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기까지
며칠 전 뒷산에서 만난 바람은 잠깐 다녀간 선물이었나.
마음 설레게 해 놓고 다음날 곧바로 거두어가더니, 추석 연휴 햇살은 스스로 불타버린 열가루 같다. 뜨거운 추석날을 보내며 모두가 '세상에 이런 추석 더위는 처음이야' 했는데, 오늘 바깥은 더 따갑다. 바람 불지 않는 마당은 참숯을 구워낸 후 열기로 가득 차 있는 숯가마 속 같다. 땅콩을 널러 마당으로 나온 내 팔뚝과 얼굴과 정수리, 신체의 모든 것에 열가루가 파고든다. 살이 아프다. 몸을 웅크리고 햇살에 순종하며 집안으로 뛰어든다.
이틀 뒤 오늘은 부슬비가 내리다가 밤이 되자 빗줄기가 세차다.
그동안 못 씻은 세상 얼굴이며 몸을, 흠뻑 적셔서 씻어 내리고 있다. 솨아솨아. 그칠 줄 모르는 이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불어난 계곡물이 먼 데서 흘러가는 것 같다. 빗소리에 마음을 실어 한껏 취하던 때가 언제였던가. 점점 무감해진다. 비 오네. 많이 오네. 억수 같네. 빗소리만 또렷하고 마음은 소리 내지 않는다. 이것도 흐뭇하다.
집중비가 내려친 뒤 이 가을은 안개와 눅눅함으로 아침을 연다.
따갑던 햇살은 갈초록 나뭇잎에 점묘되고, 햇살을 업은 나무는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날아가던 흰나비가 그림자 속으로 들어간다. 잎 먹기를 멈춘 여름벌레들이 가을을 맞아 몸을 바꾼 모양이다. 하얀 나비는 죽은 이의 영혼이 그 사람을 못 잊어 나비로 찾아온 것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나는 저 나비가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남편이 망자가 된 해에 우리 집 화단엔 그토록 많은 하얀 나비가 왔었다. 걱정돼서 왔는가, 하고 묻는데 나비는 물에 젖은 채 눈앞에서 유영했다. 그 뒤로도 해마다 하얀 나비가 찾아오면, 나를 보러 왔구나 하고 위로 삼았다. 올해는 하얀 나비가 덜 보여 서운함이 있었는데, 이제 서운함을 내려놓는다.
오늘은 뒷산 숲길을 걷는다.
키를 키운 소나무와 참나무 숲에 바람이 선선히 분다. 숲에 이는 바람소리가 파도소리 같다. 나는 겸연쩍게 연암 박지원의 문장을 떠올린다. '소나무에 이는 바람에서 파도소리를 듣는다면 도를 깨친 것이다'. 왠지 신비롭고도 도학적인 느낌이 난다. 이 문장에 사로잡힌 지 오래되었지만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을바람을 맞는 오늘은 처음처럼 새롭다. 선인의 문장이 오늘날의 이 평범한 사람을 부추겨준다. 시간을 초월하여 옛사람을 연결하는 오작교 같은 글이 고마울 따름이다.
눈앞에는 애타게 기다리던 가을 첫 소식이 먼저 와 있다. 안으로 여름의 열기를 다 채운 도토리가 알몸으로 나와 인사를 한다. 좀 부끄러운지 또르르 굴러가다가 붉어진 몸을 멈춘다. 나는 주을까 말까 잠시 망설인다. 떨어진 것과 눈을 맞추는데, 여기저기 투둑투둑 적막을 깨는 소리에 좀 전의 생각을 접는다. 숲에서는 내가 주인이 아닌데 헛욕심을 낸다 싶었다. 부끄러움 때문인지 살짝 열기가 오른다. 조금 더 걸어가니 잡목 사이에서는 마지막 열정을 바치는 소프라노 매미소리 그 아래로 가을 풀벌레들의 높은음, 낮은음이 틈을 주지 않고 야단스럽다. 여긴 가을이구나.
사람들의 거리는 아직 뜨거워도 푸른 숲에는 이미 가을이 와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어쩌면 당연한 일. 숲의 생명들이 사람보다 더 예민한 감각을 가졌기에 가을이 오고 있음을 먼저 알아차리는 것은.
나는 숲에서 겸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