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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네씨 Sep 13. 2023

매일 밤 남편이 괴이한 행동을 한다

영화 <잠>

유재선 감독의 데뷔작 <잠>이 9월 6일 극장 개봉했다. <잠>은 칸 영화제 비평가주간에 초정되어 기립박수와 호평이 쏟아지기도 했다. 비평가주간은 감독주간과 더불어 칸 영화제의 대표적인 사이드바 섹션으로 신인 감독의 첫 번째, 두 번째 작품만이 상영 대상이 된다. 즉, 유재선 감독은 데뷔작부터 눈에 띄는 성취를 보여주며 신예 감독이 보여줄 수 있는 유니크한 세계로 사람들을 끌어모은 것이다. 영화를 전공하지 않았던 그는 여러 단편영화를 찍은 후 <은밀하게 위대하게>와 <옥자>의 연출팀을 거쳤고, <신과 함께-인과 연> 스탭과 <버닝>의 영문 자막 번역 작업을 담당하기도 하는 등 영화감독으로서는 다소 생소하면서 폭넓은 경험을 다졌다.


<잠>도 그러한 영향을 받아서일까. 단순히 공포영화라고 하기엔 어딘가 낯선 느낌을 풍긴다. 스릴과 광기가 넘쳐 흐르면서 오컬트의 성격을 지니고, 어떤 장면에서는 사랑이 진득하게 느껴지며 웃음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렇듯 <잠>은 장르영화로서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동시에 장르를 마음대로 가지고 논다. 호러, 스릴러, 오컬트, 로맨스, 코미디를 오가며 관객에게 서스펜스를 느끼게 하고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흥행 걱정 없는 유재선 감독의 영화 <잠>을 전격 해체해본다.


※ 이 글은 <잠>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가 들어왔어."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읊조리는 남편의 한 마디에 모든 게 바뀌었다.



만삭의 임산부로 식품회사 인사교육팀의 팀장인 수진(정유미)과 단역배우로 간간히 작품에 출연하는 현수(이선균). 두 부부는 반려견 후추와 함께 낡았지만 아늑한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다. 현관을 통과하면 거실에는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는 나무 현판이 걸려 있고, 하나뿐인 방에는 이제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한 침대도 놓여 있다. 행복만이 기다릴 것 같은 두 부부의 일상은 현수의 괴상한 잠버릇을 보이면서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어떤 날은 뺨을 너무 벅벅 긁은 나머지 피가 철철났고, 또 다른 날은 냉장고에서 날음식을 마구 꺼내먹는 현수의 모습을 보고 수진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잠만 들면 딴 사람처럼 변해버리는 현수. 이를 지켜보던 수진은 현수와 함께 어떻게 앞날을 헤쳐나갈까?



가장 개인적인 출발


<옥자>를 통해 봉준호 감독과 인연이 돈독한 유재선 감독은 그의 영향을 적잖게 받았을 것이다. 연출적인 면도 있겠지만 감독으로서 가질 법한 '마인드'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영화 <기생충>으로 봉준호 감독이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감독상 수상 소감을 밝힐 때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말을 인용했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다". 그가 어렸을 때 항상 가슴에 새겼던 말이었다고 한다. 이제 이 말은 더욱 유명해져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 필자는 이런 창작의 마인드가 유재선 감독이라는 신예 감독에게도 계승되어 개인적이고도 창의적인 영화를 탄생시켰다고 짐작한다.


유재선 감독에 따르면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복합적이다. 첫 번째는 재미있는 장르영화를 만들어야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상업영화를 만들어보겠다는 목표를 가졌다고 한다. 두 번째는 결혼에 대한 화두, 현재 아내가 된 당시 여자친구와의 관계 등 개인적인 화두들과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주제들이 스며들어 한 호흡에 시나리오를 썼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첫 번째 계기는 신인 감독으로서의 당찬 포부였다면, 두 번째 계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출발점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결혼 이야기'하면 주된 갈등을 결혼한 부부 간의 갈등을 다루었던 것과 달리, <잠>은 부부가 힘을 합쳐 맞서야 할 외부 대상과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이 역시 감독의 의도와 맞닿아 있다. 결혼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어서 결혼 생활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지 않았고 오히려 서로를 믿고 의지하는 베스트프렌드 같은 두 부부로 설정했다. 두 부부가 하나의 단위가 돼서 어떻게 외부에서 던져진, 누구의 탓도 아닌 장애물을 헤쳐나가는지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수진이라는 독특한 인물


영화를 보다가 '수진은 대체 왜 이렇게 행동할까?' 생각이 드는 씬들이 있을 것이다. 수진이라는 캐릭터를 파고들면 그런 씬들이 좀 더 이해할 수 있다. 수진 역을 맡은 정유미의 또 다른 작품 <82년생 김지영>의 지영과 수진을 비교해보자. 지영은 체념하고, 순응하고, 한의 정서를 체화하는 인물이라면, 수진은 시련이 닥치면 극복하려는 성향이 짙고, 장애물이 있으면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남편 현수와 딸 하연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진은 맹목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넘치는 사랑과 위풍당당한 성격을 지닌 캐릭터로 비춰진다.


무엇보다 수진의 결혼관에 영향을 미친 것은 전 세대의 결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전부 설명하고 있진 않지만 수진의 어머니(이경진)의 결혼생활,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를 타산지석 삼아 수진의 결혼관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아버지와의 사별에도 혼자서도 경제적 여유를 가지며 살아가는 수진의 어머니는 신식의 결혼관을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면, 부부는 늘 함께 지내야 한다며 작은 집에서 남편과 꼭 붙어 지내려는 수진은 구식의 결혼관에 가깝게 묘사되고 있다. 남편이 밖에서 잠을 청하려 해도 밖으로 나오더라도 '둘이 함께라면 극복 못 할 문제는 없다'며 다시 안으로 데려오는 강박적인 생각과 태도로 확립되지 않았을까.



몽유병 환자와 그 가족에 관하여


이 영화는 공포나 괴담의 단골 소재인 몽유병과 수면장애를 전형적이지 않은 시선에서 그린다.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현수의 몽유병의 기괴한 증상을 조명하는 듯하다. 어떤 날은 뺨을 너무 벅벅 긁은 나머지 피가 철철났고, 또 다른 날은 냉장고에서 날음식을 마구 꺼내먹는 현수의 모습을 보고 수진은 경악을 금치 못한다. 몽유병을 앓는 현수로부터 받은 충격과 공포심을 묘사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몽유병 환자의 일상은 어떤 모습이며 그 가족의 일상도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여준다.


또한, 몽유병을 통해 수진은 공포와 위협의 대상이 배우자일자라도 그로부터 도망가지 않고 자의적으로 함께하고 직시하는 강인한 캐릭터임을 다시 한 번 역설하고 있다. 몽유병 환자들의 가족에게 보내는 유재선 감독의 응원이자 위로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 몽유병은 장르적 재미를 위한 허용이 많지만, 프로프로덕션 단계에서 제작인 수면 클리닉 의사에게 자문을 구했다. 렘수면 행동장애에 관한 수많은 논문도 탐독했음을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니 <잠>을 보고 몽유병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빨간색이 주는 낯선 대결 구도


영화는 '빨간색'이라는 컬러가 가진 상징성을 뒤집어 엎는다. 숱한 호러영화에서 빨간색은 공격적이며 분노, 경고 또는 위험을 상징하는 등 부정적인 연상작용을 하지만 <잠>에서는 집을 지키려는 수진을 둘러싸는 보호의 컬러로 쓰인다. 제1장에서 현수가 뺨을 긁었을 때 침대의 이불은 흰색 줄무늬에서 붉은색 이불로 교체된다. 또한 자신을 좋아했던 남성들을 생사여부를 확인할 때 사용하는 펜, 수진이 근무하는 회사를 대표하는 빨간 색상, 현수에게 보여주는 발표자료(PPT)의 배경, 수진의 어머니가 데려온 해궁 할매(김금순)이 써준 부적의 글씨까지. 모두 빨간색이다. 사실 영화의 타이틀이 뜰 때부터 이미 프레임 전체를 빨간색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반면에 귀신이 서성이게 하는 색은 수진이 아닌 현수와 결부된다. 해궁 할매의 말처럼 귀신은 잠든 사람한테 잘 들러붙고, 현수가 잠이 든 순간부터 공포가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수를 둘러싼 색상은 빨간색을 제외한 나머지 컬러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현수의 이부자리와 침낭 컬러인 청색과 갈색 계열이 될 것이다. 또한, 할아버지가 살았던 민정(김국희)의 집을 둘러싼 흰색과 아이보리도 빨간색과 대립되는 색상이 되기도 한다. 따라서 <잠>은 빨간색과 빨간색 외의 컬러가 대결하는 영화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는 컬러의 상징성 외에도 연출적으로 흥미로운 장치가 놓여져 있다. 수진과 현수의 관계와 상황이 극단적으로 바뀔 때 영화의 장도 나뉜다. 이 과정에서 관객이 사건을 재구성할 수 있도록 '집' 안에 여러 단서를 흩뿌려 놓았다는 게 인상깊은 부분이다. 또한 장의 구분을 통해 촬영, 미술, 인물들의 심리 등 시각적 측면을 다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한 발 더 밀고 나아가 열린 결말을 제시함으로써 관객에게 그에 대한 해석을 맡긴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해석을 얘기해보자면, 아랫집 할아버지가 현수한테 진짜로 빙의가 된 것 같다는 게 전자이고 배우인 현수가 빙의된 할아버지를 연기한 것 같다는 게 후자이다. 현재 해석의 무게는 후자에게 실리고 있다. 이 영화의 묘미는 모호함에 달려 있다.


끝으로 영화 <잠>에 대한 별점과 한줄평을 남기려 한다.



★★★☆

집 안도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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