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상실사건

by 빙기


어쩐지 긴장되고 불안하고, 내가 있는 곳이 맞는 옷처럼 느껴지지 않아 적응이 어렵고,

이 모든 일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이 들자 주변에 하소연을 시작했다.


사실 힘든 이 세상에서 주변에 일명 징징거린 다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에게도 그들에게도 썩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하고서 후회하고 미안해지고 신경 쓰이고, 오 컴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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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만하기로 마음먹었다!


잘 안되지만 아무튼 마음먹었다! 그래! 어떻게 되겠지 알아서 해볼게! 다 해결된 다음에 알려줘 볼게!

의젓하게 간다! 인생 어차피 혼자야! 인간은 원래 혼자다! 어차피 우린 다 죽어!


아무튼 가까운 사람들은 멘헤라(음~mental illness)를 발산하는 나의 이야기를 하나같이 경청해 주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언을 줬는데, 공통점이 있었다.


어떤 일이든 어떤 상황이든 간에 지금 하는 일이나 이후 인생의 대목표나 주제에 대한 열정과 결의가 있는 사람들은 누가 봤을 때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상황이나 그게 아니더라도 고통을 줄 만큼 힘든 상황을 어떻게든 이겨냈다고 말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겨내는 중이거나 이겨냈거나 그랬다.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그렇게 말하니 대단하고 멋있다고 생각했다. 열정적으로 무언가에 뛰어 들어서 고난과 역경을 그거 하나 만으로 이겨낸다는 것은 엄청난 정신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같이 그냥 그 자리를 얻은 사람들은 없었다. 무언가의 사유로 다져지고 고통받았지만 "어디까지 하나 보자"는 마인드 혹은 "어쩔 수 없지 쌰갈"의 마인드로 버텨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바닥을 보고 올라가서 지금 그 자리를 얻었다. 물론 그 친구들 중 일부는 그 열정의 시기에 모든 것을 쏟아붓고 이제는 남은 열정이 별로 없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스스로의 열정에 대해 돌아보았는데,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열정이라곤 없었다. 아니 열정적이었던 일이 있었던가? 열정이 언젠가까지는 있었는데, 모종의 이유로 점점 약해지다가 지금 들어온 이곳에서는 완전히 상실해 버렸다. 그때 가졌던 열정도 딱히 돈 버는 것에 대한 열정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내가 흥미 있는 활동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렇다면 진로. 인생의 대 주제나 목표, 내가 원하는 방향이 없기 때문인가? 그것에서 기인하는 열정이 고행길과 직업 생활을 견디게 해주는 원동력이 된다면 그래, 나는 그게 지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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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탈이 약해졌을 때 이겨내기 위해서 자기계발류의 강연이나 도서에 집착하는 습관이 있다.


책을 고르고 사서 눈에 바를 에너지가 없었던 터라, 최근에는 유튜브를 열어서 "불안해용" "힘들어용" "바로 퇴사하는 사람 ^_^" 등등 보기만 해도 한숨 나오는 키워드를 잔뜩 적어서 도움이 되겠다 싶은 사람들의 영상을 잡히는 대로 클릭해서 봤다. 애초에 딱 들어맞는 영상물이 없다 보니 강연 등등의 내용에서 도움을 받지 못했고, 멘탈이 나간 상태이다 보니 집중도 잘 안 됐다. 무언가를 틀어놓고 허공을 바라보며 "내 인생 앞으로 뭘 하면서 살 수나 있을까" "여기서 적응 못하면 이후에도 적응 못하지 않을까"따위의 생각만 하며 불안만 키웠다.


~ 정상적인 정신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


뭐가 가장 도움이 안 됐냐면, 영상이나 댓글에서 사람들이 < 힘들다고 생각해서 → 무언가를 그만둬야지! >라고 결심하게 되기까지의 임계치가 나와는 달랐다.


나는 사실 첫날 일하고 나서 바로 "살면서 단 한 번도 맑은 정신으로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의 상태가 되었고, 집에서는 딱 봐도 티가 날 정도로 침울해졌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쩌구 저쩌구 해서 (진짜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을 묘사. 예를 들어 직장 내 은근한 괴롭힘이 있음) 그만두고 싶었고 1년 다니고 이직했다"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런 곳에서 1년을 어떻게 다니셨죠? 당신은 이 시대의 영웅입니다. 그 환경에서 1년 일한 당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용맹한 전사임.


웃기는 소리일지도 모르겠지만 일하는 곳에 날 괴롭히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좋은 사람들이 많음)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왔다면 잘 적응하고 다녔을 것 같은 상황들도 많았다. 아직 익숙함을 느낄 만큼 다녀본 것도 아니었고, 일 자체가 정말 너무 어렵고 무시무시하게 압도적이라서 나를 짓누르고 내가 절대 할 수 없는 일들이고 뭐 그런 것도 아니다. 그냥 어찌어찌 시행착오를 거쳐하면 될 것 같은 그런 정도인데. 그런 환경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나약하게 느껴졌다. 이 정도는 어딜 가도 다 그럴 텐데, 그냥 일하기 싫은 거 아냐?라는 느낌.


'아니 돈은 벌면서 살아야 할 것 아니니. 자립심을 갖고 이 세상을 개척해 나가야 할 것 아니니! 있는 직업도 AI에 대체된다잖아! 다 대체된대! 뭐라도 해야지! 해라!' 등등의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었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이 과정에서 도망치는 선택도 엄청난 결단을 요구하는 선택임을 나는 깨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도망치는 선택을 하는 사람들, 남아서 맞지 않는 자리라도 버티고 다닌 다음에 이직하는 사람들 모두를 멋지다 잘한다 잘 산다고 칭송하면서도 그 중간 어드메에 위치한 나만 나약하다고 핍박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만둘 거라는 생각과 기간을 마음속에 정해놓고 살고 있긴 하지만 그때가 왔을 때 그걸 실천할 수 있을지 확신이 안 선다. 이력에라도 남기려면 1개월? 절대 안 되고 3개월? MZ입니까? 6개월은 해야, 그래 너 일을 하긴 했구나~ 썩 맘에 안 들지만 하긴 했네!라고 쳐준다는 말이 와닿았다. 결국 나의 근래는 아래와 같은 서사로 진행됐다.


그래! 좀 만 버텨라 6개월 눈 깜빡하면 간다. 버텨라!
못하겠어요! 못하겠어요!
아냐 오늘 해보니까 오늘 같은 날이 계속되면 할 수 있을지도!
아냐! 오늘은 지옥이었다! 이딴 일은 난 못한다!
아냐! 버텨! 1개월이나 6개월이나 그게 그거다! 2026년 반년 지나는 게 어때서! 2027년까지 앞으로 반년!
못하겠어요! 못하겠어요!


그냥 "못하겠어요"라는 제목의 노래나 내겠습니다. 앨범 표지는 아래의 사진에 제 얼굴 합성 부탁드려요.

저랑 같이 합성될 사람 구해요. 전 왼쪽 하겠습니다.


daed26fe6a1a25eb9dbc61193d2021e7.jpg ©pinterest 짜잔~


스스로의 뇌가 미친놈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소처럼 웃긴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착 가라앉으면서 "인생을 앞으로 어떻게 살 거냐 이 자식아"라는 생각이 침습적으로 들었다. 댐~ 하나도 계획적이지 않은 어른의 시대를 보내고 있다. 인생 최대로 계획적이었던 때는 대학원 시절이었다. 내 안의 그 새낀 지금 죽었다. 돌아와!


그래서 다음 목표가 뭐냐 회피하지 마라


모른다! 어쩌라고!

내가 1개월 다니고 퇴사하겠다는 선언을 하자 질문을 받았다. "다음 목표가 뭐야?"

몰라! 모른다! 그런 건 없다! 있었으면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겠지! 내가 한심하게 느껴지지 않았겠지! 나는 직업 활동을 하는 동안 없는 사회성과 능력치를 한 데 모아 대충 일을 하고 집에 와서는 잠을 잔단 말이다! 그렇게 건설적인 생각을 할 수 있었다면 내가 미친놈이 아니었겠지! 나도 지금 나와 생활이 맘에 안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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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를 감정쓰레기통 취급하고 있다는 사실,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있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쪽팔려서 언제 지울지도 모른다. 이른바 네이-ver 블로그 비공개글로 썼어야 맞다. 한심한 생각을 어디 가서 말로 털어놓을 수는 없으니 그저 솔직한 생각 정리를 위한 공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일하면서는 적당히 적응한 괜찮은 사람의 흉내를 내고 있기 때문에 잘 모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매일 잠자기 전 불안이 밀려온다. 잠을 자다가 자꾸 새벽 2시, 3시에 일어나는 유사 불면증을 경험하고 있고, 주말에는 건전지 빠진 사람처럼 일어나지 못한다. 다시 말하건대 매일 야근하고 미친 고강도의 업무를 쳐내고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 친구들이 주변에 있는데, 정말 어떻게 사는지 모를 만큼 유능하고 성실하다. 친구들아, 리스펙 한다!


현실 감각이 없이 지금까지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고생을 덜했고, 고민도 덜했고, 적당히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 공부하다가 지금 사회에 던져졌을 때 적응을 잘 못하고 있구나. 진로 고민을 이전에 미뤘으니 그만큼의 분량을 지금 해야 하는 거구나. 선택의 기로에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이렇게 불안하구나. 객관적으로 인정을 해주다 보니 어떻게 어제보다 오늘 좀 더 안정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도 같다. 아닌가? 아닌 것 같다. 방금 불안했다.


아직 완전하진 않고, 결단을 내리지도 못했지만 어떻게 되겠지 오늘도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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