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싫어하는 게 아니었어요.
지인 몇 분은 내가 꽃을 싫어한다고 알고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데 설명이 잘 나오지 않는다. 아, 그게 아닌데,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 그, 그......
나는 분명,
꽃을 보면 웃음이 난다.
꽃을 보면 발걸음을 멈춘다.
꽃을 받으면 기분이 좋다.
봄꽃을 보려고 식물원 주변을 다닌다.
이 정도면 마니아까지는 못되어도 좋아한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12년쯤 된 식탁의 상판은 널빤지 5개가 일정한 간격의 홈을 두고 배치되어 있다. 그땐 특이해서 고른 디자인인데 널빤지 사이사이 파인 홈 안에 음식물이 끼고, 그것 때문에 습해서 청결하게 관리하는 게 조금 귀찮은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아기 때부터 낙서한 자국들과 세월의 더께는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아서 청소를 하고자 하는 의욕을 아예 사그라들게 했다. 식탁보를 두르고, 유리를 얹는 것도 해봤지만 가리기용으로 쓰이는 게 또 싫었다. 테이블 다리도 자주 흔들렸다. 다리를 다시 끼우고, 나사를 조여도 느슨하게 되돌아왔다. 리폼을 할 줄 아는 재주도 없다. 이만하면 바꿀 법도 한데 아무것도 하기가 싫었다. 식탁을 바꾸는 데에 큰돈을 들일 것도 아니기에 경제적인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냥 다 귀찮았다. 싫었다.
문제는 한꺼번에 발생했다. 방에 문마다 시트지가 뜨고 떨어져서 너덜너덜해졌고, 손잡이는 빡빡해서 잘 돌아가지 않았다. 욕실마다 수전은 왜 덜그럭거리는지, 환풍기는 먼지를 비워도 왜 멈춤인지 신경 써야 할 데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맞닿아있던 바닥과 벽이 서로 떨어지는 현상까지 보게 되었을 때는 뭔가를 시도하고픈 마음을 포기하기로 했던 것 같다. 그래 그래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다. 집을 바꿔야 한다. 집을 바꾸지 못할 바에는 아무것도 치우지 말고, 고치지도 말고, 들이지도 말자.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은 흘러 둘째가 초등 3학년이 되었다. 아들이 사용할 방 하나는 이미 창고방으로 변해 있었다. 올해 봄부터 정리하고 침대를 넣어주겠다 말만 했다. 마음을 먹을수록 쌀이니, 고구마 박스니 죄다 그 방으로 들어갔다. 이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까마득했다.
얼마 전, 식탁에 앉아있다 내 안에 혼재하는 여러 감정들을 솔직하게 마주하게 되었다. 밖에서는 깔끔한 척하고, 집에서는 정리도 못하는 비밀스럽게 숨겨둔 지저분함이 부끄러워졌다. 이유는 꽃이 예뻤기 때문이다.
가끔 꽃을 사야 하고, 받을 때가 있는데 며칠 전 꽃을 사기도 하고 받을 일도 있었다. 제대로 된 꽃병 하나 없어서 다 먹은 음료병을 깨끗이 씻어 꽃을 꽂아두었다. 날마다 물을 갈아주었다. 물을 바꿔줄 때는 줄기를 조금씩 잘랐다. 꽃은 꽤 오래갔다. 뿌리에서 잘렸지만 얼마간은 죽지 않는 꽃이라는 생명력이 사랑받지 못하는 식탁 위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꽃에 집중하자 꽃이 나와 집 안을 둘러보는 듯했다.
집이라는 공간은 내게 아픈 손가락 같은 것이었다. 정을 주지 못하여 치우지도 못했다. 꽃을 밝혀줄 빛나는 배경이 나는 필요했다. 꽃 몇 송이가 집 전체를 살리고, 마음에 온기를 넣어주는 것을 보지 않겠다고 고집부렸다. 이제껏 아이 둘을 따뜻하게 품어준 이 소중한 공간과 마음껏 먹고, 낙서도 하며 자라게 해 준 고마운 식탁을 향해 너는 이제 늙어서 냄새가 난다며, 고장이 났다며 홀대했다.
"화려하지 않아도 정결하게 사는 삶"
묵은 때가 쌓인 내 마음 안에 필요한 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정결함이었고,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나눔이었다. 삶을 다시 가볍게 하기 위해 무엇을 비워야 하는지 꽃이 알려주고 있었다.
쓰레기장이 될 뻔한 창고방부터 정리하기로 했다. 온갖 잡동사니와 미련이 남아 버리지 못했던 옛날 서적들, 이제는 들춰보지 않으니 정리할 수 있다. 주방 쪽 나만의 작은 공간에 꼭 소장하고 싶은 책만 있으면 된다. 필요한 건 가까운 도서관이나 온라인 북에서도 가능하다. 사실, 나는 책을 모아두고 매일 탐독하는 학자형도 아니다. 그러니까 정리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더 넓고 멋진 집을 기대하며 자랑하고 싶어서 남겨두었던 아이들의 기록들 또한 사진으로 남기기로 했다. 사용하지 않지만 아까운 물건들은 최대한 나눔을 해야겠다.
내가 거주하는 이 공간을 돌보지 않을 때, 공간도 나를 돌보지 않는다. 공간이 나를 돌보지 않았다는 건 내가 나를 돌보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