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롤드 하비의 <물놀이하는 소년들>
“하지 마, 시릴! 시릴!”
운전을 하고 있던 사만다는 자신의 뺨을 세게 할퀴고 있는 시릴의 손을 꽉 잡는다. 서둘러 도로 옆에 차를 세운다. 울부짖는 사자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소년을 힘껏 안아준다. 그는 사만다의 품에 안겨 흐느낀다.
시릴은 열한 살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아 고아원에서 살았고, 늘 탔던 애착 자전거도 잃어버렸다. 시릴의 꿈은 자전거와 아버지를 다시 찾는 것이다.
이를 가엾게 여긴 동네 미용사 사만다는 주말마다 위탁모가 되어 시릴과 함께 아버지의 흔적을 좇았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가 팔아버린 자전거를 되찾아주고, 세상에 다시없는 비정한 아버지도 만나게 해 준다. 하지만 아버지는 시릴을 또 외면한다.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매몰차게 밀어낸다. 소년의 꿈 하나가 물거품이 된다.
사만다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시릴의 행동이 이상했다. 자신의 뺨을 마구 할퀴고 머리를 사정없이 차 문에 들이박는다. 자해였다. 손톱에 긁힌 볼이 빨갛게 부푼다. 사만다는 시릴을 꼭 껴안았다. 그리고 이렇게 속삭였다. “됐어, 괜찮아. 됐어!” 두 사람을 다독이듯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 2악장이 화면 가득 흐른다.
다르덴 형제 감독의 영화 <자전거 탄 소년>의 한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영국의 뉴린 파° 화가 해롤드 하비(Harold Harvey, 1874~1941)의 <목욕하는 소년들(Boys bathing)>이 유려한 선율과 함께 다가왔다. 목욕하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영화도 아닌데 말이다.
한여름 낮. 물가에서 아이들이 멱을 감고 있다. 웃통을 벗은 두 아이가 곧 물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물속에서는 이미 한 아이가 자맥질에 신이 났다. 둑에는 아이들이 젖은 몸을 말리는 듯 물을 향해 앉아 있다. 그 아이들 옆에 한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등을 진 채 정면을 보고 있다. 얼굴이 빨갛게 그을렸다. 왠지 낯이 익다.
빨간 뺨을 가진 ‘시릴’이었다. 영화 <자전거 탄 소년>의 시릴, 지금 그 시릴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다른 아이들은 맨발인데 시릴 혼자 신발을 신었다. 물에 들어가지 않은 듯하다. 뺨이 빨간 소년은 왜 신발을 신고 있을까?
소년은 도시에서 왔다.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였다. 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로 도시는 언제나 회색 아침으로 시작되었다. 아버지는 일터에 나갈 때마다 아이에게 절대로 밖에서 놀아선 안 된다고 당부하곤 했다. 바깥은 공기가 나빠서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면서.
어느 날 아버지는 일하던 중 호흡곤란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소년은 어부인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바닷가 마을 콘월(Cornwall)까지 오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부터 고기를 잡으러 바닷가로 나가야 했기 때문에 소년은 하루 종일 집에 있었다. 혼자 집에 있으려니 지루하고 심심했다. 병원에 있는 아버지 걱정에 끼니도 거르는 날이 태반이었다. 소년은 점점 말수도 적어지고 야위어갔다. 하루라도 빨리 아버지가 퇴원했으면….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싶었다.
이른 아침, 고기 잡는 그물을 손질하던 할아버지는 소년에게 말했다.
“얘야, 오늘은 날이 무척 더울 것 같구나. 동네 앞 개울로 가서 아이들과 함께 수영이라도 하렴.” 소년은 할아버지가 챙겨준 아침을 먹고 동네를 돌아보았다. 모두가 낯설다. 밝게 빛나는 태양도, 멀리 보이는 바다도…. 개울에는 아이들이 일찍부터 나와 수영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놀고 있는 둑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소년은 수영을 해본 적이 없다. 개울이 어느 정도 깊은지 알 수도 없었다. 물에 들어가기가 두려웠다. 만용을 부렸다가 허우적거리면 놀림거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이 말이라도 붙여주었으면 좋으련만, 노는데 정신이 팔린 아이들은 저마다 바쁘다. 소년은 멍하니 아이들만 바라 볼뿐이다. 한낮 햇빛은 소년의 약한 뺨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나도록 소년은 신발도 벗지 않은 채 개울만 바라보았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 소년을 안아주고 싶다. 소년의 모습은 어린 시절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어느새 '시릴'앞에 서있는 나.
볼 빨간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몸을 숙여 앉아 있는 소년을 영화 속 사만다처럼 꼭 껴안았다. 그리고 소년에게 속삭였다. ‘됐어, 괜찮아. 됐어!’ 소년 시릴은 그동안 참아왔던 감정이 밀려 올라와 서러운 울음을 터뜨렸다.
물가의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아이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첨벙거리는 물소리만 하얗게 피어날 뿐….
금빛 햇살이 넘실대는 물결 위로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이 부드럽게 흐른다.
°뉴린 파(Newlyn School): 산업혁명으로 영국의 대도시는 매연과 공해로 가득해 호흡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맑은 공기의 자연을 그리워했던 런던의 화가들은 콘월의 해변마을인 뉴린에 정착했다. 스탠호프 알렉산더 포브스(Stanhope Alexander Forbes, 1857~1947)는 뉴린으로 모인 화가들과 연합해 프랑스의 ‘바르비종파’에 맞선 ‘뉴린 파’를 결성한다. 그리고 이 학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화실에서 벗어나 자연 그대로의 전원 풍경을 묘사한 것이 바르비종파라면, 뉴린 파는 바닷가의 생활과 풍경, 그리고 어부들의 일상을 그려나갔다. 해롤드 하비도 뉴린 파의 구성원으로 활약하며 콘월지방에서 평생을 보냈다.
Piano Concerto No.5 'Emperor'황제 in E flat major Op.73. 2nd mov. - L.V.Beethoven
베토벤은 20대 후반부터 이유를 알 수 없는 귀울림으로 인해 듣는 것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비엔나 근교인 하일리겐슈타트로 요양을 떠났지요. 산책도 하고 건강도 챙기며 다시 듣게 되길 간절히 소망했지만, 병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난청은 타인과의 소통에도 어려움을 가져왔습니다. 베토벤의 청각장애를 몰랐던 주변사람들은 그를 괴팍한 사람으로 오해합니다. 베토벤은 고립되었고 좌절합니다.
청력은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이 있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자 베토벤은 유서를 쓰기로 결심합니다.(유서는 1802년 10월 6일, 두 동생, 카를과 요한에게 쓴 편지의 형태로 베토벤 사후에 발견되었으며 베토벤이 사망한 해인 1827년 10월에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편지는 유서라기보다는 난청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을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극복하겠다는 고백문이었습니다. '인간 베토벤은 죽고 예술가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선언서였지요.
유서 사건 이후 그의 음악 세계는 이전과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바깥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불행한 음악가는 내면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베토벤은 묵묵히 ‘신이 들려주시는 것’을 받아 적습니다. 마침내 완성한 선율은 그의 음악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살아갈 희망을 주는 인류애적 공감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1809년에 작곡한 이 곡의 2악장으로 상실과 고통의 시간을 걸어가는 우리를 다독입니다.
금빛 햇살 머금은 아름다운 선율이 속삭입니다. '됐어, 괜찮아. 됐어!’라고..
설혹 넘어지더라도 자신을 믿고 다시 일어서 버티며 자신만의 목소리로 살아가라고...
https://youtu.be/12kG3NjjrWY?si=Tfv_j-HosImJSJ_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