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서의 바른 선택
어제 저녁, 우리 부부가 오랫동안 멘토로 모셔온 70대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두 분은 각각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고, 한 선교회를 세워 30년 넘게 이어오신 분들이다.
평생을 남을 위해 헌신해 왔지만, 자녀들 역시 부모의 그늘에 머무르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독립적인 길을 걸어왔다. 한 명은 미국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고, 또 한 명은 뉴욕에서 UI/UX 디자이너로 활동하며 책을 썼다.
손주들도 여럿이다. 방학이면 손주들은 한국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다. 매년 반복되다 보니 교장선생님도 아이들도 서로를 반갑게 안다. 미국에 있을 때는 매주 두 아들 가족과 이 부부, 모두 열세 명이 온라인 가족 모임을 한다. 순서를 정해 돌아가며 주관한다.
그런데 두 분 모두 건강의 큰 고비를 맞았다. 한 분은 위 절제 수술을 받았고, 또 한 분은 암 진단을 받았다. 항암 치료의 부작용으로 뇌경색 증세까지 나타났다. 객관적으로 보면 결코 가벼운 상황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을 뵐 때마다 한 번도 그늘진 얼굴을 본 적이 없다.
항암 치료를 재개하면 뇌경색이 다시 올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을 듣고, 그분은 의사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치료를 하다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사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그 다음은 하늘에 맡기겠습니다.”
의사는 그 선택을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았다. 사례를 찾아 독일까지 다녀오고, 자연 치유와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적용해 보기로 했다. 두 분은 “참 좋은 의사를 만났다”고 기뻐하셨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운이 좋아서’ 늘 좋은 사람을 만나는 걸까?
아니면 이분들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어 온 것일까?
일주일에 세 번 찾아오는 간병인은 예전에 요가 강사였다고 한다. 세 시간 동안 식사와 집안일을 돕고, 함께 요가도 한다. 간병인을 대하는 두 분의 태도가 워낙 정중하고 따뜻하다 보니, 관계의 결도 그에 맞게 형성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이분들은 오랫동안, 사람 안에 있는 선한 가능성을 꾸준히 불러내며 살아온 게 아닐까?
그분들을 생각하며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맞이하기 & 마주하기.”
질병이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그것은 선택할 수 없는 영역이다. 우리는 결국 그것들을 맞이해야 한다. 그러나 그 앞에서의 태도는 선택할 수 있다. 그 상황을 피하며 원망할 것인가, 아니면 눈을 뜨고 마주할 것인가?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지키는 일.
그것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인생에 대한 분명한 기준과 철학, 그리고 오랜 연단이 쌓인 결과일 것이다.
이 원리는 직장과 사회생활, 가정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원하지 않는 상사를 만날 수도 있고, 이웃과 갈등을 겪을 수도 있다. 질병이나 사고, 나쁜 날씨처럼 피할 수 없는 일들도 찾아온다. 그것들은 우리가 맞이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그 일에 마음까지 묶일 필요는 없다. 상황과 ‘소울 타이’가 되면 소모되는 건 결국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르게 선택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오든 담대하게, 당당하게 마주할 수 있다.
“와라. 이 일을 통해 나는 더 단단해질 것이다.”
어릴 적 농촌에서 보았던 장면이 떠오른다.
자라는 시기에 바람이나 닭의 부리처럼 가벼운 외부 자극을 받은 배추는, 안쪽 잎을 더 촘촘히 말아 생장점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자란다.
농업에서는 이를 보상 생장(compensatory growth), 혹은 스트레스 반응에 따른 결구 강화라고 부른다.
외부의 압력을 만날수록 더 단단해지는 것.
자연에서나, 사람에게서나 발견되는 동일한 원리다.
앞으로도 나는 많은 것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세상을 피해 혼자 살지 않는 이상 말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마음에 새긴다.
어떤 것이 오든, 눈을 크게 뜨고 똑바로 마주하자. 이미 그런 길을 살아낸 본을 보여준 사람들이, 우리 곁에 구름처럼 많기 때문에.
그분들을 떠올리며, 유난히 감사한 토요일 오전이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맞이했고,
그것을 어떻게 마주하고 계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