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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네씨 Sep 17. 2023

창작의 불모에서 사랑을 발견할 때

영화 <어파이어>

2023년 베를린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한 <어파이어>는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의 10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원소 3부작' 또는 '낭만주의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으로 <운디네>(2020)의 물에 이어 불을 매개로 한다.  <어파이어>는 발트해 여름 별장에서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파이어>를 관람하면서 인물 간의 대사와 관계를 중시하고, 1:1의 관계가 아닌 삼각관계로 전개되는 사랑의 변화를 다루고, 인간의 복잡한 내면을 깊이 탐구한다는 점에서 에릭 로메르의 작품들과 닮았다는 인상을 받곤 했다. 특히 여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변의 폴린>, <여름 이야기> 같은 작품들이 떠올랐다.


마침 감독의 내한 소식을 전해 들어 인터뷰를 찾아봤다. 코로나를 앓았던 감독의 침대 곁에는 집필 중이던 시나리오와 코로나 이전 프랑스 제작사가 선물해준 에릭 로메르 DVD 전집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감독은 젊은이들이 도덕과 윤리를 잃어버린, 파시스트가 집권한 디스토피아 도시에 관해 쓰고 있었는데 펜데믹 시기 텅 빈 베를린 거리와 파괴된 일상, 그리고 튀르키에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을 마주하면서 디스토피아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다시 보며 우리 삶이 정말 멋진 일이고 그 삶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것, 삶의 복합성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고 답변했다.


감독은 각본을 갈아엎은 후 독일 버전의 여름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독일의 경우, 미국과 프랑스처럼 하나의 장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청년의 영화라기보다는 그들을 바라보는 부모의 이야기이거나, 착한 어른이 되어야 하는 적응의 이야기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감독은 발트해를 <어파이어>의 배경으로 선택했다. 무르나우 감독의 <노스페라트>에서 알 수 있듯이 발트해가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배경이기 때문이다. 여름이라는 계절, 바닷가라는 공간을 택했다. 그럼에도 <어파이어>에서는 발트해가 주인공의 삶을 결정하지 않는다. 그저 주인공들은 이곳에서 함께 어울려 놀며 시간을 보낸다. 단, 신경질적이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레온(토마스 슈베르트)을 제외하고 말이다.


※ 이 글은 <어파이어>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과 물로 대비되는 사랑의 대상


영화는 시간보다 공간이 중시되며, 극중 인물은 불과 물의 이미지로 대변될 수 있다. 인물의 속성을 나누기에 따라 물과 불이라는 이미지에 투과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어파이어(Afire)라는 제목부터 화재라는 뜻이고, 무엇보다 영화는 불이라는 소재에서 따왔다. 한편, 펠릭스의 별장으로부터 30km 떨어진 곳에서 산불이 일어나고 인근에는 바가 있다. 이처럼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은 불과 물로 이루어져 있다. 좀 더 깊게 파고들면 불과 물은 바로 인물 그 자체다. 나디아가 불이라면 펠릭스는 물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함의가 있다.


펠렉스(랭스턴 위벨)는 수용성이 있는 인물이고, 곰팡이가 생기니 습기를 제거하자고 한다든가, 수영하러 가자며 레온을 바다로 이끈다든가, 예술학교에 지원할 포트폴리오로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는다든가 물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나디아(파울라 베어)는 누구에게나 뜨거운 포옹을 해주고, 레드와인을 따라준다든가(화이트와인의 경우 직접 따라주지 않았다), 들판에 흘린 굴라쉬를 담아달라는 부탁을 한다든가, 헬무트(마티아스 브란트)를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해 숲을 통과한다든가 불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서 레온은 나디아에게 고백을 하고, 펠릭스는 데비트(엔노 트렙스)와 함께 고장난 차를 끌고 오려다 불길에 휩싸여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파이어>는 레온이 불과 물 중에서 불을 택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펠릭스의 이미지로 구현된 세상


펠릭스는 막연히 '물'이라는 주제로 예술학교 포트폴리오를 준비하다가 바다를 바라보는 인물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과 앞모습을 찍은 사진을 연결지어 의미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한다. 헬무트는 이에 대해 두 사진 사이에 바다를 넣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해준다. 이는 마치 쿨레쇼프의 몽타주 실험(https://youtu.be/_gGl3LJ7vHc?si=l3uv7O3m09rTr0Xs)을 떠오르게 한다. 하나의 숏 그 자체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앞뒤 숏과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의미나 감정을 만들어낸다는 내용으로, 펠릭스가 촬영한 인물의 뒷모습 → 바다 → 인물의 앞모습 순으로 배열하는 것이 쿨레쇼프의 몽타주 실험과 유사한 효과를 일으킨다.


이는 비단 펠릭스의 포트폴리오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헬무트의 이야기를 듣고 홀로 해변에서 슬픔을 흐느끼는 레온의 모습도 뒷모습 → 바다 → 앞모습 순으로 카메라는 숏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게 레온의 소설 속 이야기라면 펠렉스의 이미지로 그 세상이 구현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또한, 소설 끝자락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소설인 클럽 샌드위치는 입으로 낭독만 되고 있는 반면, 이 모든 이야기를 포괄하는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소설은 낭독과 이미지가 결합된 형식이다. 이렇듯 언어와 이미지가 결합되었다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 소설 속 소설은 영화에서 수용되지 못하지만, 영화 속 영화 같은 소설은 영화에서 수용된다는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다.



서로를 사랑하게 됐을까?


감독은 전작들에 이어 <어파이어>에서도 창문을 즐겨 쓴다. 창문은 나디아를 담게 되면서 레온이 바라보는 나디아의 이미지는 더 특별한 것이 된다. 또 나디아와 레온을 분리시키는 것이기도 하면서, 레온이 창문 너머로 나디아를 볼 때 빨간 원피스와 초록색 잔디, 빨랫감이 바람에 산들거리는 모습이 하나의 풍경처럼 아름답게 보이게 된다. 반대로 레온 역시 창문이라는 틀 속에서 이미지가 되는, 이를 통해 레온은 우리가 그릴 수 있는 대상이 된다. 나디아는 젊은 여성이고 남자가 이 여자를 욕망하지만 이 남자의 욕망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처럼 그릴 수 있는 반면, 레온은 '일이 허락하지 않는다'며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지만 극중 누구보다도 나디아를 욕망하는 어리석은 남성으로 보여진다.


레온과 나디아가 다시 만나면서 희망적인 결말로 나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레온과 나디아는 서로 마주보게 되는데, 이는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들을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똑바로 담아내는 펠렉스의 사진예술의 기본 구조와 일치한다. 레온은 더 이상 나디아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직시한다. 영화는 창작의 불모에 있는 상태의 인물이 어떻게 성장해가는가를 담고 있지만, 필연적으로 멜로드라마의 순간을 경유하고 있었다.




끝으로 영화 <어파이어>에 대한 별점과 한줄평을 남기려 한다.



★★★★

타오르는 꿈 속에서 길을 잘못 든 오만한 사랑.




참고자료

김소희(영화평론가), "[인터뷰] 이미지를 경유할 때 잔혹함을 해체할 수 있다, 크리스티안 페촐트 감독 인터뷰", 「씨네21」, 202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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