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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리즘 Oct 07. 2023

분노 조절 잘 되시나요?



완전 딴 사람이 되다


“저 XX 저거, 오늘 그냥 확….”     

40대 중반의 덩치 큰 지인은 평소에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 그러나 운전대만 잡으면 완전 딴 사람이 된다. 다른 차가 앞으로 끼어들 때면 여지없이 욕이 튀어나온다. 언젠가는 중심가 이면도로에서 일방통행로를 달리고 있을 때였다. 반대편에서 차가 오자 충분히 피해서 가던 길을 갈 수 있는데도 굳이 길을 막고 한참을 서 있었다. 자칫 큰 싸움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탑승한 내가 민망할 정도였다. 나중에 물었다. 왜 그랬냐고. “운전 중 화가 나면 주체할 수 없어요.” 그는 겸연쩍은 듯 말했다.     



분노 조절에 취약한 사람들


그렇게까지 화낼 이유가 없는 일에도 과도하게 반응하며 극단적으로 행동하는 사례로 우리 사회가 몸살을 앓고 있다. 분노의 ‘불쏘시개’는 늘 소소한 일이다. 몸이 부딪혔다는 이유로, 기분 나쁘게 쳐다봤다는 이유로 주먹다짐을 한다. 아파트 층간소음 때문에 살인이 일어난다. 짜증과 분노를 참지 못하는 세상이다.     

분노 조절이 안 돼 자주 과도하게 ‘욱’하는 증상을 ‘분노조절장애’라고 부른다. 정확한 병명은 ‘간헐적 폭발장애(Intermittent explosive disorder)’다. 특히 분노 조절에 취약한 사람이 있다. 자극에 예민하면서 조급한 사람, 화를 무조건 참는 사람,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 자주 화를 내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 등이다.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결과가 예측되는데도 분노를 참지 못한다. 치열한 경쟁과 불안 증가로 스트레스가 커진 반면 이를 적절히 해소할 수 있는 정서적 여유가 없어진 탓이다. 여기에 TV드라마나 예능프로그램, 영화, 게임 등의 폭력적인 장면을 접하면서 분노 폭발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진 것도 원인이다.     

분노는 억압이 아닌 조절의 대상이다. 분노는 누르면 누를수록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한국인은 화를 내면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해 속이 부글부글 끓어도 잘 표현하지 않고 참는 경향이 있다. 화를 누르며 참다가 어느 순간 분노가 폭발하게 된다. 분노조절장애는 자신의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다. 타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줄 수도 있다. 보복 운전, 데이트 폭력, 아동 학대 등 그 유형도 다양하다.     



감정 조절 두 개의 열쇠


전문가들에 따르면 감정발달은 후천적이며, 감정 표현 방식은 대물림된다. 특히 공격적인 감정은 강력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아이들이 다른 감정보다 금방 배운다. 서로 싸우는 부모는 아이를 분노조절장애로 키울 위험이 크다. 부모가 어떤 상황에서도 자녀에게 ‘욱’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감정 조절의 열쇠는 자존감과 자아성찰이다. 자존감은 ‘나는 소중하다’ ‘나는 쓸모 있다’는 느낌이다. 내가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소중한 존재이며,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는 유능한 사람이라는 믿음이다. 자존감이 높으면 감정 조절을 잘할 수 있다. 또 자아성찰 과정을 통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나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리하여 ‘욱’하는 그 짧은 시간의 순간적인 자제력을 길러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분노 감정 조절이 말처럼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다. 분노를 그냥 참고 마음 안에 쌓아두다 보면 묵은 김치처럼 더 시큼하게 발효 돼버린다. 그때그때 해결해 주는 노력이 필요하다.     

분노는 조절이 쉽지는 않지만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다. 다음은 전문가들이 제안하는 일상에서 써볼 만한 구체적인 방법들이다. 일단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느끼면 잠시 상황을 벗어나는 ‘타임아웃’, ‘15초 참기’ 등이 대안이 될 수 있다. 심호흡 세 번이면 15초 정도 흐른다. 시야가 탁 트이는 넓은 공간으로 나가 기분을 전환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평소 운동과 같은 취미 활동을 통해 쌓여 있는 스트레스와 화를 다른 에너지로 ‘승화’시키는 방법도 있다. 입술 깨물기나 혼잣말하기 등도 권장사항이다.     



절망 속에서 희망을 피워내다


우리 사회의 분노는 넓고도 깊다. 기득권에 대한 반감, 정의가 사라졌다는 현실 인식, 공공성의 붕괴, 공정성의 유린, 먹고 살기의 팍팍함이 바닥에 깔려 있다. 이 글과 어울리는 고전이 미국 소설가 존 스타인벡(1902~1968)의 장편소설 《분노의 포도》(1939년)다. ‘절망적 현실이 낳은 불온한 걸작’으로 꼽힌다.     

소설은 1930년대 경제공황 속에서 한 농부 일가가 겪은 인생유전을 그린다. 소설의 주무대는 오클라호마와 캘리포니아. 국경의 대평원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 때문에 농사를 망친 소작인 조드 일가는 은행과 지주에게 땅을 빼앗기고 쫓겨나다시피 고향 오클라호마를 떠난다.     

조드 일가는 한 장의 구인광고에 모든 희망을 걸고 66번 국도를 따라 ‘축복받은 땅’ 캘리포니아에 들어선다. 막상 도착해 보니 기대와는 딴판이다. 일거리도 적고 지주의 착취가 극심하다. 결국 조드 일가는 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가족들이 생이별하고 죽어가는 극한 상황에서 아들 톰은 사회의식에 눈을 뜨고 빈민을 돕기 위해 나선다. 조드 일가의 정신적 지주인 어머니의 몸부림은 사회 구조의 모순에 굴하지 않는 샘솟는 생명력으로 그려진다.     

이 소설이 20세기 미국소설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한 시대의 사회상 반영 차원을 넘어 한 농부일가의 생애를 인간의 보편적 문제로 승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를 단순히 악인과 선인으로 구분 짓지 않는다. 입장이나 상황이 바뀌면 선인이 악인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악인이 선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가 보기에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관계는 도덕적 문제가 아니고 구조적이며 상황적인 문제일 뿐이다.     

소설의 마지막 장에는 굶주림에 지친 조드 일가가 사산한 로저샨을 데리고 허물어진 빈집에 들어서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에는 한 사람의 부랑자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로저샨은 자신의 부풀어 오른 젖가슴을 그의 입에 물린다. 감동적이고 엄숙한 이 마지막 장면이 함축하는 의미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인간의 강인한 생명력과 생명의 존엄성이다. 다른 하나는 굶주린 자가 굶주린 자를 끌어안는 생명의 연대성이다. 소설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피워낸다.     



다양성에 대한 관용


‘마땅히 분노해야 할’ 절망 속에서 희망을 피워내는 소설과는 달리, 분노의 대체적인 스토리 라인은 갑의 횡포와 을의 분노, 응징이다. 분노의 칼끝이 타인을 향하면 살인, 자신을 겨누면 자살이 된다. 누구나 범죄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가해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해결책은 없을까.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 해법이 될 수 있다. 나와 다른 의견은 그냥 존재할 뿐이지 굳이 내 생각을 공격하지 않는다. 다양성에 대한 관용이 있을 때 ‘합리적 균형’이 가능하다.     

다른 의견과 주장에 분노하는 이유가 뭔지, 소소한 일에 왜 날뛰며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생각해 볼 때다. 글 서두에서 언급한 지인을 생각하면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어떻게 보면 그도 피 흘리는 마음과 갈기갈기 찢긴 영혼의 소유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더 이상 소소한 일에 ‘초록색 헐크’로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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