 경험을 통해 노르웨이라는 나라가 주는 독특한 매력을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웅장한 자연, 그 자연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포용하는 광활한 대지. 앞으로 며칠 더 이 땅에서 어떤 이야기들을 만나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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