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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일핑크 Jun 12. 2024

구멍 찾아 삼만리

베테랑이 되기 위한 노력


8시간의 업무 시간에서 주로 무엇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구멍을 찾는 일을 하고 있어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구멍을 찾는 일이란, 비어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지 못한 것은 무엇인지, 논리가 맞지 않는 내용을 억지로 끼어 맞추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과정이다. 일의 목적과 업무 내용은 달라도 결국은 구멍을 찾는 일로 귀결된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구태여 나서서 찾고자 하지 않아도 검토 요청이라는 과정을 통해 구멍이 있는지 묻는다. 다 된 밥에 돌이 있는지 없는지 한번 더 봐 달라는 것이다. 다시 밥을 할 필요 없이 돌만 찾아내야 하는 것이니 비교적 행동 범위는 낮다고 할 수 있지만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잘못해서 이 돌을 찾지 못한다면, 손님이 이 돌을 와그작 씹어먹게 될 것이고 그 순간 이 밥뿐 아니라 반찬 값까지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보통은 칭찬과 인정을 통해 동기를 얻어 반복적인 도전을 한다. 하지만 밥에서 돌을 찾는 과정을 멈추지 않는 것은 즐거운 경험 학습을 통한 반복이 아닌, 공격을 방어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다.


빈 구멍으로 공격이 들어오는 경험이 쌓이면서 구멍을 찾아야만 평온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구멍을 찾는 일에 전투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구멍을 찾았을 때는 안도감이 흐른다.





구멍 찾기의 시작점은 사장, 대표와 같은  C레벨에서 시작된다. 아래로 아래로 내려오면서 구멍으로 공격받은 이들은 공격받지 않기 위해 구멍을 찾고 메울 궁리를 한다. 구멍은 코드 한 줄 일수도, 기획서에 잘못 들어간 문장 하나 일 수도 있다.


주 1회 하는 팀장회의는 하나의 프로젝트에 여러 팀이 속해있어 각각의 견해를 들을 수 있다. 한마디로 같은 것을 각기 다른 시선으로 본다. 때로는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기도, 얄밉게 내 영역이 아니니 알아서 잘했어야 한다는 대화가 오고 가기도 한다. 여기서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이 좋은 말로는 크로스 체크 해준다. 구멍을 메워준다고도 할 수 있지만 내가 보인 구멍이 즉시 공격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반전이 있다.


"미리 사전에 고려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거 아니고 저 건대요?"

"제가 알고 있는 거랑 다릅니다. 잘못된 거 같은데요."


이렇게 순식간에 공격대상으로 변질된다. 이 공격의 수혜자는 상사(실장)이며, 팀장끼리 서로 구멍을 메워주는 격이니 업무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이 과정에서 서로 얼굴을 붉히는 일이 생기기도 하나 결국에는 흥분하는 자가 지는 꼴이 되므로 가급적 차분한 어조로 아무렇지 않은 척 마무리해야 한다.


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상세히 확인 후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와 같이 틀린 것도 맞는 것도 아닌 어조로 사실의 진위를 미룬다.



내가 플랫폼기획자로 일을 시작하면서 들었던 말은, 잘하면 본전이고 못하면 욕먹는다였다. 그만큼 잘한다는 건 당연한 거고 못하면 대역죄인 취급을 받는 상황이 잦았다. 구멍을 놓치면 서비스 장애로 이어져 로그인이 안된다거나 결제가 막히는 등 매출에도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서비스는 24시간 돌아가야 하니 퇴근 시간 후에도 일이 생기면 누군가는 호출될 것이다. 그러니까 구멍을 찾지 못하면 불편한 상황 발생률을 높이는 꼴이 된다.


구멍들은 예외 상황에 대한 처리가 고려되지 않았을 때 만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개발의 퀄리티를 확인해 주는 QA 부서까지 통과가 잘 되었지만 문제점은 꼭 세상에 공개 후에만 나오는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라이브를 10년 동안 멀쩡히 했는데 튀어나오는 버그도 있다. 변경한 것이 없는데 갑자기 나오는 버그들은 그래서 더 놀랍기만 하다. 그동안 수많은 예외 상황들을 비켜가면서 장애 없이 잘 운영되고 있었다니.


길을 가다 10년 만에 친구를 우연히 만났을 때의 놀라움처럼 이 버그들도 만날 때마다 놀랍고 다른 의미로써 반갑다. 구멍을 찾아 막았으니 또 만날 일은 없겠지. 바퀴벌레가 튀어나올지도 모를 벽의 구멍에 점토를 똘똘 뭉쳐 채워 넣고 겉에 벽지를 발라 아무도 모르게 고쳐내는 일과 흡사하다.


사실은 숨어있지도 않은데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같은 문서를 보고 또 본다. 내가 찾지 못하는 구멍을 상사가 찾아주었을 때의 경외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구멍을 잘 찾는 능력이야말로 관리자에게 꼭 필요한 능력이다.


그래서 어제도 오늘도 팀원이 가지고 온 내용의 구멍을 찾고 있다. 더불어 이렇게 브런치 글쓰기를 하면서 구멍을 찾는 일에 도움이 되었다는 걸 고백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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