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루이저 로스차일드 박사는 어느 날 벼룩의 점프력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그는 한 무리의 벼룩을 실험용 대형 용기에 집어넣고, 투명한 유리로 덮었다. 그러자 뛰어오르는 습성이 있는 벼룩들이 유리 덮개에 부딪혀 '탁탁'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얼마 뒤 소리가 잦아들자 그는 유리 덮개를 열었다. 벼룩들은 여전히 뛰고 있었지만 놀랍게도 모두 뛰는 높이가 유리 덮개 근처까지로 일정했다. 충분히 용기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데도 벼룩들은 덮개에 머리를 부딪히지 않으려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벼룩 실험 이야기를 한 번쯤 들어 봤으리라 생각한다. 보통 벼룩 실험 이야기를 통해서 얻어가야 할 교훈은 자신의 한계를 정하지 말라는 메시지이고, 그래서 이 실험은 자기 계발서나 투자 관련 도서에 간혹 인용되기도 한다. 하지만 로스차일드가 진행한 벼룩 실험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추가 실험>
로스차일드는 한 가지 실험을 추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벼룩이 들어 있는 용기 밑에 알코올램프를 두고 불을 붙였다. 5분도 안 되어서 용기는 뜨거워졌고, 모든 벼룩들이 자연스레 생존 본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벼룩들은 머리가 유리 덮개에 부딪히든 말든 최대한 높이 뛰어 모두 용기에서 빠져나왔다.
나는 로스 차일드가 수행한 모든 실험에 대해 알게 된 후,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인생이 이 실험으로 대변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의 중학교 입학 순간부터 순탄치 못한 과정을 거친 후에 본격적인 중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의 중학교 생활은 겉보기엔 평탄했다. 어머니의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난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는 모른 채 무작정 열심히 공부했다. 운이 좋을 때는 반에서 1등 전교에서 10등 안에도 몇 번 들었고, 평균적으로 반에서 2등 전교에서 20등 안 정도의 석차를 유지했다. 행여나 성적이 많이 떨어진 시험(그래봤자 전교 50등 내외 정도 수준)에서는 어김없이 어머니의 체벌과 폭언이 가해졌다. 그래도 난 괜찮았다.
중학교 생활 3년 동안, 주옥같은 명작 게임들이 쏟아졌고 친구들은 '어둠의 전설', '바람의 나라'와 같은 온라인 RPG게임을 함께 즐기며, 학교에서 이야기 꽃을 피웠다. 혹은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2'와 같은 게임을 열심히 하며, 나날이 게임 실력이 향상되었다. 하지만 난 어머니가 정해놓은 1주에 게임 2시간 룰을 철저히 지키며,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지 못했다. 어머니는 외출을 하고 오신 날에는 게임을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CRT 모니터의 뒷부분을 만져 보곤 했다. 그래서 나는 게임을 몰래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게임을 같이 시작해도 결국 나는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없을 정도로 격차가 벌어졌다. 그래도 난 괜찮았다.
중학생 시절에는 우리 가족 형편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근검절약 정신 때문에 나의 용돈은 항상 부족했다. 학원에서 하원하는 길에 나는 친구들이 군것질하는 것을 쳐다보면서, '한입만'이라고 부탁하거나 100원씩 빌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결국 친구들 사이에서 내 별명은 '백 원만'이 되었다. 하지만 용돈을 올려달라는 내 요청에는 묵묵 무답이시던 어머니는 교육에는 돈을 아끼시지 않으셨고, 가끔 성적이 좋지 않을 때면 얼마나 너를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지불하고 있는지 직접 확인해보라며 학원비를 현금으로 내어주고, 직접 내고 오라고 하신 적도 있었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는 정도의 용돈을 받길 바라왔는데 어머니가 저런 행동을 하실 때면 그냥 숨이 턱 막혔다. 그래도 난 괜찮았다.
이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순간을 난 괜찮다고 돼 내었다.
그리고 결국 안 괜찮아졌다. 나는 어머니가 짜놓은 틀 안에서 자아를 찾지 못한 채 반항 없이살아갔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혼자 속앓이 했던 것이 결국 한 없이 깊은 고름이 되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어느 순간부터 내 마음이 너무 공허해서, 난 새로운 자극을 찾게 되었다. 그렇게 찾게 된 것이 동네마트에서 하는 도둑질이었다. 어느 날 학원 수업이 끝난 후, 몇몇 친구들과 마트에 가서 학원 신발주머니에 먹을 것을 잔뜩 훔쳤다. 첫 시도에 심장이 두근두근 했지만, 걸리지 않았고 마트에서 나와서 신발주머니의 물건을 확인한 순간 나는 너무 짜릿했다. 그 당시에 나는 항상 굶주려 있었기에 점점 많은 양의 과자와 초콜릿을 훔쳐서 친구에게 일부 나눠주고, 나머지를 다 먹어 치웠다. 배가 고프지 않을 때애도, 채워지지 않는 욕구불만에 나는 끊임없이 먹었다. 도둑질에 대한 짜릿함이 무뎌졌을 즈음에 한 친구가 마트 주인에게 잡히고 경찰까지 대동하는 큰 사건이 되고 나서야, 나는 그 행동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마트에서 도둑질을 했던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 나는 어마어마하게 살이 쪘다.
(지금은 내가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인지하고 있고, 마트 주인께는 너무나도 죄송한 마음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어머니가 남들에게 흔히 말하던 "우리 아들은 착하고 공부도 잘해. 뭐 사달라고 떼써본 적 한번 없어"라는 말이 지독하게 듣기 싫었다. 어머니는 나쁜 의도로 그런 말을 하시진 않았겠지만, 나는 그 멘트가 마치 나에게 하는 가스라이팅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어머니에게 앞으로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소리쳤다.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방식은 어느 것 하나 내가 결정한 것이 없었고, 다 어머니 때문이었다고 앞으로는 말 잘 듣는 착한 아들이 될 생각도 없고, 그런 소리 한 번만 더 하면 더 삐뚤어지겠다고 소리 질렀다. 그리고 현관문이 부서져라 닫고, 집을 나갔다. 내 주제에 가출을 한 건 아니었고 몇 시간 화를 삭이고 집에 들어왔을 때,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도 어머니가 나를 대하는 스탠스는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중학생 시절이 끝이 나고 우수한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속은 곪아 버린 상태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학군이 좋거나 좋은 면학분위기를 가진 지역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하위권 친구들이 걸러지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기에 중학교 때만큼의 석차를 유지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학 후에 치른 첫 중간고사와 모의고사에서 운 좋게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었고, 이때의 성적이 어머니의 기대치를 한껏 높여놓고 말았다. 그리고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평소와 크게 다름없이 공부를 했음에도 전교 석차가 3배 정도 밀렸던 적이 있었다.(전교 70등 정도로 기억하고 있다.)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시험 성적표를 들고 간 날 어머니께 따귀를 맞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난 그날부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어머니가 짜놓은 틀 안에서 열심히 발버둥 쳐봤지만, 내게 남은 건 고통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