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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도남 Mar 27. 2024

난 이제 서울 시민이 아니에요 -2-

갑작스러운 거제 파견을 통보받은 후, 정신차려 보니 나는 조선소 안에 위치한 고객사 사업장 건물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기간을 제대로 통보받지 못했기에 2개월 안에 복귀할 것이라 예상했고, 나는 거제 시내에 위치한 고시원을 잡아서 출퇴근 했다. 2024년 현재 우리나라의 조선 경기는 매우 많이 침체되었지만, 2015년 당시는 조선소 경기가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 정도 였다. 조선소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일하고 있었고, 고객사는 원가절감 효율을 극대화 하기 위해 시스템을 개비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고시텔 방 구하기는 정말 쉽지 않았고, 간신히 창문이 없는 골방을 50만원이라는 큰 돈을 주고 구할 수 있었다. 파견근무가 금방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창문이 없는 골방에서 2달을 버텼지만, 기간이 11개월로 확정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 난 좌절했다. 고시원 주인 아주머니께 부탁해서 창문이 있는 좀 더 큰 방으로 옮기긴 했으나 방값은 60만원으로 올랐다. 고시원 방에 60만원이라는 비용을 쓰는게 못내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별수 없었다. 


나는 서울보다 더 비싼 거제의 살인적인 물가를 체감하며 고시원에서 하루하루 버텼다. 주말에 서울에 있는 여자친구를 만나러 갈 생각에 5일을 버텼고, 나중에 같이 파견온 선배들과 친해져서 주중에는 4~5일 술을 마셨다. (사실 거제에서는 그것 말고는 딱히 할게 없었다.) 지금도 거제 파견근무를 함께 했던 선배들과는 거의 전우와 같은 사이가 되어 가깝게 지내고 있고, 선배님들은 노잼이었던 거제생활의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나는 선배님들 덕분에 우울했던 거제생활을 이겨낼 수 있었다.


거제에서 한방에 서울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버스밖에 없었는데 차가 막히지 않으면 편도로 4시간 막히면 5시간도 넘게 걸렸다. 특히 금요일 퇴근후의 버스예매는 전쟁과 같았다. 조금만 늦으면 자리가 없었고, 퇴근 후 첫 차를 타도 경부고속도로의 지긋지긋한 교통체증을 뚫고 남부 터미널로 가야만 했다. 그렇기에 파견근무를 하는 동안 '불금'따위는 있을리가 만무했고 나는 집에 도착해서 씼고 자기 바빴다. 여자친구와 꿀맛같은 토요일을 보내고, 일요일 오후가 되면 급격히 기분이 안좋아졌다. 왜냐면 거제로 향하는 막차는 20시였고, 난 20시까지는 어떻게든 남부터미널로 가야만 했기 떄문이었다. 결국 거제 근무를 했던 기간동안 내 주말은 반쪽짜리일 뿐이었다. 더 웃긴건 같이 파견근무를 했던 선배들을 모두 20시 차 안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들 모두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중에는 매주 서울에 올라가는 것도 쉽지는 않았다. 거제에 근무하는걸 어머니가 알게 되셨고, 주말에 집에 오지 않는 것에 대해 매우 섭섭해 하셨다. 말이 섭섭이지 그 당시에는 어찌나 역정을 내시던지... 난감하기 이를데 없었다. 집에 가봐야 딱히 할 것도 없고, 암울 했던 학창시절 탓에 만날 친구도 없었다. 부모님께는 죄송했지만, 나는 갖은 이유를 만들어서 1달중 1주를 제외하고는 무조건 서울로 올라갔다. 파견비로 월급외에 한달에 180만원이라는 돈을 추가로 받았지만, 60만원의 방값 그리고 요즘말로 "시발비용"을 많이 지불한 탓에 11개월의 파견근무 끝에 내 수중에 남은 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나는 거제 파견 근무기간 동안 2가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첫번째는 난 그저 법적으로만 서울 시민일뿐, 서울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게 무슨뜻이냐 하면 나에게 간질간질한 표준 서울말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충청도에서 보낸 학창시절, 그리고 강원도에서 보낸 군 생활 동안 나의 말투는 상당히 많이 바뀌어 있었다. 나중에서야 내가 표준말을 상당히 잘 구사한다는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닫긴 했으나, 그때는 정말 내 말투에 사투리 억양이 남아있지 않을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거제에서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내 말투가 네이티브 부산사투리로 돌아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채 1주일이 걸리지 않았다. 약 7년이라는 기간을 고향을 떠나 살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각인된 부산 사투리는 내 DNA 어딘가에 새겨져 있다가 거제생활하는 동안 폭발 하고야 말았다. 이것을 알게된 순간부터 난 간질간질한 서울말을 하려는 노력을 다 내려놓고, 굳이 사투리 억양을 숨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두번째는 서울 물가가 오히려 비싸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서울 수도권의 부동산 가격은 폭발적인 수요와 공급의 제한으로 인해 타 지방에 비해 비쌀수 밖에 없지만, 그 외에는 오히려 지방 소도시보다 물가가 싼 부분이 분명이 있었다. (서울 압구정, 강남, 용산 같은 곳을 얘기 하는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대학 생활을 했던 충정도의 소도시들 역시 삼성그룹의 많은 회사들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소비력이 강한 사람이 많았고, 상권내 경쟁은 서울 대비 덜 치열하기 때문에 생각보다 물가가 비쌌다. 그리고 거제 역시 바로 옆에 붙어있는 대도시인 부산에 비해서, 물가가 굉장히 비쌌다.


그렇게 2가지의 깨달음을 얻은 채, 난 파견근무가 끝나자마자 바로 서울로 복귀했다. 복귀하고 나서 보니 입사하고 난 이후에 얻었던 전세집이 계약 만료 2달을 앞두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서울 회사 생활 1년 후, 거제 파견근무까지 11개월 했으니 2년의 전세 계약기간이 거의 끝난 것이다. 집주인에게 연락했더니 계약을 갱신하면 동일 전세금을 유지하는 대신 관리비를 15만원 올린다고 했다. 하지만 거제 생활을 하는 동안 별도로 가지고 있던 내 짐 덕분에 더 이상 5평짜리 원룸에서 살기는 굉장히 버거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세금을 올리더라도, 같은 건물의 방 2개짜리 다른방을 계약하고 싶었다. 하지만 집 주인이 그 방은 월세만 받는다고 통보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성수동 생활을 정리하고 와이프가 있는 송파구쪽으로 자취방을 옮기기로 결정했다.


나는 2호선 뚝섬역에서 걸어서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첫번째 자취방과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비록 성수동에서의 온전한 생활은 2년 중 1년정도 뿐이었지만, 사는 동안 단 하나의 불만도 없이 잘 지냈다. 20분밖에 걸리지 않는 출/퇴근 시간, 있을건 다 있으면서 조용한 동네 분위기, 조경이 멋지게 되어있는 서울숲, 곳곳에 숨어 있는 노포 맛집 지금 생각해도 혼자사는 젊은 남성이 살기에 더할 나위없는 환경이었다. 


와이프의 설득으로 송파구로 이사갈 결심을 하긴 했지만,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석촌호수 근처의 신축 빌라를 얻었는데 성수동에서 살때 보다, 크기는 1.3배 커졌지만 전세가격은 정확히 2배였다. (성수동 집값이 많이 올라서 지금은 가격이 차이가 없을 거라 보지만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잠실에 위치한 회사까지는 걸어서 다닐 수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석촌호수 산책이 가능했다. 그렇게 나는 2016년부터 성동구민에서 송파구민이 되어 서울생활을 이어 나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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