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의 '푸른 솔'과 '벚꽃'
비 온 뒤 꽃나무들은 더 생장왕성하여 햇볕이 내리쬐는 오늘 같은 날에는 눈부시게 화려하다. 확 밀려드는 강렬한 색들에 눈이 어릴 정도다. 특히나 붉은색, 진분홍색의 영산홍들은 붉기가 너무 강렬하여 나는 숨 막히는 답답함을 느낀다. 그 옆에 흰색 영산홍이 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눈이 타버렸을 것이다.
붉은 꽃무더기를 피하려고 주위로 눈길을 옮겨가면 키 큰 소나무와 연초록의 목련나무 등이 시원하게 드리워져 있다. 그제사 이 화려한 꽃들이 화사한 그림 한 폭으로 어우러져 다가온다. 김지하 시인이' 새'봄이란 시를 왜 노래했는지 알겠다.
벚꽃 지는 걸 보니
푸른 솔이 좋아
푸른 솔을 좋아하다 보니
벚꽃마저 좋아
(김지하, 새봄 9)
봄날 짧게 피었다 지는 벚꽃이 순간이라면, 늘 푸른 소나무는 영원이다.
벚꽃은 소나무가 있어야 순간이 되고, 소나무는 지는 벚꽃이 있어야 영원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차를 타고 길게 가다 보면 우리나라 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변함없이 늘 푸른 소나무도 어느 순간에는 무겁게 다가온다.
또, 푸르기만 한 것이 주는 변화 없음이 때로는 지겨워, 알록달록한 꽃들을 찾아 나서게도 된다.
서로의 관계 속에 규정되는 순간과 영원, 변화와 변화 없음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4월 봄산에 피어있는 진분홍 진달래가 에일 듯이 가슴을 녹이는 이유도 그렇다. 그 곁에 푸르른 소나무가 있기 때문이고, 아직 찬기운을 품고 있는 소나무가 생기롭게 보이는 것도 진달래 붉은빛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공원의 붉은 영산홍은 푸른 나무가 있어서 화사하게 보인다.
서로의 다름이 어우러져 서로를 비추기 때문에 존재의 품격은 더 나은 빛을 얻는 것일 거다.
공원의 붉은 영산홍 울타리, 그 곁에 푸른 나무들을 함께 보니 공원이 아름답다.
아이들이 노는 공원에 붉은 영산홍만 있었다면, 또 푸른 나무들만 즐비하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살아가는 일이 다 이럴 것 같다.
나와 다른 색깔의 사람이 있어서, 나와 너는 서로 신비롭게 빛나는 사람세상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