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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일핑크 Aug 31. 2023

걸어서 출근합니다.

이 날씨에도 걸어오세요?


출근을 걸어서 한 지 3년째다. 더 오래전에 회사와 먼 곳에 살 때에는 많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지옥철을 타거나 중심을 잡기 힘든 버스에서 손잡이에 온몸을 맡긴 채 힘겹게 가곤 했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타고 가던 출근길은 꽤 많은 스트레스를 안겨주는 길이었다. 지하철이 연착되거나 사람이 너무 많아 타기 어렵거나 하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닥쳤을 때는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답답한 마음이 올라오곤 했다. 그러다 이렇게 걸어서 회사를 가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출근길에 올랐을 때 시작, 이라고 느낀다. 여행 전 며칠 간의 짐을 다 싸고 캐리어를 들고 출발하는 기분처럼 이제 내 할 일을 하러 떠나는 기분.




회사와 집까지 버스로 겨우 두 정거장인 이곳으로 이사 온 지는 10년이지만 걸어서 출근을 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겨우 두 정거장의 거리를 걸어서 올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줄곧 버스를 타고 다녔다. 가까운 탓에 버스 번호도 상관없이 무엇이든 타고 오면 그만이었다.


나는 타고난 지각러다. 지각의 역사를 말하자면 한 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할 판이다. 회사의 지각을 면하는 것. 아이의 등원 버스를 정시에 태우는 것에 하루의 운을 모두 걸었다.

그렇기에, 걸을까? 탈까?라는 물음은 아침마다 마음속에 던졌지만 타자.라는 결론은 너무도 쉽게 나왔다.


지각 운명의 기로에서 버스 정류장에 '곧 도착' 부분에 아무런 버스가 없으면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다음 버스가 3분 있으면 오는데도 지각을 면하려면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러면 택시가 지나가는지 확인한다. 운 좋게 택시를 바로 타더라도 기사님에게 목적지를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지만 제가 지금 좀 급해요 하면서 이 거리를 택시를 타고 가야 함을 가볍게 설명했다.


겨우 두 정거장의 거리도 출근시간에는 10분 넘게 지체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동네에서 유명한 최악의 정체구간을 꼭 지나가야 했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던 택시를 타던 비슷한 시간소요가 걸릴 것이 뻔했다. 그렇지만 버스 대기시간 3분조차 나에게는 기다릴 여유가 없었다. 일단 타면 3분을 아낄 수 있으니 택시든 버스든 타고 가길 바랐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짓는 지점이었기에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을 선택했다.


집에서 회사를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속적으로 회피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걸어가는 것은 늦을 수 있고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니 자제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걸어갈까?라고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은 가까운 거리에 사는 죄책감에 대한 방어 같은 것이었다. 가까운데 왜 타야 하지?라고 질문하고 스스로에게 답을 만들어 정당화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아침은 바쁘고 시간과의 싸움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아이도 크면서 나 역시 조금씩 마음의 여유를 찾고 있다. 학년이 올라가며 아이가 가야 할 등교 시간은 빨라졌고 회사는 이전보다 30분 늦춘 시간을 지각의 기준으로 세웠다. 등교와 출근 준비가 빨라지면서 그동안 걸어가지 말아야 할 이유를 걸어갈 수 있는 이유로 뒤집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심적이나 육체적으로나 조금씩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 회사 가는 길목이 막혀 우리 집 앞 정류장까지 차가 정체되어 있어도 남 일 보듯 쳐다볼 수 있다.

- 더 이상 배차 간격을 체크하며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


이 두 가지 만으로도 출근길의 스트레스 대부분을 해소할 수 있었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신호등의 파란불이 바뀌는 타이밍에 맞추어 중간에 뛰어야 많이 안 기다린다는 점, 그리고 날씨에 대한 준비 정도였다. 비가 오면 큰 우산과 젖어도 괜찮은 신발을 신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면 양산을 꺼내 들었다. 눈이 오면 누가 봐도 젖지 않고 미끄러지지 않을 만한 튼튼한 부츠를 신었다.


이 날씨에도 걸어오세요? 하는 질문에 날씨에 맞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답니다. 까지는 대답 하지 못하고 이게 더 빨라요.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걸어가는 게 느리다고 생각했던 몇 년 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대답이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에는 유독 길이 막혔다. 긴 휴일이 끝난 월요일 아침에는 도로가 만차 상태였다. 꽉 막힌 도로에서 차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인도를 유유히 걸어가는 나를 보며 부러웠다는 동료의 말을 들으면 걸어 다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변수를 이겨내고 출근길이 더 빨라졌다는 이유보다 걸어갈 수 있겠다는 마음의 여유를 찾은 것이 내게는 더 반가운 일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할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린 순간 다른 대책을 세우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을 얻기는 힘들다. 도로에 막힘이 없다면 걸어서 가는 시간이 버스를 타는 것보다 두 배는 더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두 배가 더 걸리더라도 걷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이 여유가 더 만족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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