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우산에 기부를 하게 된 계기
아이를 출생을 기다리는 마음은 누구나 비슷하고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행여나 좋지 않은 요소로 엄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영향을 미칠까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매번 병원에 가서 심장소리에 감동하고, 산과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반도 이해 못 했으면서 마지막에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안심한다.
머리가 많이 작은데요.
출산 예정일 한 달인가 두 달 전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이런 얘기는 처음 들어서 반응을 헤매고 있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머리 크기가 많이 작은데, 나쁜 것은 아니지만 태어나 봐야 알 수 있다고 했다. 이미 나의 뇌 속 알고리즘에는 '머리가 작다'가 입력이 되어 버렸고, 불안의 작디작은 알갱이가 되었다.
그렇게 나의 딸은 세상 빛을 보았고 머리가 작은지 큰지 세모인지 네모인지 그런 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나와 똑 닮은 그녀의 얼굴에 매료되었고 그로 인해 나의 뇌는 강제 리부팅 되었다. 머리가 작은 것은 건강에 아무 문제가 없었고, 다른 아이들과 나란히 두면 얼굴이 유독 작은 나의 딸이 더욱 귀여웠다. 물론, 아빠 필터를 사용한 결과다.
분유를 먹으면 토하는 아이.
분유를 먹는 아이의 모습은 액티브하다. 온 힘을 다해서 젖병 안에 있는 내용물을 흡입하는 모습을 보면 내 생명력이 차오르는 것 같다. 이때, 에어팟 케이스보다 작은 아이의 손에 내 손가락을 대면,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꼭 하고 쥐어준다. 젖병에서 쌕쌕 소리가 나면 아이를 바로 세워서 내 품에 안고 등을 쓸어주거나 토닥여 준다. 끄윽. 꺽. 트림 소리가 시원해서 내 귀가 맑아진다. 그와 동시에 내 등뒤로 뜨끈한 느낌이 흐른다. 토했다. 방금까지 육아의 행복에 젖었다가 바로 걱정머신으로 모드가 바뀐다. 왜 먹을 때마다 토하는 거지? 이렇게 많이 토하면 배고프지 않을까? 혹시 심각한 병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줘서 토하는 건가? 나는 혹시 병균 덩어리가 아닐까? 이런 아빠의 철없는 걱정과는 달리 아이는 무럭무럭 자란다.
100일의 코로나.
100일 즈음. 고대하던 100일의 기적은 기별도 없고, 새벽에 고열로 시달리는 아이를 데리고 우리는 택시를 타고 응급실로 내달렸다. 2022년 12월 말. 코로나가 잠잠해질 무렵이었다. 아내와 나, 그리고 100일 된 딸아이는 모두 코로나 양성 진단을 받았다. 아내와 아이는 특별 병동에 입원했다. 듣자 하니 링거를 맞기 위해 그 조그마한 아이의 혈관에 바늘을 찔렀다는데 이게 또 난도가 높은 일이어서 몇 번 실패했다고 한다. 들으면서 눈물이 났다. 아이의 아픔이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 같다.
큰 문제는 없어서 3일 만에 퇴원해 집에 돌아왔지만, 나의 걱정은 한이 없었다. 여전히 미열이 있었고, 왠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였다. 100일의 기적이 찾아온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밤동안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숙면을 취하는 나의 딸과는 다르게 나는 잠도 못 자고 계속 확인을 해야 했다. 한 번도 자세를 바꾸지 않고 잠들어 있는 아이의 가슴과 배가 오르내리는지 확인하고, 그마저도 마음에 차지 않아서 침 묻힌 손가락을 코밑에 갖다 대어 공기의 순환을 확인했었다.
우리 아이가 늦는 것은 아닐까?
12개월, 첫 돌이 지나면서 주위의 다른 동년배 아이들과는 성장의 차이가 있기 마련이다. 일산에 있는 A는 벌써 킥보드를 타고 다닌다더라. 부평에 있는 B는 삼겹살을 먹는다더라. 그때 같이 봤던 C 있지? 그 애는 동요에 맞춰 춤추더라. 아내의 휴대폰에는 불특정 다수의 아이들보다 월등한 성장치를 보이는 증거 영상이 가득 쏟아졌다. 우와, 진짜?, 정말이네, 대단하다 등 오토매틱 리플라이 시스템을 가동하면서 아내가 내미는 영상에 큰 흥미를 두질 않았었다. 그날 까지는.
아내는 흥분하면서 나에게 다른 아이의 영상을 보여줬고, 나는 내 눈과 귀로 믿지 못할 영상을 보았다.
"그덤 내가 선배 마메. 탕탕 후두후두 탕탕 후두두두두."
영상의 아이는 그 유명한 탕후루 챌린지를 하고 있었다. 멀리 있는 누군지 모르는 유튜브나 틱톡 속의 인물이 아니다. 언젠가 키즈카페에 같이 갔던 D란다. 그 애가? 이렇게 말을 잘한다고? 심지어 박자도 맞추고 있어. 듣자 하니 엄마 아빠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문장으로 만들어서 표현한다고 한다. 우와. 빛이 난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언어에 대해서는 부럽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갖고 싶다.
이에 계시를 받은 아내와 나는 딸아이에게 문장으로 말하도록 교육이라는 이름의 재촉을 했지만, 두 돌이 지난 지금도 '주세요' '아파' '아기' '베베' 등 한마디를 넘기지 못한다. 아빠의 이름을 열심히 가르쳤지만, 본인 이름을 말하는 것이 한계였다. 그런데 어린이집 남자친구들 이름은 잘도 말하는 것을 보면 힘 빠진다.
다른 아이들과 비교를 하면 끝이 없지만, 성장이 빠른 아이들을 보면 이런 걱정이 들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가 늦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나의 마음이 간사하다.
회사에서 일하다 보면, 낮지 않은 빈도로 온라인에서 어린이 재단 광고를 볼 수 있다.
'장애를 갖고 버려진 아이들을 도와주세요.'
'광대뼈 없이 태어난 아이를 도와주세요.'
'백혈병으로 고통받고 있는......'
무심코 영상을 보면 가슴이 쓰라리다 못해 깨진다. 영상 속의 아이들은 자신의 탓이 아닌 병과 환경으로 고통을 받고 있고 그 고통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어쩌면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내내 따라다닐 수 있다. 한창 뛰고 놀 아이가 코와 입에 호스를 꽂고 침상에 누워 있고, 선천성 질병으로 얼굴이 다른 아이들과 달라 놀림거리가 되는 아이도 있다. 부모를 모르는 버려진 아이들과 건강하지 않은 환경에서 힘겹게 자라나는 아이들은 셀 수가 없이 많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다행이다'
내 아이보다 못한 환경. 내 아이보다 불우하고 내 아이보다 갖지 못한 그 아이들. 그들을 보며 나는 내 아이가 건강하고 문제없이 성장하고 있다는 것에 안심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간사하다.
나보다 나은 배경을 줄 수 있는 부모를 질투하고, 내 아이보다 성장이 빠른 아이를 부러워하며, 내 아이의 작은 생채기에 어쩔 줄 몰라하는 아빠가 나다. 누군가가 보기에 나는 만족하고 행복할 법하지만, 여전히 나는 불만족스럽고 힘들어한다. 그러다 위와 같은 아이들을 보면 다시 안심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내 이런 간사한 마음을 깨닫고 매달 급여일에 적은 금액이나마 허용 가능한 한도 내에서 초록우산 어린이 재단에 기부하고 있다. 솔직히 아직 이 기부하는 내 마음을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연민 혹은 동정일 수 있다. 당신들을 보고 힘을 얻는 것에 대한 미안함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나의 기부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마음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만한 금액도 아니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기부를 빙자한 비용 지불로 나의 간사한 마음과 줄다리기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